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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인사이트] 탈레반에 퇴짜 맞은 철수 시한 연장…아프간서 연락 두절된 미국인 1천 명은?

[워싱턴 인사이트] 탈레반에 퇴짜 맞은 철수 시한 연장…아프간서 연락 두절된 미국인 1천 명은?

5시간이나 늦어진 바이든 연설…"철수 시한은 그대로 8월 31일"

지난 화요일 G7 정상과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논의한 뒤 진행될 예정이었던 바이든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은 원래 일정표에는 정오로 예정돼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아프간 철수에 대해서는 G7 정상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철수 시한을 다소 연장하는 걸로 추진하겠다는 정도로 발표가 나오지 않을까 전망됐었습니다. 하지만 연설은 무려 5시간이나 지나서 시작됐습니다.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발표가 지연됐다는 건 대개 결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의 절반 정도를 투자 계획 등에 대해 장황한 성과를 늘어놓더니(아프간 철수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사실 아무도 관심도 없는 내용입니다.) 아프간 문제에 대해서 세 가지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① 철수 시한은 연장 없이 8월 31일이다. ② G7과 EU, NATO, UN과 아프간 문제에 공조하기로 합의했다. ③ 아프간 피란민 지원 방안에 대한 상호 의무에 대한 논의했다. 이정도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핵심은 철수 시한 연장 없이 그냥 8월 31일로 끝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철수 시한에 대해서는 계속 공동 협조하기로 했다면서도 지금 현재 속도라면 8월 31일에 철수가 끝난다고 발표했습니다. 빨리 끝낼수록 더 좋다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군대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부연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이든 대통령은 직접 ISIS-K라는 IS의 한 지부 이름을 거론하면서, 시한을 넘기면 이들의 공격 위험이 커진다고 강조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테러조직 지부 이름까지 미국 대통령이 직접 거론하는 건 대단히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물론 바이든 대통령은 국방부와 국무부에 필요한 경우에 대비해서 비상계획(contingency plans)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설명했습니다. 
 

CIA·탈레반 비밀회동서 퇴짜 맞은 철수 시한 연장…결정권자는 탈레반

이날 가장 관심을 모았던 뉴스는 월리엄 번스 CIA 국장과 탈레반 리더인 압둘 가니 바라다르와 비밀 회동이었습니다. 이미 월요일에 만났다고 했는데, 미국 언론에 기사가 나면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닌 일이 됐습니다. 탈레반을 정상적인 국가로 인정할 수 없는 미국이 국무부 채널이 아닌 스파이 채널을 통해 협상을 할 수밖에 없는 고민이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뒤 화요일 탈레반 대변인이 8월 31일 철수 시한은 최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러면서 아프간인은 공항으로 가는 걸 금지하겠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처형 대상이 될지 모르는, 미국에 협력했던 아프간인들의 출국은 앞으로 차단할 거라는 의미입니다.  

미국 지상파들과 주요 뉴스 채널의 중동 전문 특파원들이 탈레반 지도부의 취재 허가를 받고 카불에 들어가 있는데, 이들의 현장 르포를 보니 탈레반이 실제 바리케이드를 치고 내국인을 걸러내는 작업을 시작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전운이 감도는 일이 벌어지면 분쟁 지역에 급파된 미국 특파원들은 나이 지긋한 사람들도 밤낮 가리지 않고 몸이 부서져라 라이브 방송을 하는데, 이들의 체력과 열정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본인의 스태프와 함께 취재를 하는 미국식 언론 시스템은 이런 큰 사건을 기자의 얼굴을 알릴 기회로 생각하는 면도 있습니다. 오늘 미국 방송사들이 내보낸 카불 시내 현장 르포 아이템도 각사 보도 내용이 비슷했는데, 현지에서 기사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하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탈레반이 시한 변동이 없다고 못 박은 건 CIA, 탈레반 비밀 회동이 실패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미 ABC 방송 조지 스테파노풀러스와 단독 인터뷰에서 "미국인이 남아 있다면 그들을 빼내기 위해 우리는 남을 것이다"고 말해 기한 연장을 가능성을 시사한 바 있습니다. 이번 비밀 회동에서는 철수 시한 연장에 대해서 분명 심각하게 논의됐을 것이고, 탈레반이 미국의 제안을 퇴짜놨다는 건 거의 확실합니다. 이번 사태가 터지기 전에 바이든이 8월 말로 시한을 정했고 그걸 지키라는 것인데, 탈레반이 시한 이후에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다고 나오면 미국도 답이 없습니다. 시한에 대한 최종 결정권한은 탈레반에 있다는 걸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합니다. 상당수 미국인들은 미국이 이렇게 숙이고 들어가 테러조직에게 아쉬운 소리 하며 협상하는 것 자체를 대단한 굴욕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G7 회의에서도 철수 시한을 연장하자는 정상들의 요청이 빗발쳤다고 하는데, 바이든 대통령도 도저히 어쩔 방법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해 무시무시한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 미국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때 파우치 박사가 "시간표는 사람이 아닌 바이러스가 정한다"고 말했던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아프간서 연락 두절된 미국인 1천 명은?…진퇴양난 바이든 

이제 철수 시간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현장에 배치됐다는 미군 5800명이 빠져나오기도 시간이 빠듯합니다. 수많은 화기와 장비 등을 챙겨서 철수하는 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립니다. 이미 현장에 배치됐던 미군 수백 명이 철수했다고 국방부가 발표했습니다. 공항에 배치된 미군도 결국은 빠른 속도로 빠지게 될 것이고, 카불 공항을 탈레반이 접수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여전히 카불 공항은 아비규환 상태입니다. 맥사(Maxar)에서 월요일 촬영한 위성사진을 보면 공항 앞 도로는 차량으로 가득차 있고, 활주로에도 사람이 엄청나게 서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수송기에 타려는 사람들인데, 원하는 사람들이 아직 다 비행기를 못 타는 상황으로 보입니다. 철수 종료 시점이 되면 마지막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또 사람들이 매달리는 게 아닐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이번 탈출의 마지막 장면이 또 다시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될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사진=Maxar)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8월 14일 이래로 7만5900명이 카불 공항에서 탈출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각종 군용기 등을 이용해서 굉장히 빠른 속도로 탈출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사실 중요한 건 숫자 자체가 아닙니다. 오늘 블링컨 국무장관은 미국 여권을 가진 미국인 4천 5백여 명이 카불을 빠져나왔다고 발표했습니다. 블링컨 국무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연락두절 상태의 미국인이 아프간에 1천여 명이 있다고 확인했습니다. 미국 시민권자 숫자를 의미하는데, 영주권자와 체류 비자를 가진 사람을 포함하면 더 많아집니다. (미국 언론들은 아프간에 체류하는 미국인이 1만 명에서 1만 5천 명으로 추산된다고 보도했습니다.) 발이 묶인 사람 상당수는 공항으로 이동하는 게 어려운 것으로 보입니다. 폭스 뉴스에는 고립돼 공항에 가지도 못하는 미국 국적자들의 인터뷰가 벌써부터 나오는 상황입니다. 남은 기간 열심히 미국인들을 빼낸다 하더라도 이 인원을 다 빼내는 게 과연 가능할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전쟁 상황에서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미국인은 구해낸다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가치관이 여전히 미국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프간에 1천 명의 미국인이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황을 바이든 대통령이 어떻게 돌파할지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벌써 공화당은 연일 기자회견을 열고 바이든 대통령을 공격하고 있고, 트럼프 선거 진영에서는 바이든이 아프간을 탈레반 손에 넘어가게 했다며 사퇴해야 한다고 공세를 벌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곧 9.11사태 20주년이 됩니다. 국가 애도기간에 아프간에서 아무 성과 없이 초라하게 철군한 것도 모자라 미국인 상당수가 발이 묶여 있다면 백악관 입장에서는 악몽 같은 일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미 벌어진 대형 사고를 계속 좌고우면하다간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옷은 더러워졌지만 수렁에서 최대한 빨리 빠져나오려는 몸부림을 치는 것 같습니다. 민주당 진영에서는 사실 트럼프가 계획하고 실행까지 하려고 했던 일을 엉뚱하게 바이든이 총대를 메고 집행해 안 먹어도 되는 욕을 먹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은 나이가 아닌 바이든 대통령은 자기 임기 내에 미국의 주요 숙제를 해결하려는 조바심을 내는 게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천문학적인 예산안 추진이나 아프간 철군 같은 초대형 의사 결정은 바이든이어서 실행하는 면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트위터 계정을 뺏기고 영향력을 급격히 상실했던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선거 유세를 하면서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습니다. 트럼프의 주장은 아예 기사로 다루지 않던 미국 주류 매체에서도 이제 조금씩 연설 내용이 방송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을 바이든이 대신 해주고, 덤으로 욕까지 먹으며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으니 트럼프 전 대통령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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