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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길, 책을 만나다 ① 반항, 포기하지 않고 견디는 것! - 북한산 의상능선을 오르다

- 시지프, 무용하고 희망 없는 형벌에 반항하다… <시지프 신화>

'존재한다는 이유로 끝까지 가야 하는' 우리의 숙명은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거친 삶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라고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무용하고 희망 없는
형벌에 대하여


어쩌면, 우리의 삶은 반복의 연속이다. 그 반복되는 시간의 틈바구니 안에서, 우리의 일상은 존재한다. 쳇바퀴를 돌듯이, 또는 하염없이 걸어도 결국은 출발한 그 자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뫼비우스의 띠를 따라가듯 살아간다는 것은 대체로 무한반복의 연속이다. 그렇게 매일 매일 조금씩 순서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국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재생되는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돌고 돈다. 오래된 필름의 빗방울처럼 명멸하는 스크래치는 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무의미한 듯 보이는 무한반복의 일상 속에서도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사실이다. 그 삶의 의미로 인해 우리는 그 반복의 따분함을 감내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 삶의 터전에서 분투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그리고 삶의 의미 이전에 '존재한다는 이유로 끝까지 가야 하는' 우리의 숙명 역시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거친 삶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라고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 '끝까지 가야 하는' 삶의 날들에 우리는 각자만의 땀과 기대를 버무려 내일이라는 새로운 날을 사는 동력으로 삼지만, 반복되는 일상의 무료함은 '그래도 가야한다'는 명제에 대한 회의와 권태를 불러온다는 사실이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오는 삶의 여정은 아무래도 힘에 부치고, 관성처럼 이어지는 평행선의 막막함은 곧잘 좌절과 권태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한 봉우리를 넘었는데 이내 다른 봉우리가 앞을 막아서던 경험은 가야할 길의 어려움보다는 반복의 여정이 주는 지루함과 고단함이 문제였다.

길을 걸을 때도 마찬가지다.

특히 봉우리들이 길게 늘어서 있는 능선을 따라 걸을 때면 전진과 포기라는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갈등하고 헤매기 일쑤다. 딴에는 계속 이어지는 봉우리를 오르기 위해 등산화 끈을 다시 동여매고 새로운 다짐과 결심을 길 위에다 새겨 넣기도 하지만,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워 또 한 발을 떼어놓는 반복의 여정은 여전히 지루하고 힘들기 때문이다.

계절이 여름으로 거침없이 달려가던 어느 날, 북한산의 의상능선을 오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봉우리들의 행렬 앞에서 까무룩 놀라기를 여러 번…. 한 봉우리를 넘었는데 이내 다른 봉우리가 앞을 막아서던 경험은 가야할 길의 어려움보다는 반복의 여정이 주는 지루함과 고단함이 문제였다.

의상봉을 오르면 용출봉이 막아서고, 계속해서 용혈봉, 증취봉, 나월봉, 나한봉, 716봉(상원봉), 그리고 문수봉에 이르기까지 8개의 봉우리로 이어지는 능선을 오르다 보면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자문(自問)은 어쩌면 당연하다.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팥죽 같은 땀을 흘리며 나아가는 여정은 능숙하지 않은 초보 등산객에게는 그야말로 고역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무의미하다고 할 수도 있는 산봉우리들의 순례. 이곳을 힘들여 오를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힘들어 주저앉고 싶고, 또 올라가봐야 어차피 내려와야 할 여정이 분명한데, 게다가 이 산이나 저 산이나 그 차이조차 온전히 구별하지 못한 채로 산의 너울을 헤치고 나아가는 발걸음은 그 힘듦 만큼에 비례해 그만큼의 의문이 쌓이기 마련이다.

오래 전 김상용 시인이 그랬듯 "왜 사냐건 / 웃지요" 하며 건듯 불어오는 바람마냥 왜 오르느냐는 질문에 싱거운 듯 무거운 듯 또는 선문답인 양 둘러댈 수도 있겠으나, 산행의 경험이 일천한 나로서는 쉬이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영국의 어느 유명한 산악인처럼 "산이 그곳에 있으니 산을 오른다"고 건방을 떨 수도 없지 않은가.

용출봉을 오르는 사람들. 그들은 중력을 거역하는 중이다.

어쩌면 알베르 카뮈(Albert Camus)가 지적하였듯, 굴러 떨어질 것이 뻔한 바위를 산으로 옮기라는 '무용하고 희망 없는 형벌'을 받았던 시지프(Sisyphos, *시시포스의 불어 발음)와 같은 벌을 받았더란 말인가. 그렇다면 신을 기망한 죄를 지은 시지프와 달리 산을 오르는 우리의 죄는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카뮈에 의하면, '아마도 살아간다는, 또 살아내야 한다는 것이 이유'라면 그 이유일 것이다. 존재 자체가 문제라는 말이다. 하이데거가 지적하는 "인간은 존재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가장 큰 문제로 삼고 있는 존재자"라는 그 말처럼 존재가 문제인 것이다.

카뮈는 그의 에세이 <시지프 신화>에서 현대인들의 권태롭고 전망 없는 일상을 시지프의 '무용하고 희망 없는 형벌'과도 같다고 했었다. 카뮈에 따르면, 시지프의 형벌이 가혹한 이유는 굴러 떨어질 것이 분명한 바위를 끊임없이 산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한다는 사실보다 힘들여 밀어올린 바위가 정상에 오르자마자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는, 그래서 결국에는 그가 흘린 땀과 노력 모두, 나아가 그의 삶 전체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의 평범한 일상 또한 마찬가지라고 그는 말한다. 이를 카뮈는 부조리(absurdity)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부조리는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습관처럼 살아가는 그 어느 틈에 불현듯 깨닫는 삶의 무의미성이 그것이다. 판에 박힌 듯 일상의 조건에 순응하며 살아가다가도 문득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살고 있지?' 같은 의문과 맞닥뜨리게 되는 그 느닷없음이 삶의 부조리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비합리적인 세계의 모순이 도드라지며, 결국에는 삶의 의미가 사라지고, 삶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와 일상을 연결해주던 끈이 끊어져 버리는 그 순간의 권태가 부조리의 실체라는 말이다. 그것은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공허의 세계이며, 그러니 애당초 희망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 세계다.

반항은 '자살'과 같은 회피나 기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견딜 수 없음을 '견뎌내는' 것이다.

유일하고 일관성 있는
태도로서의 '반항'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카뮈는 이 부조리에 대항하는 '유일하고 일관성 있는 태도는 반항'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반항은 '사막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그 속에서 버티는 것'이다. '사막에서 버티는' 것이란 '사막'이란 대상이 삶의 터전으로서 부적절함을 의미하듯 삶과 세계의 무의미한 부조리 앞에서 '자살'과 같은 회피나 기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견딜 수 없음을 '견뎌내는' 것이며 '지탱하는' 것이다. 즉 카뮈에게 있어 반항은 체념이 아니라 짓누르는 운명에 대해 저항을 통해 자기(自己)라는 존재를 확인하는 방법이었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부조리한 운명에 극적으로 저항하는 신화 속 인물이 바로 시지프다. 시지프가 힘들게 산의 정상으로 밀어올린 바위는 정상에 도달하자마자 다시 계곡을 타고 하얀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굴러 떨어진다.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이 무한반복을 묵묵히 감당하는 시지프의 그 생각, 그 자세가 극적인 반항의 모습이라고 카뮈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의 삶은 신들마저도 어쩌지 못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무용하고 희망 없는 형벌을 가한 신들에 대한 시지프의 복수이자, 승리라는 것이다.

용출봉이 보이고, 그 너머에 의상봉이 아스라하다.

어떤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 한다.


북한산의 의상능선은 북한산의 고찰인 백화사에서 출발해 의상봉(502m)에서 문수봉(727m)까지 연이어 이어져 있는 8개의 봉우리를 올라야 하는 코스다. 그런데 이 길이 산행 초보에게는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북한산의 의상능선은 북한산국립공원 내에 위치한 여러 봉우리 중 걸어서 갈 수 있는 코스로는 가장 어려운 곳이라 할 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흔히 유명한 고산준령들이 그러하듯 오르는 과정은 저마다의 인내와 끈기를 요구하는 힘든 여정임이 분명하지만, 오르고 나면 그 힘듦이 반드시 치러야 할 비용이었음을 깨달을 때가 있다. 차라리 등반의 여정 중에 맞닥뜨리는 그 빼어난 풍광들은 감내해야 했던 작은 고난 내지 비용에 비하면 이익이 훨씬 컸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걸 보려고 여기에 있구나' 하는 감탄은 자동이다. 그래서 흔히들 의상능선이야말로 북한산 산행의 최고라 칭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의상능선을 이루는 각각의 봉우리가 나름의 멋과 난이도를 자랑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의상능선 산행의 시작인 의상봉 산행이 가장 난이도가 높다. 산행의 초입부터 막아서는 암릉의 위세에 기가 질려서인지도 모른다. 바위산인 의상능선의 여러 봉우리를 오르자면 두 손과 두 발을 모두 사용해야만 오를 수 있는 곳이 여러 곳이나 의상봉을 오를 때 특히 두 손 두 발은 원래 제 역할이 무엇이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바빠진다. 비록 20~30m의 높이에 불과한 암벽이지만, 그런 암벽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지프의 반항이 필요한 이유다. 저항의 대상은 산이면서, 나 자신이다.

특히 직각에 가까운 암벽을 밧줄에 매달려 대롱거리며 올라가노라면, 예상 못한 바는 아니나 시지프의 바위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지는 몸의 배신과 저항은 어쨌든 괴롭기 마련이다. 산을 올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 몸을 산 위로 끌어 올리고 중인지가 모호해지는 경계의 절망 앞에서 그래도 가야 한다는 당면과제는 더욱 도드라지고, 결국 문제의 해결책은 절박하고 애처로운 몸부림뿐이다.

북한산 의상능선 사진 6
산을 올라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 몸을 산 위로 끌어 올리고 중인지가 모호해지는 경계를 만난다.

다행인 것은 저항이 거셀수록 도전에 맞서는 내 안의 전투력 역시 상승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이다. 저항은 동력 발생의 필요충분조건이라더니 맞는 말이었다. 내 몸이 저도 어쩌지 못하는 중력이라는 불가항력의 도전 앞에서 그래도 올라가야 한다는 내 안의 의지는 제 부실함을 극복하고 기어이 몸을 봉우리 너머로 밀어올리고야 마는 마법을 부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산을 올라와 보면 안다. 산엘 올라야 산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눈높이가 다르면 풍경도 달라진다. 의상능선도 마찬가지다. 의상능선을 따라 이어진 장대한 바위산의 웅장한 솟구침은 어느 산과 견주어 보아도 부족함이 없는, 그야말로 장관이다. 이만큼의 수고스러움이 없었다면 이 유려한 능선의 아름다움을 어디에서 볼 수 있더란 말인가.

어떤 풍경을 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니 힘들고 고통스러운 여정은 어쩌면 당연하다. 거친 붓이 쓱 훑고 지나간 듯 담백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씩씩한 모습의 산봉우리들은 산봉우리 위에서라야 제대로 대면할 수 있는 법이다. 설악산을 오르지 않으면 그곳에 공룡이 산다는 사실을 어찌 안단 말인가. 결국 견디고 버티면서 나아가기만 하면 어느 순간, 산은 발아래에 놓이기 마련이고, 그 산이 품고 있는 풍경과 이야기는 제 속을 훤히 다 드러내기 마련이다.

저 멀리 백운대, 노적봉, 만경대가 북한산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고 뻐기기라도 하는 양 기세등등하다.

의상봉의 정상에 서면 능선의 왼편으로 백운대(836m)와 만경대(800m), 그리고 노적봉(716m)이 북한산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고 뻐기기라도 하는 양 기세등등하다. 저 봉우리들 너머에는 인수봉(810.5m)이 허연 허리를 드러낸 채로 우뚝 솟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른편으로는 비봉능선이 부드럽지만 만만치 않은 산세를 자랑하며 우아한 곡선의 자태를 드러낸다.

새삼 산 위에서 바라보는 북한산의 각 봉우리들은 차라리 서울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수십 개의 군도(群島)였다. 섬은 그저 표표히 흐르는 듯 또 멈춘 듯 제 움직임조차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바위를 딛고도 수백 년을 살아낸 소나무와 더불어 그저 푸르게 또 고요하게 흐를 뿐이다. 한편으론 소음 가득한 도시를 떠나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 마지막 힘을 쏟아내는 용들의 포효마냥 굳건하고, 또 엄숙하기까지 하다.

산의 너울들은 마치 포효하는 맹수마냥 의젓하고 또 의연하다.

참다운 노력이란
막막하기 그지없는 사막에 남아
집요함과 통찰을 가지고 사투를 이어가는 것


의상봉을 떠난 길은 용출봉을 지나고, 용혈봉(581m)에 이른다. 산의 너울들은 마치 포효하는 맹수마냥 의젓하고 또 의연하다. 초록과 대비되는 하늘로 솟구치듯 솟은 바위 봉우리들의 파노라마는 여느 산중의 빼어난 봉우리들과 견줘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사람들은 의상능선을 두고 설악산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라고 평가하는 것이리라.

내가 사는 도시에서 머지않은 곳에 이토록 훌륭한 비경을 품은 산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축복이다. 그러니 산을 오르다 몸의 배신 앞에서 절망(?)하더라도 그 산을 두고 투덜대지는 말지어다. 그러니 어쩌랴. 길에 들어선 이상 나아가는 것 말고는 달리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인가. 그저 가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있을 턱이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쌓인 만큼이 갈 수 있는 거리의 최대한이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고 견디면 이기는 것이다. 카뮈에 의하면, 인간 중에서 가장 신중하고 현명했다는 시지프 역시 신들의 형벌에 대응하는 방식은 마찬가지였다.
 
"반항은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 한 생애 전체에 걸쳐 펼쳐져 있는 반항은 그 삶의 위대함을 회복시킨다. 편협하지 않은 사람의 눈에는,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부조리한) 현실과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광경보다 더 아름다운 광경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오만이 펼쳐 보이는 그 광경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것이다." - 카뮈, <시지프 신화>

산을 오른다는 것은 스스로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자신의 꿋꿋함을 시험하는 시련이자 투쟁의 기록이다.

감당해야 할 불행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


긴 길을 걷고 험한 산을 오른다는 것은 자신이 딛고 서 있는 땅과 바위를 타고 넘어 앞으로 나아간다는 몸의 힘겨운 여정인 동시에 스스로 견디고 이겨내야 하는 자신의 꿋꿋함을 시험하는 시련이자 투쟁의 기록이기도 하다. 지속적인 반복이 주는 단조로운 권태, 그리고 땀범벅의 몰골과 후덜거리는 다리, 주저앉고 싶어지는 질긴 욕망 등으로 요약되는 육체적 고통, 그리고 이따금씩 출몰하는 걷는다는 행위에 대한 근원적인 의구심까지… 극복해야 할 대상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온전히 내 몸, 두 발만을 사용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는 아주 사소하고 또 단순한 행위가 쉬운 일이면서도 어려운 일인 이유다.

하물며 굴러 떨어질 것이 분명한 바위를 산 위로 밀어올려야 하는 시지프의 '무용하고 희망 없는' 행위는 오죽할 것인가. 그가 굴러 떨어진 바위를 다시 산 위로 밀어올리기 위해 바위를 부둥켜안을 때, 그 순간의 막막함과 처절함은 형언키 어려운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거운 침묵 속에서 기어이 최초의 한 발을 떼며 꿋꿋하게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투쟁은 그 자체로 자신이란 존재를 자각하며, 스스로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의식(儀式)인 동시에 스스로가 처한 절망에 맞서는 유일한 방법이며, 반항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반항은 카뮈의 말처럼,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서는 (부조리한) 현실과 부둥켜안고 대결하는 최고의 아름다운 광경"이었던 것이다.

상상해 보라!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 그 얼굴에 깃든 숙명을 넘어서는 여유와 자신감, 그 자신감을 뒷받침하는 구릿빛 피부와 굳건한 근육들, 마침내 그 튼튼한 근육들이 힘을 모으고 우지끈 바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그 순간, 한 인간의 투쟁적인 행위는, 결국 형벌을 넘어선다. 마침내는 엄숙하고도 장엄한 자신만의 의식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깊이 없는 시간으로 측정되는 긴 노력 끝에 목표는 기어이 달성되고 만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불리는 이유는 바로 '사고(思考)하는 능력' 때문이다. 다른 면으로는 이 생각하는 능력으로 인해 인간은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인식한다. 시지프의 운명이 비극적인 이유 역시 시지프 스스로 자신이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명을 안 순간부터 그의 비극은 시작된다."고 한 카뮈의 지적은 옳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것은 이 사고하는 능력이 그가 감당해야 할 불행을 감내하고, 견디게 하며, 나아가 극복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 극복의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삶에 긍정하며 지금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삶의 끝이 결국 죽음이라면 인생은 부조리한 것이다. 하지만 비록 인간의 삶이 부조리한 것이라 해도, 난 계속해서 '오직' 인간이기를 원한다. (…) 그리고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적이지 못한' 신의 구원을 기대하지도 않을 것이며, 미래나 영원에 대해 희망이나 기대를 갖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의 삶에 충실할 것이다" - 카뮈, <시지프 신화>

꽃들이 흐드러진 산의 저편에 의상능선이 몸을 잔뜩 늘어뜨린 채로 고요하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다


나월봉을 지나면 나한봉이다. 이 구간은 나름 수월하다. 완만한 능선길을 이루는 나한봉으로 가는 길 중간에는 탁 트인 길이 많아 경치 또한 빼어나다. 그리고 나한봉 정상이 북한산성 치성(雉城,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이라 쉼터로는 제격이다. 물 한 모금 들이켜고, 남은 군것질로 허기를 보충한 다음 의상능선의 마지막 봉우리인 문수봉을 오를 준비를 하는 곳이기도 하다.

716봉(상원봉)에 서서 지나온 능선을 굽어본다. 꽃들이 흐드러진 산의 저편에 길게 뻗어있는 의상능선은 포효하던 용이 긴 잠에라도 빠져 있는 듯 몸을 잔뜩 늘어뜨린 채로 고요하다. 능선의 유려한 허리를 딛고 서 있는 각각의 봉우리는 역린의 비늘인 양 날카롭고 다부지고, 또 수려하다.

드디어 여정의 끝인 문수봉(727m).

북한산은 북한산성 주능선과 비봉능선, 그리고 의상능선이라는 세 줄기가 만나 거산(巨山)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바로 이 세 줄기가 뻗어가다 합쳐져 꼭짓점을 이루는 봉우리가 바로 문수봉이다. 백운대에 오르면 강북구와 노원구가 발아래지만, 문수봉에 오르면 종로구와 중구, 은평구 일대가 바로 눈앞이라 진정한 서울 조망의 으뜸인 봉우리가 문수봉이라 할 만하다.

문수봉. 묵묵히 맞서며 그저 끝까지 가보는 것 말고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인가. 삶의 길에서도, 땅 위의 길에서도 마찬가지다.

산의 정상에 오르면 지나온 여정이 어떠했든 그 자체로 뿌듯하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그 과정이 비록 힘들고 괴로웠더라도 지금 내가 가고자 했던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굳이 몸의 괴로움을 감수하며 산을 올라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그 답은 카뮈가 시지프의 무용하고 희망 없는 형벌을 보며 깨달은 바와 같지 않을까 싶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시지프)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다." - 카뮈, <시지프 신화>

그것이 무용하고 희망 없는 형벌이 되었든, 가혹한 고난의 동굴을 헤매든 결국 주어진 현실에 묵묵히 맞서는 것 말고는 달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는 것이다. 결국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태도가 문제라는 말이다. 어차피 감당해야 할 몫이라면, 씩 한 번 웃어주고는 묵묵히 해내는 것, 시지프의 태도가 옳은 것이다.

까짓 거! 가보지 뭐!

묵묵히 맞서며 그저 끝까지 가보는 것 말고 무슨 방법이 있을 것인가. 삶의 길에서도, 땅 위의 길에서도 마찬가지다.

카뮈는 예술가는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사람이고, 창조한다는 것은 두 번 사는 것이라 말했었다. 여기서 말하는 '산다는 것'은 '느끼며' 사는 것이다. '느끼며 산다는 것'은 명징한 의식, 즉 항상 새롭고 항상 긴장하는 끊임없는 의식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렇게 사는 삶은 잘 사는 것이 아닌, '많이' 사는 길이라고 카뮈는 말한다. 어차피 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모호하다면 아니 또 없다면, 다양한 경험 속에서 '느끼며, 많이 사는 것'이 무용하고 희망 없는 삶을 사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그 모든 삶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삶의 다양함을 골고루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 방법은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길 위에서 만나는 야생화는 걷는 이에겐 더없이 반가운 행운이다.

산으로 가는 그들 역시 마찬가지다.

많이 느끼고, 많이 사는 방법으로서 산을 오르는 그들이 존재한다. 시지프가 묵묵히 감내했던 그 발걸음처럼 자신의 삶을 지탱하며 견디는 반항은 어디서건 유효한 것이다. 어느 한 인간이 감당했던 또 다른 반항의 결과로서 문수봉에서 되돌아보는 의상능선은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삶의 현장이며, 포기를 강요하는 몸의 나약함과 중력에 대해 제대로 응시하고, 멸시한 결과일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가보는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걸은 만큼이 살아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북한산 의상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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