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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육아란 나의 밑바닥을 마주하는 일

파파제스 |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예쁜 딸을 키우는, 육아하는 아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지루한 반복이다.

밥 먹이고 설거지하고 기저귀 갈고 씻기고 옷 갈아 입히고… 닦고 쓸고 치우고의 반복이다. 했던 말을 또 하고 하지 말란 말을 또 한다. 아이의 질문에 같은 대답을 수십 번도 더 한다. 같은 말과, 같은 행동의 반복, 그렇게 끝없이 반복하다 보면 하루가 지나있고 일주일이 지나있다.

나는 올해 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를 키우며 지내고 있는데, 최근 코로나가 심해져 어린이집까지 휴원 하면서 종일 육아와 가사의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 같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무한 반복에 가끔 우울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닦고 쓸고 치우기를 반복해야 하는 현실에 우울감은 한층 깊어진다. 누가 그랬다. 육아는 자신의 밑바닥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그 말처럼 나는 육아를 하면서 내 인내의 밑바닥과 종종 마주한다. 부모가 되기엔 내 인내의 깊이가 너무나 얕은 거 같아 스스로 괴롭고 부족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부모가 되는 것이 원래 이렇게 힘든 것일까?
아니면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일까?


부모 아기 육아 양육 (사진=픽사베이)

생각해 보니 나는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었다. 매번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 내달렸다. 입시를 할 때도 가고 싶은 대학을 가기 위해 재수를 하고 삼수를 했다. 취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기업에 가기 위해 노력했고 취업에 성공했다. 내가 정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며 살았다. 하지만 육아는 정반대였다. 이런 나의 목표 지향적인 방식이 육아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일에 '목표'는 흐릿했고 '성취감'을 느낄만한 뚜렷한 척도가 없었다.

차라리 아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갓난아기일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아이가 똥 싸면 기저귀를 갈고 씻기면 됐다. 배가 고프면 먹이고 졸리면 재우면 하루가 갔다. 상황이 생기면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해하는 육아였다. 하지만 아이가 돌이 지나 언어가 발달하고 자의식이 생기면서부터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는 점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했다. 기저귀를 갈려고 해도 '시어-!'하고 나를 뿌리친다. 도망치는 아이를 붙잡고 설득을 해야 기저귀를 갈 수 있다. 밥 먹기 싫다고 투정 부리면서 먹던 걸 도로 뱉으면 나는 인내에 한계에 부딪힌다. 그래도 최대한 참고 아이에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아무리 아이라도 최소한 지켜야 할 기준이 있다.

첫째, 잠은 제시간에 제자리에서. 
둘째, 밥은 식탁에서 스스로 먹기.

이것이 내가 아이에게 바라는 최소한 규칙이다. 잠과 밥. 나는 너무 기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는 100일 전에 통잠을 자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보다 빠른 잠자리 습관이 든 거 같아 기특하고 고마웠다. 그렇지만 그게 쭉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요즘에는 아이를 재우는 게 신생아 때만큼 힘이 들 때도 있다. 내일모레면 두 돌인데 잠자기 싫어서 놀아달라고 떼쓰고, 옛날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한 시간 반 동안 이야기를 해 준 적도 있다. 한 번은 아이가 엄마 베개에 누워 자겠다고 우기는 바람에 그만 버럭하고 말았다. "네 자리에 가서 자야지!" 아이는 금세 울음을 터트렸고 아내는 '애가 그럴 수 있지 않냐'며 아이를 감싸고 달랬다. 나는 그 자리에 계속 있다간 화살이 아내에게 튈 것 같아 방 문을 열고 나와버렸다.

혼자서 잘 자던 아이가 이렇게 잠투정을 부릴 때, 숟가락질을 잘하다가도 천진난만하게 손으로 밥을 먹을 때, 침대에서 뛰면 다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면서 계속 침대에서 뛰는 걸 볼 때… 그럴 땐 다치든 말든 그냥 내버려 두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게라도 아이가 깨달을 수 있다면 말이다. 이렇듯 내가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아이가 따라와 주지 않을 때 나는 참을 수가 없다.

'내 성격이 안 좋은 건가? 아니면 아이한테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건가?'

집 밖으로 무작정 나와서 노래라도 들으면 좀 진정이 될까 싶어서 차분한 노래를 한 곡 들었다. 바로 조성모의 <가시나무>였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의 편한 곳 없네.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예전에 들을 때는 이 노래가 사랑 노래인 줄로만 알았는데 다시 들으니 육아를 하고 있는 내 얘기 같았다. 내 속엔 내 경험과 기준이 너무도 많아서 아이를 있는 그대로 안아줄 수가 없고, 내가 당연하게 여긴 기준들을 아이에게 기대하는 게 어쩌면 헛된 바람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아이가 울면서 안겨오면 먼저 마음을 보듬어 주기보다 잘못한 것을 먼저 일러주었다. "다음번에는 그러지 마"라고 하고 아이가 "응"이라고 대답하면 그때서야 안아 주었다. 그런 내 모습을 돌이켜 보니 그게 아이에게 가시가 되진 않았을까…?

나는 여태까지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탑을 쌓는 일이라 생각했다. 통잠을 자고, 젖을 떼고, 스스로 밥을 먹고, 스스로 걷고…그렇게 한 단계, 한 단계 씩 사람의 능력을 쌓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이의 성장은 그렇게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한 단계를 쌓았다고 해서 바로 그다음 단계를 쌓는 것이 아니라 때론 멈출 때도 있고 때론 두세 단계가 무너질 때도 있었다. 아이는 탑을 쌓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면서 자기의 모양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가 탑을 높이 쌓도록 끌어주는 것만이 부모의 역할로 생각했던 것 같다. 탑이 무너질 때도, 탑을 쌓지 않을 때도 아이를 지켜봐 주고 응원해 주는 것까지 부모의 역할이었다.

돌이켜 보니 목표 지향적이었던 나는 탑 쌓는 과정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가정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위로만,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성장이라 여겼다. 그러나 나는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거나 목표가 사라지면 깊은 무기력에 빠지곤 했다. 결국 내게 탑 쌓기는 발전인 동시에 나를 채찍질하는 고통의 과정이기도 했다. 나의 이런 방식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진 않다.

지금까지는 아이와 블럭 쌓기 놀이를 할 때 탑이 무너져서 우는 아이에게 "이렇게 쌓았어야지. 조심하지 그랬어."라고 했다면 앞으로는 "괜찮아. 무너질 수도 있지. 우리 딸이 속상했구나. 그럼 잠깐 쉬었다 할까?"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힘들 때, 무너질 때 듣고 싶었던 위로의 말을 이제는 아이에게 해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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