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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무' …오대양 사건의 전말…교주 박순자와 신도 31명, 스스로 죽음 택한 이유는?

'꼬꼬무' …오대양 사건의 전말…교주 박순자와 신도 31명, 스스로 죽음 택한 이유는?
박순자와 31명은 왜 스스로 죽음을 택했나

26일에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이하 '꼬꼬무')에서는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을 조명했다.

이날 방송에서 장도연, 장성규, 장항준 세 이야기꾼들은 각각 이현이, 손준호, 김진수를 이야기 친구로 맞아 1987년 무더웠던 여름 대전에서 있었던 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1987년 8월의 대전, 당시 사건을 떠올리면 지금도 무섭다며 본명을 밝히지 말아달라 간청한 윤 기자는 사스마와리(사스마와리란, 경찰서를 가리치는 일본어 사츠와 돈다는 뜻의 일본어 마와리가 합쳐지며 사건 취재를 도는 것을 뜻하는 은어로 주로 병원 응급실, 장례식장, 경찰서를 돌며 취재를 했다)를 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날 마지막 코스 대전 서부경찰서에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중년 부부 폭행사건의 가해자로 조사를 받고 있는 이들을 마주하게 된 것. 이에 윤 기자는 "뭔가 의지가 없는 눈빛으로 무언가에 조종당하고 있는 것 같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 사건으로 조사를 받고 있던 이들은 총 13명으로 모두 같은 회사 직원들이었다. 이들은 며칠 전 중년 부부를 회사 창고에 감금 후 12시간 동안 집단폭행을 하며 채권포기각서를 쓰라고 종용했던 것. 그리고 이처럼 조폭들이나 할 것 같은 행동을 한 이들은 모두 평범해 보이는 20, 30대 젊은이들이었다.

감금 폭행을 당한 중년 부부는 대전에서 여러 개의 주유소를 운영 중인 유지였고 슬하에 자식 7명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이 자식들 7명은 모두 같은 회사 직원이었고, 이들은 중년 부부를 폭행한 이들과 같은 회사 소속이었다.

민속 공예품을 만드는 회사이자 88올림픽 공식 지정업체로 선정되기도 한 회사에 가장 먼저 취업한 것은 큰 딸. 큰 딸은 곧바로 사장님의 비서가 되었고 이어 형제들을 추천해 모두 같은 회사 직원이 되었다.

대전에 본사와 공장, 그리고 용인에도 공장을 둔 이 회사는 사회사업에도 적극적이었다.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한 보육시설, 초중고 학사 운영, 직원들 위한 기숙사 지원, 최고급 생필품 지원 등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꿈같은 회사였다. 그리고 이 회사의 사장은 대전에서 칭송받는 여성 사업가 박순자였다.

박순자는 고위 공무원인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식 셋을 낳았고, 자식 셋도 모두 자신의 회사 직원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대전에서 높은 신뢰도를 자랑했다. 폭행을 당한 중년 부부도 박순자와 그의 가족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

이에 중년 부부는 박순자에게 당시 5억 원의 사업 자금을 빌려줬다. 이는 당시 대전 시내의 18평짜리 아파트 38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돈이 쓸 데가 있어 변제를 요구했으나 이에 큰딸이 반발했다. 일부라도 돌려달라고 하자 큰딸은 사장님에게 직접 이야기하라고 했고, 이에 중년 부부는 박순자를 직접 만나러 대전 본사를 찾았다.

중년 부부가 본사의 문을 여는 순간 직원들이 몰려나와 부부를 둘러싸고, 몇몇이 정문을 걸어 잠그며 부부를 압박했다. 이들은 부부를 곧바로 창고에 가뒀고 폭행을 시작하며 채권포기각서에 사인할 것을 종용했다. 그리고 이 폭행이 일어나는 자리에는 중년 부부의 큰딸과 사위도 함께하고 있어 충격을 더했다.

결국 채권포기각서에 지장을 찍고 풀려난 중년 부부는 곧바로 경찰에 이들을 신고했다. 이에 사장인 박순자도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당시에 박순자의 조사 당시 카메라를 든 취재진이 몰려왔고 폭행사건 사주에 대해 추궁하자 박순자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여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이에 박순자의 남편도 놀라 아내를 찾았다.

얼마 후 안정된 아내를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 남편, 그런데 이때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박순자가 자식 셋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 이에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찾기 시작했지만 어디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회사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모두 박순자에게 돈을 빌려준 채권자였다. 이틀 만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왔고 이들이 빌려준 액수는 총 80억, 지금의 돈으로 환산하면 260억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당시 박순자는 독특한 방식으로 돈을 빌렸다. 첫 번째 조건은 이윤을 남기지 않고 투자자들에게 모두 돌려주겠다는 것. 그리고 이자와 관련해서는 이자 지급은 반드시 은행 계좌를 이용하고 이자 지급 일자는 단 1시간도 어기지 않으며 이렇게 투자자들에게 돌려주는 이자율은 30~40%의 고이익이었다. 그리고 박순자는 이 원칙을 3년 동안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 이에 그에게 돈을 빌려주겠다는 사람들이 줄을 지었고, 박순자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 자체가 백이 있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사실 박순자는 대전의 천사가 아닌 대전의 큰손이었던 것.

사건이 심상찮음을 느낀 윤 기자는 본격적으로 탐문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대전 공장에서 석연찮은 점을 발견했다. 공장에는 자개농 등 이 회사에서 제조하는 제품들이 존재했지만 실제로 제품을 제조한 흔적은 어디에도 발견되지 않고 보여주기 식의 전시상품 같았다는 것. 이에 경찰도 이 사건을 단순 폭행사건이 아닌 대형 사기사건으로 전환하고 박순자를 지명수배했다.

그리고 이때 박순자뿐만 아니라 이 회사의 모든 직원들이 사라졌다. 특히 직원뿐 아니라 보육시설의 아이들까지 모두 80여 명이 한날한시에 사라져 버린 것. 이에 경찰은 수색에 나섰다. 특히 용인 공장을 샅샅이 뒤졌지만 어떤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박 씨의 남편도 아내와 자식을 찾기 위해 용인 공장을 찾아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는 장 씨 아줌마를 추궁했다. 그러나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것도 모른다며 묵묵부답하는 장 씨. 그런데 이때 박 씨의 남편은 용인 공장에서 대전 공장의 차 한 대를 발견하고 다시 장 씨를 추궁했다. 그러나 장 씨는 여전히 입을 닫았다.

8월 28일. 모두가 사라진 나흘째 되던 날, 경찰서로 한 통의 제보 전화가 왔다. 사라진 사람들이 모두 용인 공장에 있다는 것. 그리고 제보자는 끈질긴 추궁에도 자신의 정체는 알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용인으로 다시 출동한 경찰들. 앞서 수색 때와 별다른 것이 없는 현장, 그러나 이때 창고 안을 둘러보던 경찰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렸던 것. 그리고 이 소리가 들린 곳은 창고 안쪽이었다. 창고 안쪽은 박스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채워져 있었는데 경찰은 귀를 바짝 대고 다시 소리를 들어보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에 경찰은 상자 너머를 확인했다. 그런데 그곳에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는 49명의 사람들을 발견한 것. 좁디좁은 공간에서 아이부터 어른까지 49명의 인원이 3박 4일 동안 수색을 피해 숨어 있었던 것.

그러나 나머지 32명은 여전히 찾을 수 없었다. 이에 경찰은 49명을 상대로 조사를 시작했지만 이들은 모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경찰은 발견되지 않은 사람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이들이 투자 유치를 많이 한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한 상자 뒤에 숨어있던 이들은 상대적으로 채무가 적은 이들이었다. 사실 이 회사의 직원들의 주 업무는 돈을 빌리는 것으로 직원들 모두가 채무자였다.

박 씨의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찾기 위해 다시 용인 공장으로 와서 장 씨를 추궁했다. 8월 28일 밤부터 29일 아침까지 장 씨를 추궁했던 박 씨의 남편, 그러나 어떤 답도 얻지 못했다.

그런데 몇 시간 후인 29일 낮 1시 장 씨가 박 씨의 남편을 찾아와 "공장에 찾으시는 분들이 있어요. 공장장이 있는데 위에 있는데 이상해요"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박 씨의 남편은 장 씨와 함께 공장을 다시 방문했고 장 씨가 가리키는 휴게실 천장의 구멍을 주시했다.

장 씨는 그 안을 들여다보면 찾는 사람들이 있다고 했다. 이에 박 씨 남편은 고무통을 받치고 올라가 겨우 머리만 내밀고 내부를 확인했다. 그러나 암흑 상태, 이에 그는 손전등을 켜고 다시 위를 확인했고 그 순간 속옷 차림의 한 남성이 서까래에 목을 매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남성은 바로 이 회사의 공장장 최 씨였다.

그리고 장 씨는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천장에 있다고 했다. 이에 박 씨 남편은 다시 천장 위를 확인했지만 어떤 인기척도 찾을 수 없었다. 박 씨 남편은 사람들과 경찰을 불러 모았고 천장을 뜯고 본격적인 수색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천장 위를 확인한 이들은 누구도 말을 못 하고 얼어붙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기괴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진 것. 목을 매고 있는 공장장 옆에는 겹겹이 포개져 사망한 12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5m 떨어진 곳에 19명의 시신이 쌓여있었고, 그 안에 박순자와 그의 자식 셋도 포함된 상태였다. 사라졌던 32명이 천장에서 모두 사망한 채로 발견된 것.

방송은 당시 끔찍했던 사건현장을 모형으로 복원해 공개했다. 그리고 이를 본 이야기꾼과 이야기 친구들은 충격에 할 말을 잃었다.

이들은 모두 어떻게 죽은 걸까? 천장 위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모두 속옷이나 잠옷 차림이었고 손과 발은 결박된 상태였다. 또한 입과 코는 휴지로 막혀있고 몇몇은 목에 빨간 줄이 그어진 채로 발견되었다. 31명은 교살당했고 1명은 자살한 것.

이에 몇 가지 가설이 제기되었다. 첫 번째 가설은 공장장이 혼자 31명을 살해한 후 자살을 한 것. 그러나 혼자서 31명을 죽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렇다면 독극물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으나 부검 결과 시신 내에서 독극물은 발견되지 않았고 입과 코를 막은 휴지에서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사망 추정 시간은 29일 새벽 1시부터 아침으로 박 씨의 남편이 장 씨를 추궁하던 시간인데 그가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것으로 제1가설은 무리라는 판단이 나왔다.

두 번째 가설은 제3자 타살설. 제3자가 외부에서 모두 살해한 후 공장에 옮겨두고 공장장이 자살한 것으로 위장했다는 것인데 당시 언론은 이를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도 석연찮은 점은 존재했다. 휴게실에 있던 작은 구멍 그 안으로 32명을 옮기는 것이 가능한가 하는 것. 그리고 이때 샤워실 위 천장이 뜯어져 있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지문 감식 결과 천장 위까지 닿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의 지문과 장문이 발견되어 충격을 안겼다.

특히 천장 바닥은 석고보드로 만들어져 외부에서 시신을 옮기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었다. 과거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진행한 실험에서도 이 가설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 32명의 시신 중 단 한 구도 저항의 흔적이 없다는 기이한 점이 포착되었다. 32명 모두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 것. 이에 제3가설이 등장한다. 이들 모두 자신의 죽음을 아무 저항 없이 온전히 받아들였다, 바로 자의에 의한 타살.

당시 경찰은 시신 발견 2, 3일 후 현장에서 찢어긴 쪽지 67조각을 발견했다. 이 종이들을 모두 모아 보니 "절대로 입 닫아라. 이미 의식이 없으시다. 네 시간 전부터 다섯 명 정도 갔다. 오늘 중으로 거의 갈 것 같다. 처음부터 계획하고 온 거다. 성령 인도로 너만 버텨라"라는 누군가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바로 주방 아줌마 장 씨를 향한 것이었다. 이에 경찰은 장 씨를 다시 추궁했고 진술이 시작되었다. 장 씨는 "박순자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 회사 직원들은 모두 신도였다. 이 회사는 회사가 아닌 종교단체다"라고 했던 것. 그리고 이 회사는 바로 오대양 집단변사사건의 오대양이었다.

오대양이란 오대양 육대주의 오대양을 뜻하는 것으로 박순자는 "다섯 개의 바다를 내가 주관하게 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다섯 번 죽다 살았다. 머지않아 전 세계를 주관할 것이니 오대양을 주관하는 하느님인 나를 따르라"라고 했던 것.

기도만으로 한 달 만에 암 완치 판정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박순자는 이후 종교에 심취했고 여러 종교를 전전하다 스스로 종교를 창시했다. 그리고 신도 유치를 위해 사회사업가로 위장해 복지사업까지 했던 것.

믿음과 신뢰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박순자는 신뢰가 쌓이면 돈을 빌리기 시작했고, 더 확실한 신뢰가 쌓이면 오대양에서 함께 살자는 제안을 해왔다. 이에 채권자 상당수가 오대양 직원이자 신도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88년 말세론을 믿었던 오대양, 박순자는 구원받으려면 무조건 교주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고 했다. 또한 집단생활로 생활을 통제하고 세뇌시켰다. 그리고 금욕생활을 강조하며 부부간의 교류와 공감을 차단했다. 또 교주의 지시를 어기면 매 타작을 했는데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신도들끼리 서로를 때리게 했다.

철옹성 같았던 박순자의 오대양은 중년 부부 폭행사건으로 흔들리기 시작했고, 박순자는 자식들과 용인 공장으로 도주한 후 신도들도 모두 그곳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박순자는 천장에 은신하자고 제안했고, 좁은 공간 때문에 스스로 천장에 올라갈 인원을 추렸다. 자신의 자식과 열성적인 신도들만이 천장으로 올라갔고 나머지 신도들에게는 "너희는 아직 믿음이 부족하지 위로 올라갈 수 없다"라며 박스 뒤에 숨으라 지시했다.

박순자에게 선택되지 않아 생존하게 된 생존자들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당시 같이 못 올라가고 같이 생활 못한 게 너무 서운하고 부럽고 버림받은 느낌이었다"라며 믿음이 얼마나 굳건했는지 설명했다.

샤워실에서 발견되었던 수많은 손자국은 박순자와 그에게 선택받은 31명이 스스로 천장 위로 올라가면서 만들어낸 자국들이었다. 이들은 천장에 올라가자마자 자신들이 올라간 흔적을 은폐했고, 추락에 대비해 시멘트 통로에 각목을 놓고 합판을 깔아 세 군데의 은신처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은신처는 총 5평의 공간, 이 곳에서 32명이 4박 5일을 지냈던 것.

당시 이들은 대소변을 참기 위해 금식했고, 제일 더울 때 70도까지 올라가는 더위가 가장 버티기 힘든 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발견 당시 속옷 차림이나 잠옷 차림이었던 것. 그리고 거의 탈진 상태에서 죽임을 당하니 저항을 하고 싶어도 저항을 할 수 없었고, 저항할 마음도 없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교주가 가장 먼저 사망하자 신도들은 교주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혹자들은 고액의 채무로 자포자기한 심정이기도 했던 것. 이렇게 32명의 자의에 의한 타살, 집단 자·타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장항준과 김진수는 "믿음과 신뢰로 나쁜 짓을 행한 박사장은 악마다. 자기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런 식의 행동을 하다니 너무 화가 나고 슬프다"라고 했다.

또한 사이비 종교에서 나온 이들에게 가장 힘든 순간인 내 믿음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을 겪은 이들의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지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장성규는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나도 저들처럼 그랬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항상 깨어있어야겠다 싶더라"라며 "그러나 내가 늘 깨어있을 수 있을까. 그럼에도 늘 깨어있어야지 다짐하게 된다"라며 소감을 전했다.

한편 이날 1 시즌을 마무리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는 2021년 새로운 이야기와 함께 시즌2로 찾아올 것을 예고해 기대감을 높였다.

(SBS 연예뉴스 김효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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