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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119 대원도 현장이 두렵다…그래도 힘이 되는 건

시골소방관 심바씨 | 마음은 UN, 현실은 집나간 가축 포획 전문 구조대원

쉬는 날 오전 소방서에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잠결에 혹시 비상인가 하고 헐레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예. 여보세요. 무슨 일 있는가요?"

"그게 아니고요 반장님. 이상철이란 분한테 전화가 와서 찾으시더라고요. 번호 알려드릴게요."

내가 알고 있는 이상철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아프리카 우간다에 계신 선교사님 한 분인데,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아직 잠이 덜 깼나 싶어 생수로 몇 번 입안을 헹구며 천장에 생각을 떠올려봐도 마땅한 퍼즐 조각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보이스피싱일 수도 있으니 절대 돈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고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10년이 지났지만 반가운 목소리에 대번 선교사님임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남원에 있다는 사실을 페이스북으로 접하곤 순천에 오는 길에 연락을 해봤단다.

저 구름 같은 망고나무, 그 밑에서 수업을 들었다.

2009년 여름 아프리카 우간다로 가는 비행기에 나는 몸을 실었다. 20살 때 교회에서 해외 단기선교를 한번 다녀온 것 빼고 홀로 외국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미지의 나라 아프리카. 4년간 특전사에서 복무를 마치고 느지막하게 대학에 복학을 해서 유학생이란 게 한번 되어보고 싶었다. ABC도 국가에 반납하고 나온 늦깎이 복학생을 두고 주위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학에 입학시키는 양 근심 섞인 응원을 해줬다. 26시간, 비행기 3번을 갈아타는 동안 "사과주스로 주세요" 이 한마디를 영어로 하지 못해 콜라만 얻어 마시고 내렸으니, 이 광경을 지켜본 하나님도 진심 고구마 100개는 까먹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우간다 엔테베공항에서 8시간 차를 타고 도착한 쿠미(KUMI)엔 선교사님과 동네 꼬맹이들, 커피콩 같은 똥을 뽕뽕 흘리며 염소까지 따라 나와 나를 반겼다. 내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선교사님의 사모님은 김밥과 라면이 올라간 진수성찬으로 나를 대접해 주셨다. 사실 그때만 해도 단무지 없는 김밥을 물컹물컹 씹어 먹으며 이게 얼마나 감사한 음식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벽돌집 기숙사로 옮겨지기 전 까진 말이다.

도착 다음날부터 나는 우간다 학생들이 빼곡하게 모여 사는 기숙사로 옮겨져 생활을 하게 되었다. 라디오 덕후로 사춘기를 보내며 감흥이란 걸 잊고 살아온 나에게 그곳의 생활은 하루하루 탄성이 나오는 '서프라이즈'한 날들로 꾸며졌다. 일단 전기가 없다. 아니 있는데, 우기 때 폭우로 전봇대가 쓰러져 그날로 그 지역의 전기가 끊겼다. 간신히 전기가 들어온 날, 친구의 커피포트를 생각 없이 콘센트에 꽂았다가 과전류로 기숙사 전체 전기가 나갔다. 내덕에 다들 일찍 잤다. 다행히 공항에서 오는 길에 샀던 기름 호롱불이 있어 나의 밤을 밝혀줬다.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다가 코브라도 만나고 자다가 흰개미 떼의 습격도 당하고 별별 일들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힘들었던 건 사실 먹는 문제였다.
마법 같은 '뽀쇼'

학교에서 주는 음식은 마법 같았다. 옥수숫가루를 끓는 물에 되직하게 삶아 떡처럼 만드는데 이걸 '뽀쇼'라고 부른다. 콩 수프를 뿌린 뽀쇼 한 덩이를 접시에 받아 들고 잔디밭에서 친구들과 뜯어먹는다. 그렇게 점심식사를 한 후 빵빵한 배를 안고 낮잠을 한숨 자면 정말 거짓말처럼 홀쭉해진 배로 일어났다. 내 위 속에 순간이동 포탈이 열린 듯 뽀쇼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화장실에 가서 출력을 해보아도 입력 대비 출력이 형편없는 것을 보면 뽀쇼 마법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늘 꼬르륵 소리를 달고 살았다.

내가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지고 그들과 삶을 나누고 배우려 한다 해도 먹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방황도 하게 되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럴 때마다 대학교의 부총장님이셨던 선교사님이 나를 불러 한국 음식을 해먹이시며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주셨던 기억이 있다.

부랴부랴 순천 어느 마을에 도착한 나를 선교사님은 주변 분들께 일일이 소개하셨다.

"이 친구가 나 예전에 대학교 있을 때 왔던 교환학생이고 지금은 저기 남원 소방관. 나 진짜 힘들었을 때 내 옆에 있어준 친구예요."

뜻밖의 소개말이었다. 우간다에서 대학교 재정 문제와 주변 협력직원들과의 관계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럴 때 나와 교환학생 2호기 해성이는 말없이 선교사님 댁에 머물며 말동무가 되어드린 게 전부였는데 선교사님은 그 시간이 있어 자신도 버틸 수 있었단다. 나에겐 큰 어른과 같은 분인데 겉치레 없이 그때 고마웠다며 담담하게 그때 심정을 풀어 말씀해주셨다. 우간다에서 선교사님과 나는 함께 밥 먹고 이야기했던 그 평범한 시간에 서로 위로를 얻고 힘을 내었던 것이다.

직업만 바뀌었지 지금도 사는 게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구조대원으로 예측할 수 없는 현장을 누비며 살다 보니 서프라이즈한 일들이 팡팡 터진다. 태어나서 뱀도 처음 잡아봤다. 호주에 있을 때 악어농장에서 일을 했었다고 "뱀 그까짓 것 악어에 팔다리 뺀 거 아니냐"며 큰소리쳤지만, 솔직히 엄청 징그럽고 무서웠다. 그러다 돼지도 잡고 소도 잡고 이제는 동물 구조 쪽으로 입지가 굳어져서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지만 초반엔 공포와 전율 그 자체였다.

119 구조대원이 혼자 나가는 현장은 없다. 늘 동료와 함께다. (사진=소방청 제공)

그때나 지금이나 가장 힘이 되는 건 동료다. 진짜 힘들었을 때 내 옆에 있어주는 사람. 우간다에서도, 남원에서도 동료가 힘이 되는 건 마찬가지다. 새벽에 교통사고 현장에 가서 머리에 피를 줄줄 흘리며 '악'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멍하니 앉아있는 사고자를 마주하면 마음이 심란하다. 앞 유리를 뚫고 튀어 나간 환자를 구급대원들이 열심히 가슴 압박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손이 덜덜 떨리기까지 한다. 여러 현장들을 겪으면서 무뎌지는 것뿐이지 삶과 죽음을 직면한 사람을 만나는 일은 심적으로 큰 스트레스다. 작업을 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서 함께 땀 흘린 동료와 먹는 컵라면 한 끼는 그 순간 보약 한 첩보다 더 약이 된다. 지금은 내 옆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코를 파고 있지만 어느 현장에서건 별일도 별일 아닌 듯 옆을 지켜주는 동료가 있어서 위로가 되었다.

우린 살면서 너무 당연하고 흔한 사람들을 주변에 두고 살아간다. 가족들, 친구들, 일터에 있는 동료들. 하지만 함께 있어줌에 대한 가치는 잘 모르고 살아가는 것 같다. 2살배기 조카도 우리 누나를 하도 빈번하게 마주치니까 내가 놀러 가면 가끔 오는 삼촌 옆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 봐야 네가 얻을 건 장난감뿐이다. 부디 밥과 집을 선택하길 바란다 조카야. 네 엄마 열 받았다. 우간다 망고 나무 아래에서 이걸 미리 깨달았다면 난 조금 덜 방황하고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때 쿠미도 참 겁나게 시골이었는데….

#인-잇 #인잇 #시골소방관심바씨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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