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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화면 속 얌전했던 그 개, 거품 물고 쓰러졌다

이학범 | 수의사. 수의학 전문 신문 『데일리벳』 창간

지난 6월 'TV 속 귀여운 동물들,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글에서 미국에서 실행되고 있는 '영화 촬영 시 동물의 안전한 사용 가이드라인'을 소개한 바 있다. 영화 엔딩 크레딧에 'No Animals Were Harmed®'라는 문구가 나오면, 그 영화가 AHA(American Humane Association)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촬영됐고, 촬영 과정에서 어떤 동물도 다치거나 해를 입지 않았다는 걸 뜻한다는 내용이었다. 반면 우리나라엔 이런 가이드라인이 없어서 각종 영화, 드라마, 심지어 동물이 출연하는 유튜브(펫튜브) 등에서 다양한 동물학대가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 [인-잇] TV 속 귀여운 동물들,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2020.06.27)

최근 우리나라 미디어 종사자(영화, 방송, 드라마, 유튜브, 광고 등)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촬영 시 동물의 스트레스가 높다"는 응답이 59%였고, 촬영현장에 전문 스태프가 없었다는 응답이 64%에 이르렀다. 또한, 촬영 시 사고로 동물이 죽거나 다친 적이 있다는 응답이 13%, 고의로 동물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것을 봤다는 응답도 8% 나왔다.
출처 : '촬영 현장 동물복지 실태조사', 동물권행동 카라, 2020년 6월 5일~28일. 미디어 종사자 157명 참여.

미디어 종사자들은 "새가 멀리 날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다리를 부러뜨렸다", "소의 부상을 표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상처를 냈다", "앉아있는 개의 모습을 찍기 위해 장시간 붙잡고 있었더니 개가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장면 묘사를 위해 거북이 등껍질을 벗겼다" 등 자신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소개했다.

전문적이지 않은 동물 촬영은 동물에도 해를 입히지만, 사람의 피해로도 이어져서 더 큰 문제다. 촬영 도중 동물이 사람(출연자 or 스태프)을 다치게 한 경우도 있었는데, 멧돼지가 출연자를 공격하고, 말한테 밟혀 제작진의 발이 부러지고, 투견 장면에서 사람이 물리는 등 사례도 다양했다.

귀엽고 신기한 동물의 영상이 관심을 받다 보니, 동물 관련 유튜브 채널이 빠르게 늘고 있는데, 일부 유튜브 채널의 경우 심각한 문제다. 상황을 억지로 연출하거나 동물의 습성에 반하는 실험을 하는 경우가 꽤 많다. 동물권행동 카라가 <동물의 권리를 위한 미디어 모니터링단>을 모집해 79개의 유튜브 계정 413개의 영상을 분석한 결과, 전체 20%인 83개의 영상이 '동물 학대' 영상으로 분류됐다. 반려동물에게 장애물이나 투명 벽 피하기와 같은 챌린지를 계속 강요하거나 야생동물을 습성과 전혀 상관없는 공간에 두거나 촬영을 목적으로 괴롭히는 등 '비정상적인 돌봄'이 가장 많았고, '신체적·물리적 폭력'을 가한 영상도 28개나 있었다. 이외에도 위협을 하거나 욕설 및 고성을 지르는 '언어적·정신적 폭력(16%, 23개)', 동물을 산 채로 먹거나 사체를 촬영하는 등의 '혐오스럽거나 자극적인 행위(15%, 21개)'도 있었다. 동물에게 성희롱 표현을 사용하는 영상도 6건(4%) 발견됐다.

카라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무료로 가이드라인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 최초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이 나와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가이드라인을 만든 동물단체 '카라'의 대표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제보자>, <리틀 포레스트> 등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이다. 영화감독이 만든 가이드라인이라 현실을 더 잘 반영하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가이드라인은 '영화 제작을 위해 어떤 동물도 죽거나 다치면 안 된다'는 일반 원칙과 '배우는 출연 동물에 따라 적합한 훈련을 받고, 가이드라인을 사전에 교육받아야 한다'는 프리프로덕션 단계, '촬영 1시간마다 충분한 급수와 휴식을 제공한다', '동물의 보호자가 현장에 있고, 상황에 따라 훈련사, 수의사가 있어야 한다', '촬영 시간은 이동 시간을 포함하여 1일 8시간을 넘지 않아야 한다', '사전에 현장 근처 동물병원의 위치를 파악한다'는 내용 등의 프로덕션 단계로 구분되어 있다. 또한 개, 고양이, 조류, 어류, 말, 축산동물, 파충류, 양서류, 영장류, 곤충 야생동물 등 동물의 종별로 세부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사극 촬영 시 많이 사용하는 '말'의 경우, 말 전문 훈련사를 고용하고, 마구간 등 말이 쉴 수 있는 장소를 촬영장에 미리 마련해야 한다. 이 가이드라인은 영화, 방송, 다큐멘터리, 1인 미디어 등 모든 영상물에 적용할 수 있다.

가이드라인이 생겼다고 한 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이드라인은 강제 조항이 아니므로, 미디어 관계자들이 스스로 미디어 동물학대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자발적으로 지키는 노력을 해야 한다. 또한, 실제 동물이 아닌 CG나 소품 사용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 먼저 고려하면 좋겠다. 특히, 동물의 싸움이나 잔인한 죽음을 묘사하는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구현해야만 한다.

우리의 역할도 중요하다. 시청자, 구독자들이 계속해서 '귀여운 동물이 나오는 것을 단순히 즐기기'만 한다면, 미디어 동물학대는 계속될 것이다. 영상 속 동물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댓글을 달고, 게시판에 글을 남기는 등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미디어 동물학대를 근본적으로 막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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