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희 졌지만 WTO 사무총장 선거 '안갯속'…장기 교착 가능성도

미국이 세계무역기구(WTO) 차기 사무총장으로 유명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을 지지한다고 공개 선언함에 따라 선거전이 안갯속에 빠졌습니다.

유 본부장은 WTO 회원국들의 최종 선호도 조사에서 나이지리아 응고지 오콘조이웨알라 후보에 예상보다 큰 표 차로 뒤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WTO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이 회원국 다수의 의사와 반대되는 의견을 표명한 만큼, 향후 회원국 간 컨센서스(의견일치) 과정에서도 상당한 진통이 예상됩니다.

WTO 선거전이 국제 역학 및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강대국 간 정치 게임으로 비화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합니다.

미국은 다수 회원국이 지지하는 오콘조이웨알라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유 본부장 지지를 공식 선언했습니다.

미국의 이런 행보는 WTO의 주도권을 뺏기지 않겠다는 의도로 해석됩니다.

27표를 보유한 유럽연합(EU)을 비롯해 일본, 아프리카 국가들은 오콘조이웨알라를 지지했습니다.

중국도 공식 의사를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오콘조이웨알라의 손을 들어준 것으로 전해집니다.

한 통상 전문가는 "미국 우선주의 노선을 고집하며 중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미국이 '친중' 후보를 견제하고 한국의 손을 들어준 것은 미국 입장에선 당연하다"고 해석했습니다.

미국은 WTO 개혁을 이행할 적임자로 아프리카 출신보다는 한국이 더 적임자라는 판단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28일(현지시간) 공식 성명에서 "WTO는 중대한 개혁이 매우 필요하다"며 유 본부장에 대해 지지를 표명했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지난 25일 자국 재외공관 일부에 주재국 정부가 유 본부장을 지지하는지 파악하라고 지시하는 전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만큼 유 본부장 당선에 대한 미국의 의지가 강하다는 뜻으로 해석됐습니다.

WTO는 모든 회원국의 컨센서스를 통해 사무총장을 추대합니다.

미국과 중국, EU 등 강대국의 반대가 있다면 합의 도출은 어렵습니다.

미국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오콘조이웨알라의 당선도 이론상 어렵다는 것입니다.

WTO 규정상 의견일치가 불가한 경우엔 예외적으로 투표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5년 WTO 역사상 사무총장을 투표로 뽑은 전례는 없습니다.

이번에도 투표까지 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한 전문가는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투표를 하겠다는 것은 WTO에서 사실상 미국을 배제하겠다는 의미"라고 해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선택할 카드는 많지 않습니다.

오콘조이웨알라 후보가 사무총장이 될 수 있도록 후보직을 사퇴하거나, 마지막 절차인 회원국 협의에서 역전을 노리며 시한인 11월 9일까지 버티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부 소식통은 "현재 정부가 WTO 결과 승복 여부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우리 정부는 현재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인 것으로 보입니다.

선거 결과에 승복하더라도 미국이 반대 입장을 철회하지 않으면 사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정부 소식통은 "성실한 국제사회 일원으로서 우리가 버티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한 의문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관건은 미국 의지에 달린 셈입니다.

미국이 한발 물러선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선거전이 시한을 훌쩍 넘겨 장기 교착상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국제사회는 WTO 상소기구가 미국의 반대로 기능이 정지된 것처럼 최악의 경우 WTO 사무총장 선거도 유사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합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압도적으로 오콘조이웨알라 후보를 지지하는 회원국들이 많은 상황에서 미국이 얼마만큼 의지를 갖고 회원국들을 설득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외교가에서는 "미국과 EU, 중국 등 강대국들이 어떻게 플레이를 할지가 남은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 대선도 변수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 트럼프 정부는 유 본부장에 대한 지지 입장을 표명했지만, 바이든 미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면 트럼프 정부와 차별화를 선언하며 대외 기조가 바뀔 수도 있습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