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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나훈아는 자유다

Max | 뭐라도 써야지. 방송사 짬밥 좀 먹은 저널리스트, 프로듀서.

세계 SF문학계의 나훈아 쯤은 될 아서 C.클라크가 불현듯 생각난 건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TV콘서트를 보면서였다. 지구촌 곳곳, 삼천리 방방곡곡 1000곳에 자리잡은 관객들이 온라인으로 연결된 모습은 장관이었다. 아서 C. 클라크는 이른바 '과학 3법칙'에서 말했다.
 
"충분히 발달된 기술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
나훈아 (사지=KBS 화면 캡쳐)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KBS2TV 방송화면 캡쳐.
화상회의 앱 줌(Zoom)으로 미팅하고 온라인으로 수업하는 비접촉 시대에 1000 군데 연결하는 게 뭐그리 대단한 기술이냐고 할 수 있지만 그걸 무대 미술로 구현해낸 장면은 충분히 매지컬했다. 글자 그대로 시공간을 뛰어넘는 연출. 아마 거기서 흘러나온 음악들이 EDM이 아닌 트로트여서 더 반전 매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난 달 초 나훈아의 새 앨범 '아홉 이야기'에 실린 노래 중 '테스형'을 듣고 감탄해 노래 일부를 인스타그램에 올린 적이 있다. 설명 글에 이렇게 썼다.
 
"짜친 것도 당당하게. 우습지만 진지하게."
#테스형 #나훈아 #새앨범 #thisisswag

 
소크라테스를 "테스형"이라 부르는 기백있는 창의성을 보여준 '훈아형'은 80년대의 강물에 푹 담갔다가 막 건져낸 것 같은 시공간 초월의 뮤직비디오도 시전했다. 가사에서 제비꽃이 나오면 화면에 제비꽃이 나왔고 들국화를 노래할 땐 들국화 영상이 편집됐다. 본인이 폼잡고 멋지게 나온 사진도 다수 삽입됐다. 흔한 노래방 배경화면을 방불케 한 '테스형' 뮤직비디오는 나훈아의 자신감이라는 말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다른 이가 이렇게 만들었다면 아마 '무성의', '무감각', '꼰대'라는 말이나 들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다가 한바탕 턱 빠지게 웃는다 / 그리고는 아픔을 그 웃음에 묻는다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두렵다
아! 테스형 세상이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사랑은 또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형

-나훈아 '테스형' 中-


뮤직비디오처럼 그의 가사는 쉽다. 쉬우면서 정곡을 찌른다. 단순하지만 단단한 단어를 쓴다. 가장 어려운 경지다. 다음 가사들을 보자


▶ 나훈아 - 테스형 MV 보러가기

나훈아
(갈무리)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 도대체 왜 이런지 몰라
꼬집어 말할 순 없어도 / 서러운 마음 나도 몰라
잊어야 하는 줄은 알아 / 이제는 남인 줄도 알아
알면서 왜 이런지 몰라 / 두 눈에 눈물 고였잖아
이러는 내가 정말 싫어 / 이러는 내가 정말 미워
이제는 정말 잊어야지 / 오늘도 사랑 갈무리

(잡초)
아무도 찾지않는 바람부는 언덕에 / 이름모를 잡초야

한송이 꽃이라면 향기라도 있을텐데 / 이것저것 아무것도 없는 잡초라네
발이라도 있으면은 님 찾아갈텐데 / 손이라도 있으면은 님 부를텐데
이것저것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 아무것도 가진 게 없네

(무시로)
이미 와버린 이별인데 슬퍼도 울지 말아요 / 이미 때늦은 이별인데 미련은 두지 말아요
눈물을 감추어요 눈물을 아껴요 / 이별보다 더 아픈게 외로움인데
무시로 무시로 그리울 때 그 때 울어요

다 나훈아가 쓰고 노래한 곡들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중음악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국문학자 장유정 단국대 교수는 트로트 가수 중 최고의 남자 작사가로 나훈아를 꼽았다.
 

"나훈아는 사람들이 생각지 못하는 걸 노랫말로 써요. 잡초, 땡벌, 홍시···. '무시로'의 뜻이 '시시때때로, 수시로'인 거 아셨어요? '수시로, 수시로'라고 불렀으면 재미없었을 텐데 무시로라고 하니까 너무 멋있는 거죠. 일상에서 뽑아내는 감수성이 어마어마해요."  

-9월8일 자 조선일보-


얼핏 들으면 저잣거리에서 막 뽑아내는 것 같아도 결코 막나가는 품위 없는 가사도 아니고 한번 들으면 딱 알아들을 수 있게 직관적이다. 그러면서도 꼭 들어맞는 비유법을 아끼지 않는다. 부사와 동사는 강력하고 무엇보다 뭔가 설명하기 쉽지 않아 입가를 맴도는 인생의 단면을 쉬운 말로 풀어 말문을 트이게 하는 느낌이다.

2020년 추석은 나훈아의 추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난리였다. 온라인 세상 특유의 호들갑 느낌이 없진 않지만, 오랜만에 지상파TV가 국민통합이라는 '올드한' 기능을 제대로 보여준 이벤트였다. 아직 이 정도로 시민들을 (부정적인 '바이럴'과 '버즈'로서가 아니라) 통합해낼 수 있는 미디어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새삼스럽다. 연휴로 며칠 쉬었던 일간지들이 다시 신문을 내자마자 나훈아 온라인 콘서트 리뷰 기사를 올렸다. 출근해서 신문을 펼쳐보니 다시 마음에 잔상을 남기는 나훈아 '어록' 하나가 눈에 띈다.

'어떤 가수로 남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유행가는 말 그대로 흘러가는 노래이고 유행가 가수는 흘러가는 거지, 뭘로 남고 싶다는 것 자체가 웃기다'는 거였다. 주겠다는 훈장을 왜 안받았냐는 질문에는 자신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영혼이 자유로워야 하는데 훈장의 무게를 견딜 수 없다고 한 말과 일맥상통한다. 사소한 데 집착을 하다못해 집착하지 말자는데 집착하는 나같은 사람에게, 여름을 물리치고 시나브로 불어온 서늘한 가을 바람같은 말이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유행가 가수 나훈아의 다음 번 앨범에는 '조(르바)형'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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