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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무일푼 청춘에서 일궈낸 행복…'국민 경제교사'의 삶

박 승 前 한국은행 총재

[그사람] 무일푼 청춘에서 일궈낸 행복…'국민 경제교사'의 삶
1.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한 행동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동네방네 알리려는 생각도 없었다. 박 승은 지난달 전북 김제에 있는 자신의 모교인 백석초등학교에 10억 원을 기부했다. 지난 2011년에도 이 학교에 5억 원을 기부했다. 지난해에는 이리공고에 7억 원, 2013년 김대중 평화센터에 3억 원을 각각 기부했다.

한국은행 총재 시절에는 급여의 20% 정도를 어려운 이웃들과 고향 사람들과 나누어 왔고, 그가 나온 초등학교에는 도서관 운영비로 10년 전부터 매년 1천만 원씩 보냈다. 그의 지금까지 언행을 보면 알려지지 않은 선행도 많을 것이다.

돈만 기부한 게 아니다. 사후 안구 기증도 약속했다. 원래는 장기 기증을 하려고 했는데 나이가 들어 장기 기증은 어렵다는 말을 듣고 안구만 기증하게 됐다.

이 사람은 2남 3녀를 두었고 11명의 손주가 있다. 할아버지로서 이들과 노는 것이 제일 즐거운 일이라고 하는데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주들에게 얼마라도 남겨 주고 싶은 마음이 어찌 없을까. 자식들이 다 먹고살 만하다지만 그래도 마음에 걸리는 자식이 있을 것이다.

돈이 없어 학교 교문 앞에서 쫓겨났던 설움이 뼛속까지 박혀 있으니 돈에 포원이 진 사람일 텐데 그는 아낌없이 내놓고 있다. 살고 있는 집과 여생을 보낼 암만의 돈을 남기고 모두 정리했다.

박 승은 30년 전부터 재산을 자식들에게 남겨주지 않겠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해왔다. 방송에 나가서도 유산 물려주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고 신문과 잡지 기고에도 마치 못을 박듯 이 말을 반복했다. 1998년 8월 18일 한국일보에 기고한 시평 제목은 <재산 상속 하지말자>였다. 그로서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대개의 지식인의 삶이 그러하듯 이 사람 역시 말을 앞세우며 살아왔다. 행동이 말을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는 잘 안다. 말을 따라가기 어려워 아예 말문을 닫고 붓을 꺾은 사람들도 있고 말빚과 글빚에 빠져 평생 시달리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다.

자신의 말을 행동으로 증명하는 사람이 적은지라 이 사람의 선행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이 사람의 기부 소식을 듣고 새삼 이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글을 쓰며 살아왔는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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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의 평창동 자택 서재에 있는 색이 바랜 소파에 앉자마자 그에게 기부한 이유를 물었다.

"사회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나의 행복,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주어진 내 몫을 하는 것이지요. 개인이나 가족의 성취는 작은 행복이지만 사회와 공동체에 기여할 때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의 큰 기쁨을 위한 행동입니다"

박 승이 지난 2006년 한국은행 총재 재임 시절 공개한 재산은 45억 원이었다. 무일푼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평생 교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큰돈을 모은 셈이다. 재테크 방법을 물었는데 그리 상세하게 답하지는 않았다. 자본주의 신봉자이긴 하지만 선비이기도 한 인물이라 돈을 어떻게 벌었는지 굳이 소상히 밝히고 싶지는 않다는 태도였다. 다만 국채를 통해 상당히 재미를 봤다는 말을 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경제학을 선택한 사람답게 그는 재테크에 적극적이었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 돈 버는 것을 미덕으로 가르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고 그는 자본주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이윤의 추구는 미덕이었기에 그 역시 미덕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주변 사람들과 본인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사람은 주식 투자에 상당히 적극적이었고 주식 투자가 재산 형성에 크게 기여한 듯싶다. 회고록에도 보면 공직에 나갈 때마다 가지고 있던 주식을 정리했다는 말이 나온다. 2003년 공직자 재산 공개를 보면 한 해에 주식 투자 손실로 9억 원이 줄어들기도 했다. 주식 투자 규모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파트 청약을 한 적도 없고 단독주택 관리하기 어려워 일흔 넘어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까지 아파트에 살아 본 적도 없다. 부동산 투자 옆에는 간 적도 없다. 우리 사회의 공유재인 부동산 투기는 공동체의 이익, 후대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게 이 사람의 소신이다.

자식 농사를 잘 지은 편이다. 2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둘은 모두 대학과 연구기관에 있다.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는 편이라고 하는데 돈이라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더 갖고 싶은 거 아니던가. 자식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박 진 인터뷰/장남,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모두 당연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형편이 그리 넉넉하지 않은데 그런 말씀을 자주 하셔서 속으로 물려주실 재산도 없는 거 같은데 뭐 이렇게 말씀하시나 싶었지요."

3. 이 사람과 동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이 사람 역시 가난했다. 자신의 가난을 이기고 이 사회의 가난을 극복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경제학자가 되기를 꿈꿨다. 중학생 때 한국전쟁을 경험했다. 한창 예민한 시절에 경험한 전쟁은 이 사람 인생에서 이념의 무상함과 정치의 무서움을 가르쳐 줬다. 무고한 친구들이 죽었고 동네 형들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것을 봤다. 소름 끼치게 무서운 경험이었다. 나는 절대로 이념에 물들지 않겠다,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몇 차례에 걸쳐 정치권의 권유가 있었지만 한사코 거절한 것도 그때 정치의 비정함을 절감했기 때문이란다.

전북 김제 농촌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서울대 상대를 졸업하고 엘리트 중의 엘리트가 모이는 한국은행 조사부에 들어가고 그 뒤에 미국 유학을 다녀와 나이 마흔에 중앙대 교수가 되기까지 그의 행적은 급격한 출세의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오르는 모습 그대로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사진=연합뉴스)

1976년 중앙대 교수가 된 이후 그의 삶은 탄탄대로였다. 막힘없는 언변과 경제 지식으로 명성을 얻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그의 글이 거의 매달 주요 신문에 실렸다. 방송에도 수시로 출연하며 이름과 얼굴을 알렸다. 그가 쓴 회고록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말미에 그가 일간지와 잡지에 기고한 칼럼 리스트가 있다. 얼추 헤아려도 몇백 편이 넘는다.

이름이 알려지면서 학계, 관계, 기업 등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활동 폭을 넓혔다. 중앙대에서는 정경대학장과 대학원장을 맡았고, 학계에서는 한국경제학회 회장, 국제경제학회 회장의 감투를 썼다. 고시 출제위원, 금융통화위원, 전경련 자문위원,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조정위원장 등 그가 회고록에 직접 언급한 직함만 20개가 넘는다.

그렇다고 본업인 대학 교수 일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다. 강의실에 들어가면 '신들린 무당이 작두 타듯' 강의를 했다. 강의실에만 들어가면 말문이 막힌다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는 특유의 달변으로 학생들을 사로잡았다. 그에게 강의를 들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아도 이론과 관계에서 직접 겪은 경험을 섞은 그의 강의는 상당히 인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주로 경제발전론, 국제경제론, 경제원론을 강의했는데 강의 노트 하나로 몇 년을 버티는 교수는 아니었다. 1970년대부터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에게 강의 평가를 자청했다. 학생들의 평가를 들어야 자신이 교수로서 뭐가 부족하고 개선해야 할지 알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단다. 자신감이 묻어나는 말이다.

1976년부터 당시 정부 기관지 역할을 하던 서울신문의 경제 담당 객원논설위원으로 3년 동안 일했다. 많게는 일주일에 다섯 번 사설을 썼다. 통단 사설을 30분이면 써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이 때 생겼다. 그의 글발이 좋았던지 유력 신문사 사주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을 받기도 했단다. 엄혹한 유신독재 말기였는데 그는 정치와는 무관하게 오직 경제 논리로만 사설을 썼다고 했다. 정치와 경제가 그렇게 선연하게 금이 그어질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노태우 정부 출범 때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권력의 심장부를 경험했고, 건설부 장관으로 1기 신도시 건설사업을 진두지휘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자신의 첫 직장인 한국은행에 총재로 금의환향했다. 이 사람이 교수를 하고 장관을 하고 청와대 수석을 하고 한국은행 총재를 한 것, 진보 정권과 보수 정권에서 중용된 사연은 누구에게는 감동을 주는 성공담으로 보일 수도 있고, 누구에겐 처세에 능하고 자리를 탐하는 지식인의 행보로 읽힐 수 있다. 여기까지라면 한 지식인의 출세 스토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의 삶에 주목하는 것은 그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다. 자신의 성공 원인을 자신의 능력보다는 조직과 사회 시스템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성공한 사람들의 기록을 보면 본인 입을 통해서나 아니면 남의 입을 빌려서 자신이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했는지 강조하는 대목이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의 기록에는 그런 노력을 강조하는 대목을 찾기 힘들다.

이리공고를 졸업한 뒤 해군사관학교에 합격했지만, 경제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해사 진학을 포기했다. 혼자 1년 동안 독학해서 서울대 상대에 합격했다. 학원을 다닌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중풍으로 누워 계시고 어머니는 환갑을 넘긴 노인이었다. 3천 평 남짓한 농사일이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낮에는 농사짓고 밤에는 공부를 하는 말 그대로 주경야독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 밑에서 공부했다. 집에는 라디오도 없고 시계조차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대학 진학을 꿈꾸는 것 자체가 무리였는데 그는 그 일을 해냈다.

"쾌재! 이제 소원풀이 했다. 이제 온 세계가 내 것인 듯한 기분이다. 매일 저녁 정화수에 기도드린 어머님의 정성인가 싶었다. 가난에 찌든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성취를 이루어낸 나의 승리다. 이 어려움을 이기고 성취를 일궈낸 이 정신을 평생토록 지켜나가자" <서울대 상대 합격 후 쓴 일기 중>

뭔가 엄청난 노력, 극적인 이야기가 있을 법한 대목 아닌가. 그런데 이 시절을 기록한 그의 회고록은 너무 소략하다.

"나는 낮에는 열심히 일을 하고 밤에는 석유 등잔불을 켜놓고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한 해를 보냈다. 내가 직접 일을 하기 때문에 농사도 잘 되고 집안 형편도 나아져서 한 해 동안 쌀 다섯 가마가 저축되었다. 이것은 등록금 등 입학 수속 비용을 내는 데는 충분한 것이었다."

자신의 노력에 대한 회고를 생략한 것은 이때 만이 아니다. 1972년부터 2년 동안 미국 얼바니(Albany)에 있는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박 승은 2년 만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따고 돌아왔다. 이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그의 설명을 듣고 나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슨 재주로 2년 만에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을까. 그의 표현을 빌리면 바늘 하나로 바위에 구멍을 뚫는 일이었을 것인데 그 과정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5. 박 승의 인생은 한국 현대사와 연결 지어서 생각해보면 더 흥미롭게 읽힌다. 대학 4학년 때 4·19가 터졌다. 그 날 그가 무엇을 했는지 궁금했다. 박 승은 그날의 일을 어제 겪은 일인 양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 날 아침 종암동에 있는 서울 상대에 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고 스크럼의 맨 앞줄에서 그가 섰다는 것, 서대문 이기붕 집 앞에서 시위를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날의 기억이 선명했는데, 그 선명한 기억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은 아닌 듯하다. 그는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본 뒤에 곧바로 학교로 돌아가 한국은행 취직 시험 준비에 매진했다.

박정희 군사 정권과 그의 사회생활은 시작을 같이 한다. 그가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그는 그 시대의 일원이었다. 성취 지향, 실용 우선이라는 시대정신의 세례를 받았다. 초고속으로 성장한 경제만큼 그의 출세 속도 역시 빨랐다. 그 시대에 기여한 바가 있겠지만 그 시대로부터 받은 것도 많았다. 그때 가난에서 벗어나 부를 이뤘고 명예를 얻었고 권력을 누리기도 했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유보해야 한다는 것이 그 시대 다수의 논리였다. 박 승은 개인의 이익을 공동체의 이익보다 앞세우지 않았다고 했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이익을 희생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동체의 이익을 해치면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박 승의 이 생각은 논쟁이 될 만한 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쨌든 이 주장이 개발 경제 시대, 성취 지향의 시대정신과 무관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가 대학에 몸 담고 있는 동안 학원가는 독재정권에 항의하는 학생들의 시위로 잠시도 조용한 적이 없었다. 대학은 시대의 고뇌가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는 80년대 전두환 정권의 폭압적 통치에 반감과 분노를 느꼈고 제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애썼다지만 정치적 의사 표시는 하지 않았다. 교수들의 시국 성명에 이름을 올리지도 않았고 정치권과 가깝다는 말을 듣지도 않았다. 그가 고고하게 연구실에만 머물렀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을 고려하면 독재정권 시절 그의 정치적 침묵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사진=연합뉴스)

시대 상황과 관련해 그가 공식적으로 언급한 사건은 광주민주화항쟁이 유일하다. 광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지하신문을 보고 알았다. 그 참혹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알고 괴로워했고 북한산에 가서 울분을 달랬다. 그의 아들 박 진은 당시 박 승이 지식인으로서 무력감 때문에 고통스러워했고 박 승의 인생에서 가장 큰 좌절감을 맛본 시기라고 말했다. 그는 고통스러워했지만 거기에서 그쳤다. 앞장서 그 학살 행위에 항의하지도 않았고 이 비극적인 사실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려 하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 않거나 침묵을 강요받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부지런히 글을 썼다. 경제에 대해서 말이다. 광주의 피 냄새가 여전히 진동하던 1980년 6월에 일간지에 모두 세 편의 글을 썼다. 한국 경제의 활로(1980.6.2 동아일보), 경제 위기 극복할 수 있다(대담, 1980,6,14 동아일보), 산업구조 개편의 길(1980.6.17 서울신문)이 기록에 남아있는 그의 글이다. 아마도 그것이 우리 공동체에 기여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6. 노태우 정권 출범 후 그는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됐다. 노태우와는 일면식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정부에서 일하게 된 것을 전혀 뜻밖이라고 생각한 거 같지는 않다. 그는 그 전 전두환 정권하에서 금융통화위원 등 다양한 타이틀로 정책 수립과 집행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고 그런 일에 흥미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널리 이름이 알려진 경제학자로 한 번쯤은 그런 기회를 갖고 싶었을 것이다. 그 지명을 받았을 때 기뻤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고 그는 노태우를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노태우가 신군부의 핵심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정권에 참여하는 것을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정통성 시비는 극복할 수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대통령과 일면식도 없다는 것, 행정부 경험이 없다는 것은 그가 쉽게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이었다. 실세 수석이라는 말을 듣지는 못했다. 본인은 청와대 비서실이 내각을 장악하는 것이 바람직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게 평소의 지론이기도 했지만 내각을 장악하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던 듯하다. 경제수석으로 일한 지 열 달이 못돼 건설부 장관으로 옮겼다. 언론은 좌천성 영전이라고 표현했다.

건설부 장관으로 그의 최대 과제는 신도시 건설이었다. 주택 200만 채 공급이라는 대선 공약을 지키기 위해서는 분당과 일산을 비롯한 신도시 건설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지만 반발도 거셌다. 본업이 학자인 그에게 이 과업은 벅찬 일이었던 듯싶다. 국회에서, 언론에서 심지어는 정부 안에서도 그는 호된 비판을 들었고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후임 수석인 문희갑과 불화를 빚었고 대통령마저도 그를 외면했다. 그는 결국 7개월 만에 경질됐다. 신도시 사업의 기반을 모두 닦은 뒤라서 홀가분하게 장관직을 떠났다지만 명예로운 퇴진은 아니었다. 그의 공직생활은 영광보다는 상처가 컸다.

장관이라는 자리가 좋은 자리 같지만 사실은 외화내빈이란다. 7개월 동안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그는 개인 돈을 2천만 원 이상 썼다고 했다. 하루하루 쓴 일기에 기반한 내용일 테니 허튼소리는 아닐 것이다. 늘 시간에 쫓겼고 민원에 시달렸고 그러고도 칭찬받는 일보다 비난받는 일이 훨씬 더 많았다. 그렇다고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었으니 보람보다는 고통이 훨씬 더 컸다. 시간도 여유 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를 주는 교수라는 직업을 제대로 즐긴 것도 이때부터다. 더구나 그는 전직 수석에 장관직을 경험한 사람이었으니 그의 발언은 더 무게감을 갖기 시작했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여전히 그를 찾는 기관과 언론, 단체는 많았다.

6. 대학을 정년 퇴임한 직후 그는 김대중 정부의 두 번째 한국은행 총재로 임명됐다. 김대중과는 일면식도 없었다. 호남 출신에 대표적 논객이었던 그가 김대중이라는 정치인을 한국은행 총재 임명장을 받을 때 처음 독대했다는 것은 의외다. 그가 정치권과 거리를 두며 살아왔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진보 진영에서 그를 보수적 인사로 인식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박 승은 1970년대부터 김대중을 경륜 있는 정치인으로 존경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밖으로 표현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어쨌든 노태우 정부에서 고위직을 지낸 그가 진보 정권에서 다시 중용된 것은 그의 지역 연고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회고록에서 한국은행 총재 지명 소식을 들은 소감을 "나는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라고 표현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조직의 수장이 된 기쁨이 컸고 평소의 지론인 한은 독립성 강화, 화폐 개혁 등을 추진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도 기뻤을 것이다. 그는 한국은행 총재 시절을 자신의 황금기라고 말한다. 야심 차게 추진한 화폐 개혁은 실패했지만 한은 독립성 강화에 기여했고 직원들의 평가도 대체적으로 좋았다. 김대중 대통령 정부에서 1년, 노무현 정부에서 3년을 보내면서 그는 행복했다. 두 진보 대통령과의 관계도 매끄러웠다.

그의 재임 중 한국은행 직원들은 우연히 부근 식당에서 그를 만나면 밥값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늘 직원들의 밥값을 내주었는데 그때 박 승은 한국은행 직원들의 뒤꼭지만 봐도 예뻤단다. 그가 4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할 때 직원들이 감사패를 증정했다. 감사패 문구는 그가 듣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한국은행과 한국은행 직원을 가장 사랑한 총재님. 한국은행 독립성과 위상을 높이기 위해 가장 몸부림 친 총재님.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사심 없이 고뇌하신 총재님!"

그는 자신을 공직에 발탁해준 노태우, 김대중 두 대통령을 퇴임 후에 각별하게 대했다. 노태우 대통령이 건강할 때는 같이 운동을 하거나 부부 동반으로 만남을 가졌고 그가 수감되었을 때도 몇 차례 면회를 다녀오며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다. 김대중 대통령이 퇴임 한 이후 수시로 부부 동반 모임을 가졌다. 아태재단에도 이름을 올리고 적극적으로 행사에 참여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만나면 만날수록 고개가 숙여지는 사람,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위인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타계하고 아태재단이 운영비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때는 3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는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두 명의 대통령에게 정성을 다하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보고 어떻게 두 개의 하늘을 섬길 수 있느냐며 다소 뜨악한 눈길로 바라보기도 했지만 그는 자신을 알아봐주고 발탁해준 고마운 은인에 대한 마땅한 도리라고 생각한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사진=연합뉴스)

7. 그는 이명박 정부 때부터 수출주도성장의 한계를 지적하며 소득주도성장을 줄기 차게 역설했다. 이를 위한 최저임금 인상, 법인세 인상을 포함한 증세를 통한 복지 정책 확대, 부동산 보유세 강화가 그가 10년 넘게 주장해온 내용들이다. 기득권층이 그들의 기득권만을 고집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확고한 소신이다. 현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과 맞아 떨어지는 주장들이다. 이런 주장을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시기에 펴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재인 캠프의 자문위원장을 맡았던 것도 그의 이런 주장을 야당 시절 문재인과 그의 참모들이 귀 기울여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야당 시절 문재인 캠프 <국민성장>의 자문위원장을 맡았을 때 그의 모습은 그가 정치인의 자질을 어떻게 숨기며 살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출범식장에서 그의 목소리는 높았고 하이에나들이 죽은 코끼리 뜯어먹듯 한 기업을 뜯어먹었다는 표현은 학자의 표현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제1야당 유력 정치인 캠프의 좌장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다소 흥분했던가, 그는 정치의 영역으로 쑥 한 발을 내딛는 듯싶었는데 그 이상 나가지는 않았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정부에서도 그를 찾지는 않았다.

우리 나이로 올해 여든다섯 살인데 방송에 나와서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지금이라도 일을 맡기면 너끈히 해낼 것처럼 정정하다. 지금도 스스로 운전하고 다니고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그의 모든 인생의 기록이 저장된 평창동 자택 서재에서 그는 한 가지를 기자에게 보여주며 자랑했다. 두툼한 경제 관련 메모였다. 각종 수치가 빼곡히 적혀 있는 수십 쪽짜리 노트가 두 권이었다. 지금도 어디서 본 기록, 들은 이야기, 신문 기사, 한국은행 등 경제 기관 통계 등을 이런 식으로 적어 둔다.

현장을 떠난 지 15년이 된 그에게 아직도 지혜는 물론 해답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학자로서는 물론이고 경제평론가로, 정책 집행자로서 그의 경험과 현안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노력 덕분일 것이다. 그는 교수 시절 학생들에게 사안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갖추라고 강조했다. 그가 방송에 나와서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 그는 어려운 이야기도 쉽게 전달하는 능력이 있다. 마치 가정 교사에게 지도 받는 느낌이다. 이런 능력 때문이었을까, 청와대 수석 시절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혼자 듣기 아깝다며 박 승 수석의 경제 브리핑 자리에 장녀 노소영 씨를 불러 같이 듣도록 하였다.

경제와 관련된 그의 예측이나 전망이 늘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2009년 그는 여러 번 앞으로 10년 후면 집값이 폭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집을 팔려고 해도 팔 수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며 일본의 예와 주택 보급률 등을 언급하며 이렇게 예측했지만 그 예측은 현실과 어긋났다. 요즘 그는 10년 후면 집값이 폭락할 것이라고 말한다. 10년 후에 그의 말이 맞는지 두고 볼 일이다.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사진=연합뉴스)

8. 곳곳에서 이 사람을 찾는다. 그 역시 그 부름을 거절하지 않는다. 기부 사실이 알려진 뒤에는 그를 찾는 사람들이 더 늘었다. 국민 경제교사 같은 존재였는데 요즘에는 거기에 더해 국민 윤리교사 역할도 맡은 듯하다. 어떤 자격이든 이 사람은 초대를 받을 자격이 있고 초대받은 자리에서 당당하게 발언할 자격이 있다. 이 사람의 행동은 다른 사람의 귀감이 되기도 하지만 채찍이 되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 책임질 수 없는 말과 글을 앞세우며 사는 사람들, 끊임없이 빚을 지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에게 이 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로 회초리다.

이 사람은 다섯 명의 자녀 중 네 명을 청첩장을 내지 않고 출가시켰다. 한국에서 청첩장은 세금 고지서나 다름없다는 것,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폐 끼치는 일이 싫었단다.

"위로 둘을 남에게 알리지 않고 결혼시켰더니 친구며 지인들이 섭섭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셋째는 주변에 청첩장을 3-400장 찍어서 돌리고 부를 사람들은 부르고 그랬습니다. 손님도 많이 오고 성대하게 결혼식을 했어요. 축의금도 많이 들어왔는데 누구는 얼마 냈고 누구는 얼마 냈고를 기록하다 보니 이 거 정말 할 짓이 못 되는구나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밑으로 둘은 다시 가족들만 불러서 행사를 치렀습니다."

그는 2010년 <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라는 제목으로 회고록을 펴냈다. 이 회고록은 불완전하다. 아니, 엉성하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 같은 게 빠진 부분이 많고 보다 정교하고 상세한 기술이 필요한 부분이 통째로 생략되어 있는 듯하고 고백해야 될 순간에 그 고백을 꿀꺽 삼키는 듯한 장면도 있다. 회고록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털어 놓는 맛에 읽는 것인데 그의 회고록은 그런 미덕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다. 물론 몇 군데 고백이 있긴 하다. 예를 들어 자신이 가장 잘못한 판단으로 들고 있는 중앙대 총장 선거 출마 같은 대목 말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부분적인 고백으로 전체를 가리려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이런 모든 결함을 <어떤 고난과 아픔도, 병도 죽음도 감사히 맞겠다>라는 부제의 마지막 장이 덮어 준다. 감상적이면서도 감동적인 이 글에서 박 승은 이렇게 묻는다. 나는 우주의 질서에 합당하게 살아왔는가? 이 넓은 우주 속에서 나와 내 가족이라는 작은 존재의 이익을 위해 산다는 것, 그리고 영겁의 시간 속에서 순간의 이익을 좇아 산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고 묻는다. 억만금의 큰 재산도 이 큰 우주의 질서에 부합하게 벌고 쓰지 않으면 무의미한 것이며 이것은 권력이나 명예도 마찬가지라고 그는 적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후회한다. 남을 위해 산 시간이 너무 짧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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