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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32년간 절 노예, 수사는 왜 이 모양입니까

최정규 | '상식에 맞지 않는 법'과 싸우는 변호사 겸 활동가


예능 프로그램을 보다 보면 출연자들이 위험한 행동을 할 때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오는 걸 종종 볼 수 있다.
 
'함부로 따라 해서는 안 됩니다'

출연자들에게는 위험을 방지할 여러 안전장치가 제공되지만 시청자들의 경우 그런 예방책 없이 따라 하다 보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력 착취를 당한 피해 장애인을 지원하는 시민단체와 함께 최근 '검찰수사심의원회 소집신청서'를 관할 검찰청에 제출한 뒤 불현듯 이 말이 떠오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다.
 
'함부로 따라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일까?'

올 6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수사로 세상에 알려진 '검찰수사심의위원회'는 2018년 1월 2일 수사의 절차 및 결과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제고하기 위해 검찰 스스로 도입하여 실시하고 있는 제도이다. 검찰수사와 기소과정에 시민들이 개입하여 내리는 수사심의위원회의 결정은 표면적으론 '권고 효력'만 있으나 지금까지 검찰이 그 권고를 100% 받아들일 만큼 실효성 있는 제도이기도 하다.

우리가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소집을 요청한 사건은 지난해 7월 '사찰 노예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진 지적장애인 노동력 착취 사건이다. 피해 장애인이 서울 노원구에 위치한 사찰에서 32년 동안 폭행, 노동력 착취, 명의 도용을 당했다는 사실과 이미 경찰, 노동청, 검찰에서 수사가 진행되었지만 단지 12건의 폭행만 약식 기소된 사실을 뒤늦게 확인한 후 시민단체는 가해자인 주지스님을 다시 수사해 처벌해 달라는 고발장을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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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9년 7월 10일,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연구소)는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 노원구의 사찰에서 발생한 노동력 착취 및 학대사건에 대해 철저한 재수사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시 진행된 경찰 수사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승적도 없이 절에서 32년 동안 폭행과 폭언을 당하며 하루 13시간 노동을 한 것이 절에서 이루어지는 협동 관행인 '울력'이라 처벌할 수 없다며 경찰은 일부 명의 도용한 사실만 추가로 처벌할 수 있다는 의견으로 지난 1월 29일 검찰에 송치한 것이다.

검찰에서라도 철저히 수사해 줄 것을 기대했지만 담당 검사는 이 사건을 고발한 시민단체 및 피해자에게 단 한차례의 연락도 하지 않았다. 결국 5개월의 기다림에 지친 시민단체와 피해자는 절박한 심정으로 지난 7월 1일 이 사건에 대해 검찰 수사와 기소 과정에 시민들의 개입을 요청하는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소집신청서'를 제출한 것이다.

신청서 제출 후 관련 절차가 신속하게 진행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삼성 경영권 승계 의혹'사건은 9일 만에, '검언 유착 사건'에서는 5일 만에, '정의기역연대 회계부정사건'의 경우 단 2일 만에 관련 절차가 진행된 것과 달리 이 사건의 검찰수사심의원회 절차는 열흘이 지나도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지난 14일 서울북부지방검찰청에 부의심의위원회 소집날짜를 알려 달라고 요청하고, 17일에는 대검찰청에 관련 절차를 신속히 진행해 달라는 의견서까지 전달했다. 그러나 "아직 수사가 끝나지 않았으니 기다려 달라"고 하는 담당 검사의 입장만 반복 전달받았다. 앞서 언급한 사건들의 경우 수사 종결 여부와 상관없이 진행됐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대우다. 특정 사람들의 신청에는 신속하게 진행되는 절차가 우리 앞에선 멈춰 있는 상황, 이것을 과연 정당하다고 볼 수 있을까.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가 그 절차를 작동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까닭에 자조 섞인 질문만 던지게 된다.

우리는 함부로 따라 해서는 안 되었던 것일까?
특정 사람들이 이용하는 수사심의위원회이니만큼 구경만 했어야 하는 것일까?


필자는 이전 글을 통해 '검찰개혁이 성공한다고 해서 자신의 억울한 사연을 들고 찾아가는 시민들이 검찰청 민원실에서 환영받을 수 있을까?'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필자는 다시 이런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우린 그저 구경만 하고 함부로 따라 해서는 안 되는 제도를 만드는 것, 이게 바로 진정 개혁의 결과인가?'

새롭게 뜯어고칠 게 '제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도입해도 시민들을 향한 수사기관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가 낸 세금으로 운영되는 수사기관에서 그저 구경꾼 취급만 받을 수밖에 없다. 검찰개혁의 결과로 인해 좋은 서비스를 누리는 사람은, 특정 계층과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이어야만 한다. 새로운 제도 도입에 열을 올리는 만큼 그들의 태도를 뜯어고치는 일에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이유이다.

 
인잇 네임카드 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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