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인-잇] 배우 이범수 "따스한 봄, 마음 청소가 필요할 때"

'책 골라주는 배우' 이범수가 직접 고른 책 <청소 끝에 철학, 임성민 지음>

내가 국민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니, 아주 꼬꼬마 시절 기억이다. (당시에는 초등학교가 아닌 국민학교로 불리었다.) 아버지께선 하나뿐인 외동아들이라 버릇없이 자랐다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내게 참 엄하셨다. 그래서인지 내가 잘못을 저지를 때면 눈물을 쏙 빼도록 호되게 꾸짖으신 뒤 내방 책상 정리를 필두로 대청소까지 시키셨다. 어린 마음에 혼나는 것도 무섭고 서러운데, 그 어두운 터널을 힘겹게 지난 뒤, (의례 혼나고 나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무기력감과 나른함을 동반한 정신적, 신체적 무방비 상태인데) 또 대청소를 해야 한다는 건 정말이지 내겐 일종의 '이중과세' 같은 억울하고도 크나큰 고역이었다.

점점 삶에 진지해지는 나이가 되자, 문득 눈물콧물 짜며 청소를 하던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버지께선 왜 내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청소를 시키셨을까?'

나는 궁금했다. 세월이 흐르고 더 흘러 어느덧 당시 아버지 나이가 되어 당신의 뜻을 더듬더듬 헤아릴 수 있게 되니, 이젠 내 곁에 안 계신다. 대신 나는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가 더욱 그립다. 이제야 겨우 당신 뜻을 이해할 것 같은데 더 이상 곁에 없기에, 그리고 나 역시 똑같은 길을 고스란히 걷고 있기에, 당신이 일러 주신 삶의 의미가 깊고 그립다.

2년 전 어느 날, 가끔 들르던 서점에서 책을 고르던 중 인상 깊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청소 끝에 철학, 임성민 지음>. 짧은 순간이었지만 어릴적 아버지와의 추억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뭉클하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책을 집어 들었다.

쓸고 닦았더니 사유가 시작되었다. (청소 끝에 철학, 임성민 지음)

청소는 지저분하고 더러워진 것을 깨끗하게 치우고 정리하는 것. 어린 마음이라도 땀 흘리며 쓸고 나르고 닦는 노고 속에 새 마음이 생겨난다. 거창하게 반성이라고 칭하긴 낯부끄럽다 하더라도 시작할 땐 귀찮았지만 하다 보니 주변이 깨끗해지고 단정해져서 본인의 마음마저 새롭게 거듭나고자 하는 희망이 싹튼다. 청소가 다 끝나고 깨끗하게 달라진 주변을 보니 새로운 마음이 싹트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마음이 싹터 변하고자 하는 마음에 소매 걷어붙이고 청소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경우건 마음속으로 이미 변화는 시작된다.

그것을 내 스스로 느끼게끔 하고자 하셨던 아버지의 마음이 '청소'라는 벌에 담겼던 것은 아닐까. 나아가 발전한다는 것은 그에 못 미치는 후진 과거가 있기에 가능하듯, 깨닫는 것 또한 어리석은 과거가 있기에 존재한다. 삶에 있어 생활 청소와는 별도로 마음과 감정 청소 또한 꼭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고 뒤늦은 나이지만 깊이 느낀다.

무명시절, 영화 오디션에 떨어져 낙심한 채 친구와 거리를 이리저리 걷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마침 지인 일행을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누었다. 신호가 바뀌어 그 일행과 부랴부랴 헤어지고 길을 건너는데 친구가 내게 물었다.

"범수야, 방금 A도 있었는데 왜 인사 안 했어?"
"뭐? A가 있었다고?"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A는 대학시절 다른 과 친구였는데, 졸업한 뒤엔 서로 사회생활로 바빴던 터라 못 본 지 꽤 되었던 반가운 친구였다. 내 두 눈은 바로 앞에 있던 지인들을 향하고 있었지만, 오디션 탈락이라는 실의에 빠져 있어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내 목표만을 바라보고 달리던 나는 평범한 일상 속 소중한 순간순간들을 얼마나 놓치고 살았을까. 내 주변인들과의 관계에 있어 '봤지만 보지 못하고, 알지만 알지 못한 채' 범한 어리석음이 얼마나 숱하게 쌓여 있을지 돌이켜본다.

대학생 때 운전면허를 딴 이후로 줄곧 '장롱 면허'였다. 서른이 넘어 무명 배우가 되었고, 지방 촬영은 물론 심야 촬영도 혼자 가야했던 터라 10만 km나 뛴 중고차를 급히 사야했다. 한창 형편이 어려운 시절이라 도로주행 교육비도 어떻게든 줄여야 할 처지였기에 차가 있는 대학 후배에게 주행 연습을 며칠씩이나 부탁했다. 출근길로 꽉 막히기 전에 연습해야 했기에 후배는 이른 새벽부터 차를 끌고나와 매일 1시간씩 성심껏 나를 가르쳐줬다. 요긴한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그땐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따끈한 아침밥 한 번 사주지 못한 채 주머니 사정이 궁핍하다는 이유를 앞세워 "고마워" 한마디 말로만 그쳤고, 그런 채로 세월마저 흘려보냈다. 빈곤한 사정은 이해받았다 치더라도 바쁘다는 핑계까지 더해 지금껏 진심을 전할 때를 놓쳐버린 못난 선배였다.

단역으로 간간이 영화에 얼굴을 내밀던 당시, 얼마 안 되는 출연료는 내게 소중한 생계 수단이었다. '명필름'이라는 영화사는 이런 내게 출연 기회를 많이 주었다. 줄줄이 거절만 당하는 '뜨내기 배우'였던 나는 대학 선배가 영화사 대표라는 것만 믿고 '명필름'을 찾았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때라 내 사정을 알던 대학 선배는 물론 공동 대표인 사모는 흔쾌히 역할을 제안해 주었고, 이후에도 종종 기회를 주셨다. 평생 잊지 못할 고마움. 너무나 감사했으면서도 손꼽히는 영화사 타이틀 앞에 주눅이 팍 들어 고맙다는 속내 한번 반듯하게 전하질 못하고 서성이기만 한 내 과거가 죄송하고 후회스럽다. 변명처럼 여전히 고마운 마음을 시원히 표현하지 못한 채 마음의 빚으로 남겨 둔 융통성 없는 내 처세가 원망스럽다.

배우 이범수 인잇

한 번은 내가 주연으로 참여한 영화에 대학 동기들을 조, 단역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 학번은 나와 같지만 나이는 5살이 많은 형들이었기에 학창시절 내내 나를 동생처럼 챙겨주었고 나 역시 친형처럼 따르며 좋아했다. 그랬던 우리가 영화판에서 만나니 얼마나 신나고 반가웠을까. 하지만 막상 촬영현장에 서자 나는 내 행동에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혹시 내가 주연이라고 유세 떠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이런 걱정은 연기를 할 때나, 잠시 쉴 때나 내 행동들을 옭아맸고, 형들을 대하는 게 자꾸 어색해지자 급기야 피하기까지 했다. 대학시절 내내 함께 고생하며 꿈을 키웠던 동료들인데, 더욱이 고마운 마음을 가졌던 형들인데... 동생인 내가 허물없이 먼저 다가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전혀 그러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다. 인간관계에 능숙하지 않았던 시절,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지 못했으니 그때 형들만 생각하면 참 미안하다.

지금 떠오르는 것들의 백 배쯤일까, 천 배쯤일까. 그동안 많은 이들에게 주었을 상처와 후회스러움 말이다. 미처 몰랐기에 뒤늦게 깨달았던, 뒤늦게 깨달았기에 과거에는 몰랐던 부끄러움들이 어느덧 마음 한구석에 켜켜이 쌓여 있다. 언젠가는 이 모든 '마음의 먼지'들을 깨끗이 청소해야 하지 않을까. 세월이 이만큼이나 지나왔는데... (이건 마치 축구 후반전 30분, 한창 경기가 진행 중인데 느닷없이 "타임!"을 외치며 경기를 중단시키고선 전반전 15분에 있었던 상황에 대해 해명과 하소연하는 것 같은 '뜬금없음'에 어색함이 훅 밀려오지만...)

이제라도 말끔히 마음을 청소하고 정리한다면 앞으로의 삶이 훨씬 밝고 쾌적하리라는 강한 믿음이 생긴다. "미안하다" "그땐 정말 고마웠어"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진심을 담은 묵직한 한마디. 나은 삶을 위해 열심히 청소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면 상대방도 기꺼이 치울 수 있게 자리를 비켜줄지도, 어쩌면 우리 같이 치우자고 두 팔을 걷어붙이며 거들지도 모를 그런 상상을 해본다.

배우 이범수 인잇

삶을 산다는 것은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 흔적들 속에는 기쁨도 감사도 있겠지만 슬픔, 실수, 분노, 오해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마음 청소'를 해야 하지 않을까. 소중히 간직할 것들은 더 깨끗이 닦아주고, 버릴 것들은 시원하게 던져버리며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고 싶다.

화창한 봄날이다.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시 대청소를 할 때가 온 것 같다.

기획 : 이 강 신정은 김성화 | 구성 : 배우 이범수 | 교열 및 편집 : 김성화 | UX : 임효진 김도희 | 디자인 : 오언우 

인잇 이범수 네임카드 수정

#인-잇 #인잇 #책골라주는배우 #이범수 #배우이범수 #청소끝에철학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