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그사람] 이해찬의 마지막 전장, 4·15 총선

[그사람] 이해찬의 마지막 전장, 4·15 총선
그는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다. 그가 총선을 지휘하는 모습은 때로 위태로워 보였고 일정은 버거웠다.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말은 누가 들어도 어눌했다. 생각의 속도를 말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본인이 더 답답했을 것이다. 그런 몸으로 선거 유세 마지막 날에는 600킬로미터를 이동하며 지원 유세를 벌였다. 말 그대로 사투(死鬪)였다.

선거 종반 민주당의 우세가 확연해졌지만 올 초만 해도 민주당이 이번 총선에서 1당이 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21대 총선이 그의 정치 인생의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될지, 장엄한 패배의 무대가 될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이번 4월 총선이 그의 마지막 전쟁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가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있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유권자들은 거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국회의원 후보도 아니었고 차기 대권 주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아무리 길어도 석 달 후면 무대에서 내려올 인물이었다. 그의 사투는 그래서 더욱 외로워 보였다. 그의 지원 유세를 요청하는 후보자도 많지 않았다. 이낙연 전 국무총리가 전국을 누비며 지원 유세를 펼치는 모습과 대조를 이뤄 그의 모습이 때로는 초라해 보이기조차 했다.

어느 노회한 정치인처럼 죽기 전에 서녘 하늘을 벌겋게 물들여 보겠다는 개인적 욕심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어떤 때는 어서 이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거 직전 일부 언론은 이해찬 대표가 총선 직후 대표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보도했다. 민주당이 서둘러 이 보도를 부인했지만 어쩌면 이해찬 대표의 마음의 일단이 드러난 것처럼 읽히기도 했다.

민주당 이해찬

4월 14일 저녁, 이해찬 대표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사위인 곽상언 변호사가 출마한 충북 영동에서 마지막 지원 유세를 펼쳤다. 어쩌면 현역 정치인으로 펼치는 마지막 지원 유세에서 이해찬은 32년 정치 소회와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곽상언 후보가 여기를 택한다고 할 때 참 마음속으로 울었습니다. 저는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30년 동안 일하면서 그분이 얼마나 정의롭고 공적인 분인지 역력히 봤습니다. 13대 국회부터 시작해서 제가 총리를 할 때까지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30년 동안 함께 했습니다. 저희는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터무니없이 탄압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살아와서 이제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이해찬은 민주당의 대승이 확정되자 당 대표이자 상임선거대책위원장으로 소감을 밝혔다. 무거운 책임감, 겸손, 감사 뭐 이런 단어를 반복했다. 선거를 유례 없는 대승리로 이끈 장수의 기쁨이나 환호, 미소는 찾아볼 수 없었다. 쌓이고 쌓인 전쟁터의 피로만이 얼굴에 가득했다. 승패 자체를 넘어선 듯한 표정이라고나 할까. 언론과 대중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그의 표정과 소감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론의 관심은 차기 유력 대선 주자 이낙연에게만 쏠려 있었다.

지난 17일 선거대책위원회 합동 해단식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이해찬 대표(가운데) (사진=연합뉴스)
● 이해찬의 민주당

선거운동 시작 직전 이틀이나 입원해야 할 만큼 그의 건강은 좋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해야 될 일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선거를 앞두고 집권당에서 잡음 나지 않고 뒷소리 없는 공천은 거의 없었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당은 예외였다. 공천에 불복하고 당을 떠난 사람은 없었다. 이해찬의 최측근인 김현 전 의원과 이강진 전 세종시 부시장이 공천에서 탈락했다. 두 사람의 탈락은 이번 공천의 공정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다른 공천 탈락자들이 공천 결과에 시비를 걸지 못했다.

이해찬 대표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비례 위성정당을 만드는 문제로 여당 안에서 논란이 벌어졌을 때 지금은 명분에 집착할 때가 아니라며 논란을 잠재웠다. 총선 승리를 위해 필요하다면 비난과 악역은 자신이 모두 감당하겠다는 생각이 뚜렷했다. 정봉주와 손혜원 등이 만든 열린민주당이 선거 초반 바람을 일으켰을 때 이해찬은 열린민주당이 문재인 정부를 사칭하고 있다며 민주화 동지들을 맹비난했다. 민주당의 승리 외에 다른 것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민주당의 승리를 위해 필요하다면 악역이 아니라 악역 이상의 그 무엇이라도 이해찬은 했을 것이다.

현 집권여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의 당이고 문재인 대통령의 당이지만 동시에 이해찬의 민주당이기도 하다. 굵은 뿔테 안경을 쓴 36살 청년 이해찬이 평민당 공천을 받아 1988년 13대 국회에 들어온 이후 그는 범 민주당의 변하지 않는 핵심이자 실세였다. 그가 모든 선거를 승리로 이끈 것은 아니지만 그가 관여하지 않은 선거는 없었다. 3명의 진보 출신 대통령 탄생 과정에 모두 깊숙이 관여했다. 그가 김대중 대통령을 만들었고, 그가 노무현 대통령을 탄생시켰고, 그가 문재인 정권을 세웠다. 선거 기획과 전략의 대가라는 말은 그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할 수 없는 말일 것이다.

13대 총선 서울 관악을 평화민주당 이해찬 후보 포스터

7선 국회의원으로 DJ 정부의 교육부 장관으로, 노무현 정부의 국무총리로,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집권여당 대표로 그는 진보 정권의 상징인 동시에 실세였다. 진보 정권의 공이 있다면 그가 들어야 할 찬사가 적지 않다. 마찬가지로 진보 정권의 과오를 지적할 때 그의 이름이 빠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은 친노, 친문계 좌장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이해찬은 이해찬일 뿐이다. 그는 동교동계도 아니었고, 노사모도 아니었고, 문재인의 핵심 측근들이 모였다는 광흥창팀도 아니었다. 누구의 측근이라는 말은 그에게 가장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위아래 가릴 것 없이 누구와도 대등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며 홀로 서있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 노병에게 경의를

이해찬이 대표로 있는 동안 민주당은 좋게 말하면 기율이 잡혀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정당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이해찬 대표 특유의 장악력과 무관하지 않았다. 집권여당의 혼란은 곧바로 정권의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이해찬에게 확신을 넘어 강박에 가까운 것이었다. 진보 정권 10년 동안 어렵게 만들어 놓은 성과들이 보수 정권의 등장으로 한순간에 사라지고 자신의 정치적 동지 노무현 대통령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던 기억들, 이해찬에겐 절대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 그런 악몽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진보 세력의 20년 집권, 아니 그 이상의 장기 집권이 필요한 것이었다.

선거 한 번 이겼다고 모든 것을 가진 듯이 구는 사람들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거론하고 세상 달라진 것 가르쳐 주겠다며 복수를 벼르는 이들을 보면서 이해찬의 가슴은 철렁했을 것이다. 2004년 열린우리당의 실패가 이해찬에게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180명의 국회의원이란 세상이 다 자기 것 같은 180명의 황제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권력의 오만이 불러올 수 것은 민심 이반일 뿐이라는 사실, 민심은 한순간에 무섭게 돌아설 수 있다는 것을 이해찬은 몸으로 경험한 사람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데 집권여당의 미숙함이 반복되는 것 아닐까.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기회를 다시 놓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지금도 그를 놔주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남은 일은 내려가는 일뿐이다. 자신의 모든 것이기도 한 민주당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 차기 당권과 다음 대선 지형 등등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그림이 그려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더 이상 그 일은 나의 일이 아니라고 이해찬은 선을 그었다. 총선 승리 이후 처음 열린 의원 총회에서 이해찬은 "더는 정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주목한 사람들이 적은 것은 누구나 그의 이선 후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겠지만 필자는 언론이 이 발언을 너무 작게 취급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의지가 아닌 당의 필요에 의해 그가 다시 무대로 올라올지도 모른다. 8월 전당대회까지 아직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해찬은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내려갈 때라는 것을.

7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80년대조차도 이제는 역사의 영역이 되어 버렸다. 누군가에겐 90년대 역시 역사의 시간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렀으니 역사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 시대의 열정이랄까 눈물 같은 것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 듯한 아쉬움도 없지 않다. 이해찬은 한국 현대사의 증인이자 주역이다. 민청학련 사건,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민청련 운동 등등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그의 이름 석 자를 빼고는 쓰여질 수 없다.

민주당 180석 압승

그는 전쟁에서 이기고 화려하게 개선한 장군이라기보다 자신이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린 무명의 노병 같다. 국회의원을 7번이나 하고 총리를 하고 장관을 했으니 누릴 것은 다 누렸고 젊은 시절 흘린 피와 고난에 대한 보상은 차고 넘치게 받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해찬의 정치적 이념이나 행동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물러나도 벌써 물러났어야 할 사람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정치 진영이나 이념과는 무관한 이야기다. 자신의 삶을 온 힘을 달려온 우리 현대사의 몇 남지 않은 주역이자 증인에 대한 예우 같은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바둑도 두고 꽤 오래 전 그의 정국 분석과 전망에 귀 기울이던, 이제는 그들 역시 노병이 된 사람들과 환하게 웃기도 했으면 좋겠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는 그런 자유가 이해찬에게 주어졌으면 좋겠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