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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어린이 없는' 놀이터에 어린이 부르는 방법

김종대|건축가. 디자인연구소 '이선' 대표.

내 사무실이 있는 동네에는 시장 입구에 위치한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나무 몇 그루와 간단한 운동기구, 공중 화장실이 있는 일반적인 공원의 모습이다. 몇 년간 이곳을 지나다녔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본 건 1년에 한두 번, 구청에서 진행하는 행사가 있을 때 정도다. 운동하는 주변 상인들도 있지만 이곳에서 가장 자주 보이는 사람은 술에 취해 어슬렁거리는 주취자들이다. 어떤 때는 아침부터 술판을 벌려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는데, 구청에서 단속을 해도 공원의 비둘기 떼처럼 잠시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 나타나곤 한다.

다 큰 어른들도 가기 꺼려지는 이 공원이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 놀이터라는 사실이 믿기 힘들 정도다. 그 흔한 미끄럼틀이나 그네는 고사하고 어른들의 키 높이에 맞춰져 있는 운동기구와 어린이용 변기 하나 없는 공중 화장실은 어린이들을 떠나가게 만든다. 이 어린이 놀이터의 경우에는 극단적인 조건을 갖추긴 했지만, 제법 그럴듯한 놀이기구와 안전을 위해 CCTV까지 갖춘 어린이 놀이터에도 어린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왜 그럴까?

놀이터 그네 장난감 (사진=픽사베이)

어린이들을 어린이 놀이터에 다시 불러들이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놀이터 디자이너들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디자인을 시작했다. 설계 과정에서 아이들의 의사를 물어 아이들이 원하는 것들을 만들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여러 가지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완성형 놀이기구보다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자율형 창의 놀이터'와 놀이기구가 없는 '자연형 놀이터'를 만들기도 했다. (알록달록 화려하게 다 만들어진 놀이터 대신 스스로 만들어 노는 '셀프 놀이터'가 요즘 대세다.) 물론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CCTV도 빠짐없이 달아놓았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들을 열심히 반영한 요즘의 놀이터는 옛날에 비해 좋아진 건 분명한데, 아직도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다.

놀이터 (사진=픽사베이)

뉴욕에서 울타리가 쳐진 놀이터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너무 심한 조치가 아닌가 했지만,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터에는 아이들만 있는 건 아니었고, 보호자로 따라온 어른들도 함께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들의 모습을 배경으로, 즐겁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고 있으니 울타리의 부정적인 인상이 사라지는 듯 했다. 그 울타리가 공원 안에서 옳지 않은 행동을 하는 어른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공원을 오가는 동물로 인한 환경파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 양천구에 있는 경인어린이공원 역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다. 아이들 안전을 위한 CCTV가 있었지만, 술에 취해 싸우고 용변을 아무데나 보는 것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주민들과 놀이터 디자이너들이 머리를 맞댄 결과, 경찰들의 순찰과 CCTV대신 '내 아이는 내가 지킨다'라는 결론을 냈다. 공원 한 구석에 노란색 컨테이너를 설치하고 주민들이 당번을 정해 돌아가며 놀이터를 지켰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기구들을 어디에서나 잘 보일 수 있도록, 시선에 방해가 되는 구조물들을 없앴다. 또한 동네 어르신들이 공원을 돌며 운동할 수 있는 산책로도 만들었다.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이 공원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자 주취자 같은 불량배들이 자연스레 사라졌다.

공원을 찾는 어른들이 CCTV가 되어 주변을 감시하고 있으니 후미진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매력 없는 공간이 된 것이다. 노란색 컨테이너에서는 공원을 감시하는 것 외에도 독거노인에게 식사 배달을 해드리는 등 주민들의 봉사활동도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

가족 엄마 아빠 부모님 아이 (사진=픽사베이)

어린이들이 없는 어린이 놀이터에 어린이들을 불러들일 방법.
의외로 어른들을 함께 불러들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실제로 어린이 놀이터를 주민들과 함께 설계하다보면 아이들을 관찰할 수 있는 '어른들을 위한 벤치'가 필요하다는 요구를 종종 받는다. 어른들의 보호아래서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기 때문이다
.

이것이 어린이 놀이터에
보호자인 '어른들을 위한 공간'이 있어야하는 이유다.


* 편집자 주 : 김종대 건축가의 '건축 뒤 담화(談話)' 시리즈는 도시 · 건축 · 시장 세 가지 주제로 건축에 담긴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습니다. 격주 토요일 '인-잇'에서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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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시즌 2 엔드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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