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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드럼' 유어 라이프!

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작년 가을 이후 안팎의 여러 변화들로 인해 꽤 팍팍한 일상을 보내야 했다. 그 무렵 추-욱 가라앉던 삶의 에너지를 다시 샘솟게 해준 신세계가 있었으니, 바로 '드럼'이었다. (아! 물론, 내가 드럼을 직접 연주하는 건 아니다.)

'드럼'이라는 세계와의 만남, 그 시작은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개척하고 있는 '천재 드러머' 이상민 씨의 연주였다. 그의 연주 영상을 우연히 보았을 때, 파워풀한 타악의 비트가 주는 원초적인 흥분은 물론이고, 다채로운 리듬과 찰진 사운드는 단번에 내 세포 하.나.하.나를 깨웠다. 

'두두둥!' 심장을 때리는 '천재 드러머'의 연주가 한동안 귓가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잡식성 대중음악 애호가로서, 특정 장르나 악기를 파고들만큼 음악에 심취한 적이 없었던 나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물론, 공연장에서 밴드 뒤쪽에 과묵하게 앉아 온몸으로 스네어와 심벌, 그리고 탐탐을 두드리는 드러머의 카리스마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 적은 많았지만, 딱 그때뿐이었다.

드럼 (사진=픽사베이)

늦바람이 무섭다고... 나의 관심은 연주에만 그치지 않고 '드럼'이라는 악기 그 자체로 뻗어나갔다. 매일 밤 유튜브로 드럼 장비에 대한 이야기며, 국내외 유명 드러머들의 연주 영상을 찾아보며 푹 빠져들었다.

그렇게 영상을 한참 보다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드러머는 밴드 공연에서도 눈에 띄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 좌우 측면에 있는 경우가 많고, 중앙에 있더라도 무대 전면을 장악하는 보컬이나 기타리스트의 움직임 속에 가려지기 일쑤다. 게다가 무대 효과로 조명을 쏘거나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면 거의 안 보일 때도 많다. (보통 사람들도 보컬을 주로 기억하지, 드러머를 기억하는 일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드러머는 밴드 합주의 중심이 되는 리듬을 잡아주고, 나머지 악기들이 잘 따라 올 수 있게 조율하는 '실질적인 리더' 역할을 한다.

'천재 드러머' 이상민 씨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세계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모여드는 뉴욕의 음악계에서는 드러머 자리를 'hot seat'이라고 불러요

'hot seat', 객석에 보이는 것과 상관없이 그만큼 실질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뜻. 이것이 바로 드럼을 '밴드의 심장'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한국에서 온 천재 드러머"로 불린 드러머 이상민 (사진은 이상민 공식 인스타그램)

이상민 씨는 또 한 음악 프로그램 DJ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계시지만요, 드럼이라는 악기 특성상 다른 가수의 세션을 하기에 전면에 드러날 수 없을 때의 아쉬움, 그리고 자기 음악에 대한 갈증은 없나요?

이미 그 고민을 넘어선 듯한 이상민 씨의 답변은 그의 공연에서 재확인할 수 있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인들은 세션을 많이 하는데, 이는 가수든 밴드든 누군가에게 선택되어야 하는 일이다. 저도 모르게 타인에게 불리어지는 것을 기대하고, 거기에 점점 집중하게 된다.

이상민 씨는 말했다. 타인에게 불리어지는 것에 익숙해지면, 자칫 그것이 음악 생활에서 중심이 되기 쉽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누군가에게 선택되기 전 내가 그것을 선택하는 일이라고. 설령 내게 선택할 수 있는 힘과 명성이 아직 없을지라도,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닌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듯 했다. 그는 자신의 단독 공연이든 혹은 누군가를 위한 세션이든 자신이 연주하는 모든 음악은 자기 음악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마침 성공한 뮤지션을 꿈꾸는 앳된 청년들이 많이 와 있던 자리라 그 말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음악인들 틈에 어색하게 서 있던 나에게도 진한 울림을 남긴 그의 말은 항상 작가의 존재 뒤에 서 있어야 하는 에디터의 역할과 일의 의미가 겹쳐졌다. 그런데 곧 그러한 일의 특성이 에디터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란 점이 떠올랐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콘텐츠와 상품과 서비스는 늘 누군가의 선택을 전제로 하니 말이다.

어제는 선택하는 사람이었다가 오늘은 선택당하는 사람으로, 전면에 드러났다가 후면에서 가려진 채로.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 둘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진자운동을 하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선택하는 경우보다는 선택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은 채, 두드러지는 곳보다 두드러지지 않는 곳에서.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 할지라도, 선택을 기다리기만 하는 삶과 그 기다림 속에서도 나만의 비트와 리듬을 만들어가려는 삶은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떤 자리, 어떤 순간에도 자신만의 삶의 드럼을 가장 멋지게 연주할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는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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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시즌 2 엔드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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