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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그래도 봄 (feat. 행복한 일 더 많아지길)

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2020년 새해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이 문장은 해마다 새롭게 쓰는 일기장 앞부분의 단골 멘트이다. 나에게도 한해를 마무리하고 한해를 새로 시작하는 나름의 의식이 있다. 자주 찾는 사찰에서 그믐날 해넘이를 하며, 지난 시간 부족했던 마음과 실수들을 함께 떠나보낸다. 제야의 종소리를 듣고 108배를 하며 제법 간절하게 신년의 소원을 빈다. 그렇게 정화된 마음으로 빳빳한 새 일기장을 펼쳐 올해의 버킷리스트와 다짐을 빼곡히 적는다. 허나 한 달 정도가 지나면 그 옆 장에 이런 말이 적힌다.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제대로 실천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다, 아직 설날이 오지 않았으니 새해는 시작되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다잡자.


 그렇게 설날 연휴가 오면, 마음과 달리 정신없이 일하고 먹고 자다가 연휴 마지막 날이 돼서야 그 다음 장에 이렇게 적는다. "이제 진짜 새해가 지나갔다…." 순간 허망한 마음에 약간의 불안과 자책이 엄습한다.

 물론 시작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일지 모른다. 그래도 여전히 불완전한 시작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면 '입춘'을 통해 만회해볼 수도 있겠다. 보통 명리학에서는 새해의 시작을 입춘, 양력 2월 4일로 본다고 한다. 지난주 경자년 입춘이 우리를 찾아왔다.

봄이 왔구나
 1년 24절기 중 첫 절기인 입춘은 봄이 당도하였음을 알리는 절기다. 얼어붙고 움츠러 있던 땅이 깨어나고 밝은 햇살이 비추며 잠자던 동물들이 기지개를 켜는 시기이다. 금세 자리를 비켜주기 싫은 겨울은 이 무렵 꽃샘추위로 잔뜩 심술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니 오랜 농경사회의 풍습에서는 입춘을 무척 중요한 절기로 간주하고 집집마다, 마을마다, 국가에서 다가올 한 해의 길함과 풍년을 기리는 여러 의례를 치렀다고 한다. 비단 농경사회가 아니라 하더라도 국가의 운영, 일(기업)의 운영, 인생의 운영 모두 한 해의 길한 시작에 대한 염원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저 무탈하게 한해를 지내는 것조차 얼마나 힘든 일인지 통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올해는 봄이 오기도 전에 신종 코로나라는 독한 바이러스가 먼저 들이닥쳐, 전국민이 큰 불안에 떨고 있다.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국제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온통 눈과 귀가 재난 방송 뉴스에 쏠리고 방역당국의 어깨도 점점 무거워져간다. 마스크를 쓴 채 잔뜩 경직된 사람들, 작은 재채기 소리에 저도 모르게 사나워지는 인심. 중국에서 시작되었다지만 과학적 근거도 없이 편견과 불안에 사로잡혀 괜히 아시아 관광객들을 바라보는 눈초리가 나부터 사나워진다. 사람들이 오질 않아 당분간 영업을 멈춘다는 작은 가게 사장님들의 한숨, 급속히 위축되는 경제와 사회 활동들…

 신종 코로나 때문에 개인 위생에 철저해지고 '집밥'과 '홈술'이 늘어났다는 측면을 아무리 긍정적으로 강조해도, 어쨌든 바이러스의 위험과 그에 대한 공포가 우리 일상을 혹한기처럼 꽁꽁 얼어붙게 만든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춘래불사춘, 봄은 왔지만 아직 봄이 아니다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봄은 왔지만 아직 봄이 아니다
 이처럼 우울한 소식 가운데, 입춘축(입춘방)을 붙이는 풍습이 떠오른다. 바로 입춘을 맞이하여 그에 걸맞은 한해 기원을 써서 대문이나 기둥에 붙여놓는 일이다. 요즘도 사람들이 '입춘대길, 건양다경(봄이 시작되었으니 크게 길하고 경사로운 일이 많기를 바란다)'이라는 축문을 집 현관, 점포 입구에 붙여놓은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올해는 그저 내 집 앞에만이 아니라 마음속으로라도 우리나라, 이 지구라는 커다란 집 앞에 간절한 마음을 끌어모아 입춘축을 붙이고 싶다. 이 구절을 적어서 말이다.
 
재종춘설소복축하운홍(災從春雪消福逐夏雲興)
: 재난은 봄눈처럼 없어지고 복은 여름 구름처럼 일어난다

 이 바람처럼 부디 우리 모두가 이 위기를 잘 이겨내길 기도한다. 과민한 공포와 혐오가 아닌 냉철한 지혜와 배려로써 말이다. 수많은 재난영화의 단 하나의 결론이기도 하다. 세계가 점점 더 촘촘하게 연결되어 갈수록 우리는 앞으로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나 혼자, 우리나라만 삼가고 조심한다고 해서 피해갈 수 없는 상황들이 늘어날 것이다. 팔 아프게 온통 나의 안위에 대해 적기 바빴던 새해 소망 목록을 다시 살펴 수정한다. 나만이 아닌 타인을 위해 미리미리 지켜야 할 것을 지키고, 우리를 위해 마음을 낼 때, 진정한 봄이 내 마음에도, 이 세상에도 당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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