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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빚은 느는데 나이만 먹고…내가 웃게 생겼냐?"

서메리 | 작가 겸 번역가.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저자

[인-잇] "빚은 느는데 나이만 먹고…내가 웃게 생겼냐?"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스크루지 영감은 구두쇠의 대명사격 인물이다. 사실 원작 속의 그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찾아온 유령들의 도움으로 인색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새사람이 되지만, 초반에 보여준 밉살맞은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그의 이름은 여전히 선인보다 악인에 가까운 느낌으로 회자된다. '스크루지 같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고 좋아할 사람은 없다. 애니메이션 제작사 디즈니의 '스크루지 맥덕(Scrooge McDuck)'을 비롯하여 그를 모델로 탄생한 수많은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베풀 줄 모르고 돈에만 집착하는 성품으로 묘사된다.

스크루지 맥덕이 등장하는 동화책과 디킨스의 원작 소설을 읽으며 자란 나는 남들과 마찬가지로 그 존재에 따라붙는 쩨쩨한 이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철부지 어린 시절에는 끝까지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 부모님에게 스크루지 같다며 눈물 섞인 원망을 보냈고, 조금 성숙한 다음에도 (비록 이때부턴 직접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지만) 치졸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연스레 그의 네 음절짜리 이름을 떠올렸다.

하지만 사회생활에 이골이 났을 무렵 맞이한 어느 겨울, 우연히 다시 읽은 <크리스마스 캐럴> 속에서, 나는 여전히 냉정하고 여전히 인색한 스크루지의 말과 행동에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공감을 느끼고 말았다.
[인-잇] 스크루지의 행복한 크리스마스
"삼촌, 이제 곧 크리스마스인데 얼굴 좀 펴고 웃으세요!" 서글서글한 조카가 건넨 쾌활한 인사에, '탐욕스러운 늙은이' 스크루지는 차갑게 대꾸한다. "버는 건 없는데 빚은 쌓여가고, 나이만 한 살 더 먹게 될 뿐 나아지는 것도 없는데. 내가 지금 크리스마스라고 웃게 생겼냐?"

조카의 호의를 가볍게 무시한 그는 회사 직원에게 월급이 아깝다며 툴툴대고, 크리스마스에 쉬는 만큼 다음 날 새벽같이 출근하라며 으름장을 놓고, 난방비를 줄이려고 벽난로 대신 달랑 촛불 하나만 켜 놓은 차디찬 집으로 돌아가 홀로 잠을 청한다.

뒷부분의 변화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기 위해 디킨스가 작정하고 묘사한 초반부의 스크루지는 한 마디로 더럽고 치사한 인간이다. 하지만 요즘 말로 '갑질 고용주'이자 가족에게조차 인정머리 없는 이 냉혈한은 한편으로 학창 시절 따돌림의 아픔을 간직한 채 오직 성공만 바라보고 달렸던, 하지만 그 결과 철저히 외톨이가 되고만 독거노인이기도 하다.

욕망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그의 모습은 지금 봐도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러나 그가 괴물이 된 이유만큼은 어렴풋이 이해할 것 같다. 한때 나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인간상이라 여겼던, 작가가 세상의 어두운 면만을 똘똘 뭉쳐 인위적으로 탄생시켰다고 믿었던 인물에게 이런 연민을 느끼게 된 것은 인생 여정 속에서 그를 짓눌러온 절박함과 외로움이 더 이상 낯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버는 건 없는데 빚과 나이는 계속 쌓여가는' 현실은 어느덧 내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같은 상황에 놓였다고 누구나 같은 괴물이 되지는 않는다. <크리스마스 캐럴>에는 스크루지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힘든 환경임에도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다정하고 현명한 인물들이 한 트럭쯤 나온다. 스크루지 또한 세상에서 가장 인색한 노인을 교화하기 위해 하늘에서 급파한 세 유령과 함께 과거부터 미래까지 다양한 시공간을 체험하고, 그 결과 남에게 행복을 주고 자신도 행복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의 냉소적인 대사에 공감을 느꼈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다행한 결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이제 크리스마스를 즐길 줄 안다. 조카 내외와 소박하지만 정성이 담긴 식사를 들고, 동네 사람들과 유치한 게임을 하며 배가 터지도록 웃고, 직원 가족들에게 통통한 칠면조를 선물로 보낸다.

구두쇠의 대명사, 비호감의 상징인 스크루지마저 기쁨을 만끽하는 날인데 나라고 기분을 내지 못하리란 법이 어디 있겠는가? 변변히 이뤄놓은 것 없는 현실이 불안하고, 일주일 내로 한 살 올라갈 나이도 탐탁지 않지만, 그래도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바삭한 치킨에 시원한 맥주 몇 캔 준비해서 소중한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이 소중한 시간을 만드는 데 무려 스크루지 영감이 일조했다는 사실을 재미있어하면서.

#인-잇 #인잇 #서메리 #랜선북클럽

(사진=월트디즈니 '크리스마스 캐럴'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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