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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진영논리와 선택적 지각…조국 사태가 남긴 것

[취재파일] 진영논리와 선택적 지각…조국 사태가 남긴 것
지난달 22일, 뇌물 수수 혐의를 받은 김학의 전 법무부 장관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사실상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수사였다. 과거 2차례 수사와 법원의 재정결정까지 있었고, 수사 시점 기준 6년, 성폭력이 있었을 걸로 추정되는 시점 기준 10년이 넘게 지난 사건이었다. 입증이 될까, 공소시효는 극복이 될까? 김학의 전 차관의 범법 행위 유무와 별개로 검찰 수사 기간 동안 많은 한계가 지적됐다. 하지만, 뇌물 공여자가 여러 명이었기에 완전 무죄가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놀라운 결과였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1심 판결 이후 시민단체와 정치권의 반응이었다. 법원의 판결이 국민의 눈높이와 같으면 좋겠지만, 판결은 여론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판사들이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을 할 수 있도록 우리 헌법이 규정한 것은 여론에 따른 판결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법을 만드는 정치권은 '국민 눈높이'를 비판의 주된 이유로 들었고, "성폭력 증언이 있음에도 뇌물죄 이외 성폭력 혐의는 적용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시민단체는 "엄연히 사람인 피해자가 존재하는데 성폭력 사건을 뇌물죄로 둔갑시켜 기소했다"며, "법원은 검찰이 깔아놓은 좁은 틀 안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였다"고 검찰과 법원을 동시에 겨냥했다. 재판 결과에 대해 비판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비판의 논리가 문제였다. 수사 기간 동안 제기됐던 여성 진술 중 일부 문제점과 공시시효 극복의 어려움 등은 마치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다는 듯했기 때문이다. 듣고 싶은 이야기만 받아들이고, 불편한 이야기는 회피한 '선택적 지각'의 결과다.
김학의 1심 무죄
● 듣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선택적 지각'

'선택적 지각'은 왜 벌어졌을까. '진영 논리'가 작동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김학의 전 차관 사건과 관련해 무슨 '진영 논리'냐 싶겠지만, 진영은 단순히 '진보 vs 보수'의 구도로만 나뉘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시작된 수사였기에 대통령을 지지하는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 사이에도 진영의 벽은 쳐졌고, 일부 진영이 김학의 전 차관 사건을 공수처 설치의 명분으로 내걸었던 만큼 공수처 설치의 찬반을 두고도 진영은 만들어졌다. '여성의 성적 피해'에 초점이 맞춰지며, 또 다른 진영이 생기기도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진영 간에도 서로의 교집합에 따라 진영은 세분화됐다.

진영 논리에 의해 결론의 방향성이 미리 정해지면서 그것과 상반되거나 결이 다른 정보들은 무시되거나 비판을 받았다. 여성 진술의 한계나 문제점을 짚는 보도는 '피의자를 옹호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과거 경찰 수사의 문제점을 짚은 보도엔 '핵심을 비켜갔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여러 정보가 유통된 후 판단에 다다라야 했지만, 방향성이 다른 정보들은 쉽게 폄훼됐다. 메시지(보도 내용)보다는 메신저(보도한 언론사)에 대한 공격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서민 단국대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른바 깨어있는 시민('깨시민')에 의해 주도됐다.

● '선택적 지각'은 왜 일어나고 있나?

SNS의 발달과 다매체 환경에서 피하고 싶은 정보는 회피하고 듣고 싶은 정보에만 열광하는 현상은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른바 에코 챔버와 필터 버블 효과가 강화되면 합리적 문제 제기마저 봉쇄되고, 그 결과 진영논리는 더 강화된다는 데 있다. 강화된 진영논리 속에서는 심판 역할을 했던 사람들마저 진영논리에 투항하거나 포섭된다. 그 결과 여러 정보의 유통과 습득은 더욱 제한된다.

우리 사회는 이런 현상을 이미 목격한 바 있다. 故 장자연 씨 사건의 유일한 증언자를 자처했던 윤지오 씨를 통해서다. 지금은 지탄의 대상이 된 윤지오 씨지만, 윤 씨가 국내에서 한창 故 장자연 관련 활동을 할 때 누구도 윤 씨의 주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언론들은 윤 씨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는지는 덮어놓고, 윤 씨의 발언이나 행동 하나하나를 보도하기에 바빴다.

언론뿐만이 아니다. 정치권은 윤 씨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나섰고, 평소엔 객관적 시각으로 날 선 비판을 쏟아냈던 시민단체들도 윤 씨를 '의인'으로 대접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평소 언론에 대한 심판자를 자처했던 언론 관련 시민단체들과 미디어 전문지는 윤 씨에 대해 일방적으로 호의적인 보도를 내놓은 언론의 행태에 침묵했다. 때론 침묵을 넘어 윤 씨의 스피커를 자처하기도 했다. 심판이 아닌 선수로 옷을 바꿔 입은 것이다.

깨어있는 네티즌들은 윤 씨에 대한 문제제기를 "뭣이 중헌디"라며 간단히 무시했고, 때론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을 공격했다. 특정 언론사의 보도는 '우선 거른다'는 식으로 메시지보다 메신저 공격에 치중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전직 조선일보 기자와 관련한 진술에 대해 충분히 평가받았어야 할 윤지오 씨는 점점 괴물이 되어 갔고, 감당하지 못할 숱한 말들을 쏟아낸 결과 평가 받았어야 할 부분까지 모조리 부정당했다.
윤지오
● 정의로운 구호 아래 생략된 과정과 내용

진영 논리에 입각한 선택적 지각. 이 이면에는 정의로워 보이는 구호에 대한 호응도 있었던 듯하다. '김학의 전 차관 사건'이나 '故 장자연 씨 사건'과 관련해 앞장서서 구호를 외친 사람들이 어떤 목적이 있었느냐와 별개로 그 구호는 정의로워 보였다. '제 식구 감싸기 한 검찰을 심판해야 한다', '성적 착취를 당한 여성의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 '권력자들에 의해 인권이 유린당한 故 장자연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한다' 이렇게 정의로워 보이는 구호에 이견을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정의로운 구호를 실현하기 위해선 그 과정도 정의로워야 하고, 그 내용은 논리적 근거와 엄밀함을 가져야 하지만, 그런 부분은 생략되었다는 데 있다. 정의로운 구호에 압도당해 과정은 생략됐고, 정해진 답에 대한 반대 정보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쉽게 '부정의'로 낙인찍혔다.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데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냐며 논점을 흐리냐는 핀잔을 받기도 했다. 사실은 무엇인지, 주장에 근거는 있는지, 주장에 목적성이 있는 건 아닌지 등은 관심사에서 배제됐다. '우상' 윤지오는 그렇게 만들어졌고, 누군가는 그녀를 이용했다.

이런 모습은 조국 사태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문재인 대통령의 페르소나로까지 불린 만큼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였을 수도 있겠지만, 수위나 현상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걸로 보인다. 조국 전 장관의 거취에 정권의 명운이 투영되면서, 검찰 수사나 언론 보도는 논쟁이 아닌 정치적 투쟁의 대상이 됐다.

이 과정에서 한때 같은 진영에 있었던 사람들마저 '조국 사태'에 대한 관점에 따라 찢어지고 갈라졌다. '범진보'라는 하나의 깃발 아래 모였던 시민단체들도 분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고, '진보 인사'라고 쉽게 통칭됐던 사람들도 의견이 갈리고 있다. '조국 수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어찌 감히 비교하느냐'고 성난 얼굴을 할지 모르겠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대한 판단을 두고 보수 진영이 분화된 것처럼, 훗날 '조국 사태'는 진보 진영의 분기점으로 평가받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상] 조국 장관 지명에서 사퇴까지
● '조국 사태'를 겪으면 진행되고 있는 가치의 재정립

진영 논리에 입각한 선택적 지각이 공고화된 현실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가치들이 재정립되고 있다. 시민들은 '조국 사태를 공정하게 보도한 방송사'로, 때론 무리한 보도를 적지 않게 했던 것으로 보이는 방송사와, 관련 보도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조국 옹호에 앞장섰던 방송사를 수위로 꼽았다. 진영에 따라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 주는 곳을 '공정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것인데, 이쯤 되면 '공정'은 무엇인지, '공정한 보도'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보도의 공정성'이라는 걸 하나의 잣대로 정의할 수 있는 것인지, 근원적인 고민을 할 필요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고민은 당장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언론 영역에 한정해 본다면, 이런 고민의 장을 만들어 줘야 할 언론 관련 시민단체들이나 미디어 매체들도 일관성을 잃고 특정 진영의 잣대로 평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문제가 많았고, 현재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언론이지만, '언론 개혁'의 구호와 내용은 특정 진영이 필요한 시점에, 특정 진영에 유리한 쪽으로 논의되고 있는 듯해 보인다. '조국 사태' 과정에서 특히 많이 제기된 '피의사실 보도' 즉, '검찰발 보도'는 특정 진영, 특정인과 관련된 수사에 대해서만 지금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언론 개혁'은 문제를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모습도 보이고 있다. 현재 청와대나 정치권은 합리적인 문제제기 등에도 '가짜 뉴스'라는 말로 손쉽게 대응하고 있다. 국민 밉상이 된 '(특정)언론'이기에 그 어떤 대응보다 이런 대응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정보를 사실상 독점한 국가 기관으로서 올바른 대응인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FAKE NEWS(가짜뉴스)'라는 말로 불리한 모든 뉴스에 대응하는 걸 비판했던 사람들마저, 현 정부나 여권이 대응에는 문제 제기하지 않고 있다.

● 건강한 개혁의 위한 전제 조건…성찰과 일관성

이런 상황 속에서 '기레기 마케팅'을 벌이는 사람들도 나오고 있다. 비판받을 점 많고, 개선할 게 많은 언론이다. 언제가 되었든, 개혁의 내용이 맞는다면, 개혁을 하기 좋은 적절한 시기라면 개혁은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해 반성이나 성찰 없이 얼굴빛을 바꾸는 사람들이 개혁을 앞장서서 외치고 현실을 비판한다면 얼마나 호응을 받을 수 있을까. '조국 사태'에서 촉발된 '피의사실 공표' 논란만 한정한다면, 불과 얼마 전까지 누구보다 피의사실 취재에 공을 들였던 걸로 보이는 언론사나 기자들이 '피의사실 공표'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희극적인 상황이다.

물론, '피의사실 공표'의 문제 제기는 그 자체로 옳다. 수사 단계에 치중된 언론 보도가 검찰과 피의자 사이에 '무기 대등의 원칙'이 상대적으로 보장되는 공판 이후로 옮겨가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이런 논의를 과거는 잊은 듯 부끄러움마저 잃고 하는 건 곤란하다. '기레기 마케팅'의 주체가 되면 발화자는 '기레기'라는 범주에서 벗어나는 듯해 보이고, 현재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 상업적으로 이익이 되기 때문에 그러겠지만, 자기 성찰 없는 비판은 사회적 불신과 반발만 더 키우지 않을까.

'조국 사태' 이후 한층 목소리가 커진 '검찰 개혁', '언론 개혁' 구호는 그 자체로 정의롭다. 한층 커진 시민의 목소리가 개혁의 위한 발전적 밑거름이 되기를 기원한다. 하지만, 구호가 정의로운 만큼 과정도 정의로워야 하고, 개혁의 내용은 일관성 있게 지켜져야 한다. 진영 논리에 입각한 기준 적용, 상업적 목적을 위한 성찰 없는 비판, 선택적 지각을 강화하는 정보의 생산과 유통은 당장은 특정 집단에 이익이 될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 전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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