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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한국인 뺀' 中 공연 결정 논란…눈치껏 지킨 '한한령'?

정명훈 조성진 임선혜는 했는데…이번엔 왜 안된다 했나

[취재파일] '한국인 뺀' 中 공연 결정 논란…눈치껏 지킨 '한한령'?
미국 오케스트라가 중국 압박에 한국인 단원을 빼놓고 중국 공연을 하려다가 결국 연기했다는 뉴스가 최근 여러 매체에 실렸다. 유명 음악학교인 이스트만 음대의 오케스트라인 이스트만 필하모니아 얘기다. 음대 학생들로 구성된 이스트만 필하모니아는 80여 명의 단원을 이끌고 12월에 12일간 중국 8개 도시를 돌며 공연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스트만 음대는 지난 9월 말, 중국의 투어 파트너로부터 오케스트라 단원 중 세 명의 한국인에 대해서는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스트만 음대 자말 로시 학장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는 '외교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2016년 미국이 한국에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 시스템)를 배치한 이후 일어난 한중 외교 갈등으로, 한국 아티스트의 중국 내 공연이 금지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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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트만 음대는 고민에 빠졌다. 한국 학생을 빼놓고 중국 공연을 진행할 것인가, 아니면 중국 공연을 아예 취소할 것인가. 자말 로시 학장은 2주간 관련 인사들을 만나 의견을 수렴했다. 미국 의회와 중국 영사관에도 이 문제를 풀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한국인 단원을 빼고 중국 공연을 계속 진행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구속력은 없었지만) 투표를 진행했다. 결과는 2:1의 비율로 그래도 중국 공연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게 나왔다. 학장은 한국인 단원들과도 두 차례 만나서 의견을 들은 뒤, 중국 공연을 예정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자말 로시 학장은, 이번 투어로 이윤이 발생하지 않는다며, 이 결정이 이윤을 고려한 것이 아니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80명 이상의 학생들이 오랫동안 이 투어를 준비해왔으며, 갑자기 취소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일정에 큰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공연을 앞두고 돌연 취소하면, 중국 내에서 이스트만 음대의 평판이 나빠지고 이는 교수진과 단원들에게 있을지 모를 잠재적 채용, 공연 기회에 제약이 될 수 있다며 이렇게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윤을 고려한 것이 아니라고 했지만, 결국은 중국의 '시장'을 고려한 결정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이 결정이 알려지자 여기저기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네티즌들은 중국의 요구에 굴복한 것이다, 한국인을 빼놓는 건 차별이다, 전부 가지 않으면 안 가겠다고 했어야 한다, 등등 목소리를 높였다. 바이올리니스트닷컴은 '인권운동 시기엔 백인 재즈 뮤지션들이 흑인 동료를 환영하지 않는 공연을 거부했다'고 지적했다. 학내에서도 로시 학장의 결정은 학교의 차별 금지 정책을 위반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결국 로시 학장은 한국인 단원을 빼고 중국 공연을 진행하겠다는 당초의 결정을 번복하고 중국 공연을 연기하기로 했다. 10월 30일, 로시 학장은 이스트먼 필하모니아의 모든 단원이 갈 수 있을 때까지 투어를 연기한다고 밝혔다. 미국 NBC뉴스는 이스트만 음대의 공연 강행 결정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성주에 배치된 사드
많은 매체들이 이 소식을 전하면서 '한한령(限韓令)이 해외 거주 한국인 음악가들한테까지 영향을 미친 사례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조금 의아했다. 최근 해외 거주 한국인 음악가들의 중국 공연 소식을 잇따라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2016년 사드 배치 이후 중국에서 한국 음악가의 공연이 위축된 건 사실이다. 지난 2017년 소프라노 조수미가 중국 비자를 받지 못해 공연이 취소된 게 대표적인 사례다. 하지만 최근에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는 느낌이었다.

한국인 소프라노 임선혜가 지난달 중국 상하이에서 '샹인 오페라하우스(上音歌?院)' 개관 기념 공연에 출연했다. 샹인 오페라하우스는 상하이 음대에 문을 연 1,200석의 오페라 극장으로 10월 18일 첫 공연을 했다. 임선혜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이 제작한 모차르트 오페라 '가짜 정원사'에서 하녀 세르페타 역으로 무대에 서서 갈채를 받았다. 임선혜는 또 올해 르네 야콥스와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의 중국 공연에도 동행했었다.

이 뿐인가. 10월 26일 중국 베이징의 국가대극원 페이스북 계정은 지휘자 정명훈이 국가대극원 오케스트라, 피아니스트 바딤 콜로덴코와 함께 국가대극원에서 '컴백 콘서트'를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러고 보니 피아니스트 조성진도 중국을 다녀왔다. 조성진이 올여름 상하이에서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무대는 10분 만에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이스트만 필하모니아의 한국인 단원도, 정명훈 조성진 임선혜도 모두 해외 거주 한국인 음악가다. 사드 때문이라면 왜 이스트만 필하모니아 단원들한테만 '한국 아티스트는 중국 내 공연이 금지돼 있다'는 '원칙'이 적용됐을까. 정명훈 조성진 임선혜는 유명하고 비중이 큰 아티스트이지만, 음대 오케스트라 단원은 그렇지 않아서? 이를테면 라 스칼라 극장에 '한국인 소프라노 임선혜는 빼놓고 오라'고 하기엔 공연에서 임선혜의 비중이 너무 컸기 때문에?

어쩌면 중국 내 공연 주최 측의 차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국영 단체이거나 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단체가 직접 초청해 공연을 주최하는 경우라면, 민간 단체가 주최하는 경우보다 아티스트 비자 발급이 더 용이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한중 외교 갈등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아직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니, 정부의 눈치를 봐야 하는 민간 단체라면 한국인 공연을 피하고 싶었을 수 있겠다.

관련 보도가 쏟아지고 난 후, 이스트만 필하모니아는 한국인 포함 전체 단원들이 아직 중국 비자 신청을 하지 않은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즉, 비자를 신청했는데 한국인 단원만 거부된 것이 아니라 비자 신청 이전 단계에서 '중국 내 한국인 공연은 안 된다'고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스트만 필하모니아의 중국 공연 주최 측이 어떤 단체였는지, 중국 당국이 비자 신청해 봤자 발급을 안해주겠다는 의사를 비친 것인지, 공연 주최 측이 '알아서' 한국인은 안된다고 이스트만 음대를 압박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중국 정부는 '사드 보복'과 '한한령'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적은 없다. 하지만 중국의 관련업계에서는 암암리에, 알아서, 한한령의 기조에 맞추는 분위기였다. 한한령이 딱 부러지게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떤 때는 되고, 어떤 때는 안 되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는 듯하다. 참 많은 일들이 '케바케(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진행된다는 것을 새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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