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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너는 이미 '그' 마지막 문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 마르타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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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214 : 너는 이미 '그' 마지막 문장으로 달려가고 있다! - <마르타의 일>

"나는 마르타도 될 수 없었다. 나로 말하자면 신앙은 고사하고, 사람에 대한 믿음조차 거의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르타였다. 경아가 마리아라면 나는 마르타가 되어야 했다."

알 듯 모를 듯 알쏭달쏭한 제목의 소설, <마르타의 일>. 지난해 장편 데뷔 소설 <체공녀 강주룡>으로 23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박서련 작가의 두 번째 장편입니다.

(낭독을 허락한 한겨레출판사에 감사드립니다.)

박서련 작가는 <체공녀 강주룡>에서 1930년대 잡지 속 빛바랜 사진 한 장과 기사 한 토막을 바탕으로 신선한 상상력이 담긴 탄탄한 서사를 펼쳐 보였죠. 제게는 2018년 신인 작가의 장편 데뷔작 가운데, 단연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SBS 골라듣는 뉴스룸의 '북적북적'에서 먼저 읽은 뒤에, 8시 뉴스에 소개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이 작가가 발견하고 주목하는 사람들, 그들의 세상을 함께 바라볼 기회를 앞으로 오래오래, 자주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록적인 폭염이 이어졌던 지난해 여름 안에서도 가장 더웠던 8월 초 어느 날, 인터뷰를 하기 위해 작가님을 뵈었는데, 그토록 뜨겁게 달아오른 그 날의 열기가 이 뜨겁게 살아 요동치는 작품 <체공녀 강주룡>에 참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두 번째 작품은 서늘하게 벼린 추리 스릴러입니다. 스산한 잿빛 하늘이 드리운 11월에 읽기 참으로 어울리는 작품이에요. 바로 오늘, 동시대로 무대를 옮겨온 박서련 작가의 이 작품은 도 분위기도 <체공녀 강주룡>과 사뭇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뚝심 있는 통찰과 섬세한 심리묘사, 마음의 품위가 느껴지는 고요하면서도 강력한 분노가 전작과 본질적으로 공통적입니다. 튼실한 소설적 재미 속에 흐르는 충분히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피. 결국은, 사랑, 에 대한 믿음도 여전합니다.

"경아의 얼굴은 이미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급하게 눈물이 고이더니 후드득 떨어졌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 하고 못 박힌 듯 서 있는데 뒤에서 누가 어깨를 밀치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아빠였다. 우당탕 소리를 내며 들어와서는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침대 아래와 옆 가드를 하나씩 쥐고 우는 엄마 아빠를 내려다보는 사이 눈물이 그쳤다.

누워있는 게 나였어도 엄마 아빠는 이렇게 울었을까?

동생의 시체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미 떠오른 생각을 지우기는 어려웠다. 아마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지만 경아는 울었을 것이다. 너무 심하게 울어서 자기도 쓰러져 옆 침대를 차지하고 말았을 것이다.

얼굴이 가려진 채 누워있는 게 경아가 아니고 나였다면."


"경아 자살한 거 아닙니다.


내 생각과 같았지만 반가운 말은 아니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답장을 썼다. 뭐라고 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가장 궁금한 걸 물어보기로 했다.

누구세요?



자살이 아닌 건 어떻게 아시죠 옆에서 보셨어요?

경아가 자살한 게 아니라고 믿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은 것과 그렇다고 확신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닌가. 경아가 자살한 게 아니라고 확언할 만한 요소는, 지금으로써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익명 프로필 사진 옆으로 말줄임표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상대방이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애니메이션이 말풍선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봤습니다.

가슴이 뛰고 화장실에 가고 싶어 졌다. 곧바로 또 다른 메시지들이 도착했다.

아까 경찰이라고
경아 핸드폰 맡으라고 한 사람
접니다."


일단 재미를 보장드립니다. 단숨에 읽힙니다. 긴장감 넘치는 서두로 시작해, 바싹 말라 있지만 언제든 타오를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 전편에 넘쳐납니다.

추리 스릴러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 작품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스포일러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번 낭독에서는 서두 부분을 주로 발췌해 읽었습니다. 이른바 'SNS 셀럽'이었던 여동생 경아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 작품의 1인칭 화자 주인공 '나'인 언니 수아는 그 죽음의 진상을 뒤쫓으면서 또 다른 진실의 일부가 됩니다. 언니 수아가 동생 경아의 죽음의 진상을 추적하고,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일을 감당해 나가는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 이 자매가 살아내고 죽어간 2019년 바로 오늘의 여러 가면과 진짜 얼굴들이 하나하나 드러납니다.

"총체적으로 너절하고 지겨운 상황이었다. 내가 어른들의 주책 앞에서 짓곤 하는 표정, 당신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저는 나름대로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굳이 티를 내지는 않겠습니다, 라는 메시지를 담은 무표정을 경아는 좋아했다. 누가 어른 앞에서 그렇게 뚱하게 있으래, 하고 역정을 내도 미동도 하지 않는 눈과 입꼬리의 각도.

"난 그거 언니만의 스웩이라고 생각해. 진심 리스펙트."

그러는 경아는 누군가에게 싫은 티는커녕 관심 없는 티 한 번 낸 적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은 그랬다. 티는 고사하고 걔가 진심으로 누굴 미워하고 싫어해 본 적이나 있을까. 딱히 생각해보지 않은 주제지만 굳이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답이 나오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 경아는 나를, 내가 사람에게 인색하게 굴 줄 아는 면을 좋아했다. 자기가 죽어도 못하는 일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오프라인에서 스웩이랑 리스펙트를 소리 내서 말하는 사람 처음 봤다."

"나도 소리 내서 말해본 건 처음이야."

경아는 실없이 웃었다. 별수 없이 나도 그랬다.

어떻게 해줄까.

영정을 향해 물었다. 영정 속의 경아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려 모나리자처럼 웃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니."


실존 인물이었던 강주룡, 주룡이를 참으로 살아있는 인간으로 다가오게 '되살려냈던' 전작처럼, 이 자매, 수아와 경아도 정말이지 지어진 인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현실 이상으로 현실적인 여자들. 2018년에, 2019년에, 그리고 진심으로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2020년에도 여전히 같은 고통을 이고 내 옆을 스쳐 지나갈 것 같은 여자들입니다. 애증의 관계, 라는 상투적인 표현으로 축약되는... 일상적으로 다가오지만 근거리에서 바라볼수록 참담해지는, 여성들의 어떤 역사를 공유한 자매들입니다.

"내가 바로 경아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경아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은 기쁨과 슬픔과 열등감과 우월감과 애정과 경멸, 그 밖의 여러 감정으로 얼룩져 있다. 그 마음의 역사는 경아의 생애와 똑같이 시작되었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연년생 중 언니로서, 기억도 안 나는 젖먹이 시절부터 나는 경아와 경쟁하고 경아에게 사랑받고 경아를 지켜왔다.

그럼에도 경아가 내게 무엇을 바랄지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착한 그 애가 영정 사진 그대로의 표정을 하고 언니 제발 나 때문에 위험한 짓 하지 마,라고 하는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위험에 빠지고 싶지 않은 내 이기심이 나를 속이는 것인지, 정말 경아가 그걸 원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인지 헷갈렸다.

나, 그냥 내 마음대로 한다.

영정 속 경아의 표정은 물론 전혀 변하지 않았다. 사진에 대고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 책은 대체로 스산한 잿빛 느낌이 나는 스릴러이지만, 박서련 작가는 사실, 굉장히 진득한 사랑, 순수하게 그냥 사랑, 을 여전히 믿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체공녀 강주룡>에도 그런 사랑이 있었고, 이 책에도 그런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 자매가 공유하는 것도, 결국, 사랑, 입니다.

자매들의 사랑은 많은 시험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매라는 유닛'에는, 자매 각각의 존재가 확장되면서도 자매라는 묶음으로 존재하는 방식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공통점들이 있어왔기 때문입니다.

대체로 시니컬하고 냉정한 언니, 수아는 이 이야기 내내 동생에 대한 마음을 한 방향으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딱 한 대목에서, 가장 마음 깊숙한 곳의 그 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수아와 경아. 이 자매와 비견될 수 있는 다른 자매의 이야기가 이미 2천 년 전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요.

"익명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마르타도 될 수 없었다. 나로 말하자면 신앙은 고사하고, 사람에 대한 믿음조차 거의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르타였다. 경아가 마리아라면 나는 마르타가 되어야 했다.

그다지도 그 애를 사랑했다."


그리고... 제가 최근에 본의 아니게 자꾸 이러게 되는데요^^ 208회 '북적북적'에서 소개해 드린 프레드 울만의 <동급생>을 읽으면서, '이보다 강한 반전은 없다! 마지막 한 줄의 소설!'이라고 소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책 <마르타의 일>도 마지막 한 줄에 엄청난 반전이 있습니다. 정말 딱 한 문장에요. 결말까지 빠짐없이 읽으셔야, 제대로 뒤통수를 맞는 소설적 쾌감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단, <동급생>의 마지막 한 줄이 뜨거운 눈물을 자아낸다면, <마르타의 일>의 마지막 그 문장은 분필이나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소리 같습니다. 가슴 깊은 곳이 급격히 싸늘하게 시려오는, 해결되지 않는 감각을 남깁니다.

11월에 딱 어울리는, 서늘하면서도 뜨겁고 섬세한 스릴러, <마르타의 일>. 이 자매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봐 주시는 시간, 한 번 내주셨으면 해요.

*한겨레출판사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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