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잇] 일 안 하면 불안해지는 게 '노예근성'이라지만…

김창규│입사 20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직장인 일기를 연재 중

SBS 뉴스

작성 2019.10.10 11:01 수정 2019.10.10 19:5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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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꼰대' 14편: 일 안 하면 불안해지는 게 '노예근성'이라지만…

다음 출장지는 대구다. 기차 출발시간이 1시간이나 남았다. 커피집에 들어가서 스마트폰으로 간단히 회사 업무를 본 후 잠시 멍 때렸다. 오랜만에 갖는 여유다. 그런데 금방 지루해지고 마음이 불안해졌다.

인터넷 기사나 살펴볼까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가게 밖 청소하는 아주머니, 점포 상호, 그리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리곤 다시 시계를 봤는데, 겨우 10분밖에 안 지났다. 더 이상은 지루해서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나가서 대합실을 한 바퀴 돌며 가게들 구경을 했다. 한참을 돌아다니고 와서 다시 시계를 보았는데, 아직도 기차를 타려면 30분이나 남은 게 아닌가. 아, 미치겠다.

드디어 겨우 기차를 탔다. 아, 이제서야 마음이 좀 안정된다. 아까는 내내 왜 그렇게 불안하고 지루했을까? 어차피 기차 시간은 정해져 있는 것이건만,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왜 빨리 가서 일을 해야 한다는 초조함이 들었던 걸까?

이전 세대만큼은 아니겠지만, 나 또한 회사 일에 매달릴 때 마음이 편하다. 반면 회사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할 때면 지루함과 초조함이 몰려왔다. 안타깝지만 어찌하랴? 버릇이 돼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일할 때가 차라리 마음이 편한 것을. 이것도 꼰대의 증거일까?

기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자니 이내 또 지루해졌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보는 건 피하고 싶은데 어쩌지? 마음 편히 멍 때린답시고 이렇게 불안하고 초조해할 바에는 차라리 다시 회사 메일 함이나 열어 업무를 봐야겠다.

그 순간, 전화가 왔다. 몇 년 전 퇴직한, 아니 잘린 황 상무다. 나를 많이 예뻐했던 임원이었기에 회사를 나간 뒤에도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전화 통화는 했다.

"상무님. 안녕하셨어요?"

"대구 온다면서? 한번 보자."

간단히 약속을 잡고 전화를 끊었다. 황 상무, 불쌍한 양반이다. 이 분은 한때 우리 회사에서 신화적인 인물이었다. 우선 가장 젊은 나이에 임원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회자될 만한 일이지만, 이 분은 사실 더 유명한 면이 있었다.

그는 임원이 되어서도 아침 7시에 출근해서 밤 11시~12시까지 매일같이 일했고, 저녁은 과장을 조금 보태 1년 내내 짬뽕밥이었다. 이렇게 회사를 위해서 몸이 부서져라 일했건만 임원 3년 차에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잘렸다. (확실한 것은 내가 알기로는 업무적 실수는 없었다.)

이 분이 정리되었다는 소문은 일파만파 퍼졌고 회사가 너무 잔인하다고 직원들은 웅성거렸다. 같이 근무했던 사업부의 팀장이 이제 더는 야근을 안 하고 짬뽕밥도 먹지 않아서 좋다면서도 "얼마나 회사에 충성을 해야 안 잘리냐?"라며 울분을 토한 것도 기억이 난다.

퇴임 이후 이 분과 상당 기간은 연락이 안 되었다. 선배들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충격을 상당히 받아서 몇 개월은 산에만 갔었다고 한다. 산을 타면 일단 육체적으로 힘들고 올라가고 내려오는데 시간도 상당히 걸리니까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지루함과 괴로움을 함께 떨쳐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고.

나는 그를 생각하며 한숨을 지었다. 그리고 스마트폰에서 열었던 회사 웹사이트를 다시 닫았다. '여유로운 시간을 즐길 수 있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나도 회사 그만둔 후 뭘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 할 수 있어. 한가로우면서 지루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즐겨야지. 음식이든 운동이든 음악이든 게임이든 뭐든지 배우고 취미를 붙여야 한다. 회사 일에만 매달려 시간을 보내다간 나중에 크게 후회할 거야. 연습하자. 이것도 연습이 필요한 일이니, 지금부터라도 연습을 하자!'

그러고 보면 지금 젊은 직장인들은 내 또래들보다 훨씬 회사 생활을 잘 하는 것 같다. 그들은 직장에서 성과를 내는 것보다 자신의 시간을 갖는 게 더 소중하다고 한다. 회사는 급해도 야간이나 주말에 근무하는 건 절대 싫다고 한다. 이런 건 좀 나도 좀 보고 배워야 할 텐데.

그런데 그래도 될까? 황 상무 같은 수많은 성실한 사람들이 하루 14시간씩 일을 해도 잘렸는데.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은퇴 후의 한가로움을 즐길 수 있게 무엇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을 가진다는 게 지금 내게 가능한 일일까?'

그런 자유를 위해 지금 받고 있는 보상이나 인정을 포기해야 한다면? 나는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가? 회사를 그만두고 이제부터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겠다고 한다면 가족들의 반응은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대구역에 도착했다.

안 되겠다. 즐길 수 있는 삶도 좋은데 당장은 접어둬야겠다. 나는 자식들도 어리고 부양해야 할 부모님도 있고. 역시 나한테는 아직 자유보다는 빵이 더 절실하다.

그래, 이 빵도 맛있다. 나한테 보람도 느끼게 해주고 심심하지도 않게 해주니. 시간을 맞추려면 역에서 빵으로 대충 요기를 하고 서둘러 지점으로 가야겠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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