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합의'하면 집행유예…양형 들여다보니 ③

정혜경 기자 choice@sbs.co.kr

작성 2019.09.15 17:24 수정 2019.09.16 10:32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사례 하나. 한 남성이 길에서 한 여성을 발견한다. 밤늦은 시각 여성은 친구와 함께 술에 취해 귀가하는 길이었다. 남성은 여성을 몰래 뒤따라간다. 이 여성이 친구와 헤어진 뒤 집으로 들어갈 때 현관문을 미처 제대로 닫지 않은 것을 본 남성은 열린 문을 통해 따라 들어갔고 결국 성폭행을 저지른다. 남성은 범행 후 여성의 가방까지 절도했다.

사례 둘. 한 남성이 새벽 무렵 혼자 귀가하는 여성을 발견하고 성폭행을 결심한다. 남성은 약 10분 간 여성을 미행한 뒤 피해자가 출입문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집에 들어가려는 순간 피해자를 밀고 들어가 위협하며 성폭행을 시도한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자 폭행을 동반해 유사강간에 이른다.
이슈취재팀 정혜경 기자 그림1 목각인형위에서 언급한 두 사건 가해자에게 내려진 형벌은 각각 어땠을까? 두 사건 모두 늦은 시각 처음 보는 여성을 범죄 대상으로 삼은 뒤, 귀갓길을 따라 들어가 저지른 범행. 그러나 재판부가 내린 선택은 달랐다.

첫 번째 피고인에겐 징역 3년과 집행유예 4년의 형이, 두 번째 피고인에겐 징역 2년 6월이 내려졌다. 죄목은 모두 '주거침입강간'. 가해자들은 모두 성범죄 전과가 없는 초범이었다.

● 당하거나 피하거나…사냥감이 된 피해자들

새벽녘 귀가하는 여성을 따라 주거침입을 시도하는 CCTV가 공개되며 공분을 산 이른바 '신림동 사건.' 강간의 범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 여부가 논란이었지만 검찰은 '주거침입강간죄'로 가해 남성을 기소했다. 주거침입에 성공했을 때 피해자가 입을 수 있는 부수적 피해를 중하게 판단했다.

실제 성범죄 특례법(성폭력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에서도 '주거침입'을 동반한 성범죄는 친족 간 성범죄, 폭행을 동반한 특수강간과 더불어 특히 엄중하게 처벌하는 죄목이다. 계획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고, 또 피해자에게 끼칠 수 있는 피해 정도가 극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주거침입을 동반한 범죄는 피해자에게 '당하거나', 또는 '피하거나'의 두 가지 뿐인 이진법의 영역이다.

취재진은 41건의 판결문에서 이 냉혹한 '이진법'을 직접 확인했다. 피해자는 길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서, 큰 길에서 또는 좁은 골목에서 가해자들에게 '사냥감'으로 특정되었다. 피해자들이 스스로 사냥감이 되지 않을 도리는 없다. 가해자가 가해 행위를 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처벌이 중요해진다. 문제가 되는 건 양형이다.

● 성폭행 유죄에도 집행유예 판결이 나오는 이유

41건의 주거침입 성범죄 사건에서 실제 강간, 유사강간에 이른 경우는 14건. 이 가운데 집행유예 판결은 앞서 언급한 사례를 포함해 5건에 이르렀다. 취재진은 양형에 영향을 준 요소들을 분석하기 위해 판결문에 적시된 상황과 조건들을 간추렸다.

전과 여부, 피고인과 피해자와의 관계, 실형과 더불어 내려지는 보완 형, 예컨대 아동 및 청소년 유관 기관의 취업제한 명령이나 치료 감호 명령 여부, 보호관찰 명령 여부, 전자발찌 착용과 신상 공개 명령, 그리고 다시 범행을 저지를 확률을 정량 평가하는 기준인 'KSORAS' 지표와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 등을 따져봤다.
주거침입 성범죄 유형그 결과 '강간'이 인정되었지만 집행유예가 나온 사건들의 특성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났다. 집행유예가 선고된 5건 가운데 4건에서 피고인이 성범죄 전과가 없다는 점 그리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예외였던 1건은 피고인이 이전 범죄로 17년의 형기를 살고 출소할 무렵 새롭게 밝혀진 과거 범죄에 대한 선고였다. DNA 특정 기술이 발달하면서 피고인의 추가 범죄가 새롭게 밝혀진 것이다. 이 사건에선 피해자가 처벌을 강력하게 원했고, 피고인에겐 특수강간이라는 전과도 있었지만, 직전에 장기 복역을 마쳤다는 점이 집행유예의 사유로 참작되었다.
성폭행 사건 피고인 양형결국 이전에 비슷한 범행을 저지르지 않은 '초범'이라는 점과 피해자와의 합의가 원만하게 이뤄졌다는 점이 성폭행 범행 유죄를 인정받고도 가해자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이유였다.

혹여 2008년 1월부터 약 18개월 간, 그것도 서울과 수도권으로 지역을 한정했기 때문에 분석 대상의 수가 과소하다는 점에서 일반화하긴 어려운 분석 결과가 아닐까. 그러나 피해자 전담 국선 변호인으로 7년째 성범죄 사건만 도맡고 있는 대한법률구조공단 신진희 변호사는 이 두 가지가 집행유예 선고 판단에 작용하는 주요 요인인 건 사실이라고 답했다.

"성범죄 대표적인 게 강간이잖아요. 강간치상, 강간상해 이런 식으로 결합 범죄가 되는 사건들, 그러니까 피해 정도가 좀 더 큰 사건 또는 작은 사건 할 것 없이 초범이고 또 피해자가 선처를 원한다거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표시를 한 사건에서는 집행유예 선고가 많이 됩니다."

● "사는 곳 안다"…보복 두려워 합의하는 피해자들

이 두 가지는 성범죄가 아닌 다른 죄목에도 적용되는 대법원 양형위원회의 감형 참작사유이기도 하다. 양형위원회는 '성범죄 양형기준'에서 형량의 기준 가운데 '처벌불원' 항목에 대해 "피고인이 자신의 범행에 대하여 진심으로 뉘우치고, 합의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기울여 피해에 대한 상당한 보상이 이뤄졌으며, 피해자가 처벌불원의 법적 사회적 의미를 정확히 인식하면서 이를 받아들여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로 명시하고 있다.

물론 피고인의 사실상의 강요나 기망에 의한다거나, 피해자가 스스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미성년자나 장애인 등일 때 법정대리인의 처벌불원 결정에 납득할 만한 사유가 없다면 감형 참작 사유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단서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가해자의 명시적 협박과 강요가 없는 경우라 해도 주거침입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들의 '합의'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갖는다. 바로 주거지 또는 주거지 인근에서 벌어진 범행이라는 점 때문이다.
신진희 변호사신 변호사는 "성 범죄의 경우엔 내가 합의를 해주지 않으면 즉 피해자나 피해자 가족이 합의를 해주지 않으면 가해자가 출소한 이후에 앙심을 품고 찾아와 보복을 하면 어쩌나 이런 걱정을 가장 많이 한다"고 말한다.

"합의에 이르게 되는 대부분의 이유가 보복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 변호사는 "이 불안감 만큼은 성범죄가 너무 많은 2차 피해를 낳았던 '친고죄'였던 시절과 비슷하다"고 덧붙였다.

피해자들은 차라리 가해자들과 합의를 통해 주거지 인근 접근 금지에 대한 민사적 약정을 맺고, 이 약정을 지킬 것이라는 가해자들의 선의에 의지하기도 한다.

"특히 아동을 둔 부모 입장에서는 합의금 같은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자녀 보호를 위해 신고한 것 자체를 후회하는 분들도 계신다. 그래서 합의서를 작성할 때 피해자가 원하는 것 가령 접근 금지라든지 일체 연락을 하지 않는다든지 이런 것들을 명시적 문구로 삽입을 하고 각서를 받는다."

● 보호관찰 단 1건…집행유예 선고만 하면 그만?

그렇다면 이렇듯 이른바 '해코지', '보복'이라는 이름의 '재범' 우려를 낮출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성범죄자들에겐 징역과 집행유예 같은 실형, 이른바 '주형(主形)'외에도 앞서 언급한 아동 및 청소년 관련 기관의 취업 제한, 전자 발찌 부착 명령, 신상 공개 명령 등의 보완적인 형이 함께 따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보호관찰 명령'은 특히 집행유예 선고가 내려졌을 때 사법부가 피고인을 지속적으로 접촉해 관리할 수 있게 한 제도다. 피고인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확인해 재범의 확률을 낮추고 다시 사회로 연착륙할 수 있게 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검찰 내부 수사 지침에 따라 검사가 직접 청구하는 경우가 많지만 재판부가 검사의 청구 여부와 상관없이 부수 형으로 선고할 수도 있다.

그러나 판결문 분석 결과 집행유예 선고가 내려진 다섯 건의 판결 가운데 보호관찰 명령이 언급된 건 두 건. 그 중에서도 한 건은 기각, 나머지 한 건에만 명령이 내려졌다.
이슈취재팀 정혜경 기자 보호관찰 스탠드업집행유예 선고에 덧붙여 일정 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 명령만 공통적으로 내려졌을 뿐 사법당국이 적극적으로 피고인들을 관리하는 절차는 사실상 전무했다.

형사 합의부 소속의 한 현직 판사는 "재판부마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며 "주로 주심인 부장판사의 판단에 따르는데 보호관찰 명령의 실효성에 대해 회의하는 재판부가 많은 편"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 "예비적 범행 동반하는 주거 침입 성범죄, 보호관찰 강화해야"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주거침입의 경우 상당수가 예비적 범행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피해자를 특정해 미행하고, 또 열린 현관문 등 허술한 장치를 악용해 주거지 내에서 피해자를 완전히 고립된 상황으로 유도하는 것은 결코 '우발적' 범행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계획범죄, 특히 성범죄자들에 대한 형량을 높이되 우범자 관리도 입법 영역에서 더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교수는 "집행유예든 징역이든 이러한 성범죄 전력이 있는 범죄자들에 대한 예비적 감시기관이 더 필요하다"며 "전자발찌 대상자만 우범자로 편입할 게 아니고 범행의 내용 측면에서, 비면식관계에 있는 피해자를 그야말로 사냥하듯이 억지로 자택에 침입해 성폭행을 하는 가해자들에 대해서는 사실 재발할 위험성을 늘 염두에 둬야 한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현행 성범죄 양형기준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성범죄 양형기준은 2009년 만들어진 뒤 2013년까지 매해 수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2년마다 새로 구성되는 양형위원회가 우선순위를 선정해 특정 범죄에 대한 형량 기준과 범위를 수정한다.

이론적으로는 입법과 별도로 양형 논의가 가능하지만, 한 회기 당 검토할 수 있는 양형에는 한계가 있다. 양형위원회 소속 한 인사는 "우선순위에 따라 전문위원들이 먼저 초안을 만들고 그 이후 해당 회기마다 구성되는 위원들이 양형기준을 들여다보는 절차를 따른다"며 "위원들이 상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령 윤창호법처럼 법이 바뀌거나 형이 상향되는 경우를 우선순위로 고려한다"고 답했다.

결국 눈높이에 맞는 양형 기준 설정을 위해선 성범죄에 대한 입법이 1차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4편에서 계속-

▶ SBS 청년 프로젝트 페이지 바로가기

▶ [취재파일] 늦은 밤, 당신의 귀갓길은 안전합니까? ①
▶ [취재파일] 내가 사는 지역은 '여성안심귀갓길'에 얼마나 투자하고 있을까? ②   
▶ [취재파일] "스토킹은 8만원"…주거 침입 성범죄 예방 될까? 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