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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美의 발견, 관건은 '몸'이 아니라 '눈'

김지미 | 영화평론가

[인-잇] 美의 발견, 관건은 '몸'이 아니라 '눈'
가끔 마음이 땅에 떨어진 듯 무거울 때가 있다. 그럴 땐 코미디 영화가 웬만한 약보다 효과가 좋다. 얼마 전 마음이 또 툭 떨어지는 일이 있어 잭 블랙의 2006년 영화 <나초 리브레>를 다시 보았다. 사람마다 결이 다르듯 영화마다 유발하는 웃음의 종류가 다르다. 최근 극장가에서 900만 관객을 훌쩍 넘기며 흥행에 성공한 <엑시트>가 남녀노소 다 같이 빵 터지는 영화라면, <나초 리브레>는 소수가 낄낄거리며 볼 만한 작품이다.

<나초 리브레>는 멕시코의 한 수도원에서 취사 담당 수도승인 이그나시오(잭 블랙)가 남몰래 프로레슬러의 꿈을 키우다가 성공하게 내용을 담은 코미디다. 이그나시오는 자신의 꿈을 알아챈 친구와 파트너가 되어, 신분을 가리기 위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레슬링 경기에 참가한다. 그러나 경기를 하는 족족 그를 반기는 것은 패배뿐이다. 패배의 슬픔도 잠깐. 패자에게도 지급되는 출연료로 수도원에 딸린 고아원의 아이들 음식을 살 수 있어 다시 행복해진다.

이그나시오의 실력은 아마추어지만 꿈은 프로다. 그는 우승 상금으로 아이들에게 멋진 음식과 소풍을 선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수도원에서 레슬러 정체가 밝혀져 쫓겨날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결국 고아 소년들과 사랑하는 수녀님의 응원을 받아 멋지게 우승한다.

다소 뻔하고 엉성한 줄거리지만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대사가 웃음을 준다. 특히 영화를 볼 때마다 배를 잡게 되는 장면이 있는데, 이그나시오가 꽃단장을 하고 흠모하는 수녀님께 자신의 뒤태를 뽐내는 장면이다. 자그마하고 토실토실한, 운동과는 담을 쌓은 듯한 그의 뒷모습에 담긴 넘실거리는 자신감이 너무 귀여워서 박장대소를 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 그 모습을 다시 보면서 귀여움을 넘어선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보고 있는 내가 변한 탓이다. 특히 몸을 보는 나의 눈이 변했다. 미국에 와서 가장 빠르게 변한 것 중 하나가 내 몸을 비롯한 '몸에 대한 인식'이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렌트한 콘도의 집주인은 한국에서 보통의 통통한 아줌마였던 나에게 '스키니(skinny)'하다고 했다. 일생을 말라본 적 없는 내게 낯설고 즐거운 단어였다. 하지만 그것은 날씬함에 대한 찬사가 아니었다. 그가 고장 난 세탁기를 고쳐주는 동안 좁은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공구를 건네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0㎝가 훌쩍 넘는 노신사가 그저 나의 작은 체구와 민첩한 동작을 두고 한 표현일 뿐이었다.

옷을 사러 가서도 신기한 경험이 계속됐다. 한국에서는 S보다는 M이랑 더 친했던 내 몸이 여기선 XS에도 쏙 들어갔다. 처음엔 공부 안 하고 백 점 맞은 것 같아 신이 났다. 그런데 점차 사이즈는 아름다움의 다른 말이 아니라, 크기의 문제라는 너무나 단순한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곳엔 다양한 사이즈로, 다르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몸이 여기저기 아파 등록한 요가 스튜디오 화장실에 붙은 광고 전단도 처음에는 너무 낯설었다. 모델의 코 밑에 커다란 사마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 사마귀만 보였다. 한국 광고에서 유명 연예인의 미인 점으로 공인된 것을 제외하고, 광고 사진에서 잡티를 본 적이 없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6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점보다 훨씬 큰 모델의 예쁜 미소가 눈에 가득 들어왔다.

이곳에서는 타인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외양이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이곳에서는 누군가의 외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차별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해서는 안 되는 표현들이 정말 많다. 그러다 보니 신체에 대한 언급은 웬만하면 피하게 된다. 꼭 하고 싶다면 옷이나 헤어스타일로 에둘러 칭찬한다.

외모에 대해 말하지 않는 날들이 지속될수록 너무나 선명했던 미의 기준들, 날씬한 몸과 잡티 없는 피부에 대한 마음속 강박도 점차 옅어졌다. 그러고 나니 한 치도 안 되는 피부 뒤에 감춰진 것들이 더 눈에 들어왔다.

잭 블랙의 뒤태에서 진짜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특히 잭 블랙 표 코미디 안에서 그는 더더욱 매력적이다. 어릴 때는 타고난 아름다움에 주로 매료되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빚어낸 아름다움이 더 가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고맙게 느껴지기도 한다. 문화 소비자로서 내가 지불한 시간과 비용을 알차게 채워주는 이들의 노고가 얼마나 귀한지 알기 때문이다.

(사진 = 영화 <나초 리브레>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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