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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완장을 차면 돌변한다더니 내가 그랬다

김창규│입사 20년 차 직장인. 실제 경험을 녹여낸 직장인 일기를 연재 중

[인-잇] 완장을 차면 돌변한다더니 내가 그랬다
'결국 꼰대' 12편 : 완장을 차면 돌변한다더니 내가 그랬다

과거 나를 본사에서 쫓아냈던 기획팀장에 대한 반감, 그리고 그의 총애를 받으며 잘 나가는 차 차장에 대한 싫은 감정이 뒤섞여, 나는 기획팀이 추진하는 지도 점검 출장에 계속 태클을 걸었다. 속으로는 이런 내 행동이 부끄러운 짓인 줄 알았지만, 겉으로는 당당하다 박박 우겨댔다.

하지만 나 스스로도 다루기 힘들었던 이 복잡하고 비겁한 마음 상태는 어이없게도 외부의 압도적인 힘에는 아주 쉽게 굴복했다. 압도적인 힘? 사업부문장의 말이다. 회의 시간에 지도 점검 출장 관련 사업부문장은 간단명료하게 "김 팀장이 갔다 와" 했다. 두말없이 "예"다. 아, 창피했다.

어쩔 수 없이 출장 준비에 나섰다.

선임인 김 대리에게 출장 시 점검해야 할 체크 리스트를 정리해달라고 했다.
"여기 있습니다." 너무나 엉성했다.
"이게 뭐야?" 짜증을 내며 다시 정리하라고 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 체크 리스트를 기다리는 동안 책상 위에 놓여있는 보고서를 들춰봤다. 어, 오타다.
"곽 대리, 너는 한글도 모르냐!" 심히 지적을 해댔다.
"아, 죄송합니다."

잠깐 마음을 가라앉히고 결재함을 열었다. 하 사원의 품의 문서가 들어 있다. '어, 내가 이거 이렇게 고치라고 하지 않았는데…' 하며 하 사원을 신경질 가득 찬 목소리로 불렀다.
"내가 수정해준 문서 어디 있어? 다시 봐봐. 내가 언제 이렇게 고치라고 했어?"
"글자를 알아보기가 힘들어서.... 다시 수정하겠습니다."
"모르면 물어야지, 맘대로 고치냐?" 이번엔 언성까지 높였다.
"아, 죄송합니다."

이때 김 대리가 체크 리스트 수정본을 가져왔다.
"으이그, 정말.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인력의 적정성? 이건 왜 넣은 거야?"
"인력이 적정하게 있어야 서비스 수준을 높일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회사생활 하루 이틀 했나? 보나 마나 지점에서는 사람이 없어서 서비스까지는 신경을 쓰기가 어렵다고 변명을 할 텐데, 없는 인력을 어디서 데리고 와?"
"아니 그게…"

김 대리가 답변하려 하자 나는 듣기 싫다는 인상을 팍팍 풍기며 딴청을 부렸다. 과거 임원이 내가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얘기를 할 때마다 써먹던 언행이었다. 당시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동반된 민망함에 어쩔 줄 몰라했는데 그만 나도 모르게 과거 임원의 재수 없던 행위를 따라 했던 것이다.

바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김 대리는 다른 팀원들처럼 또 "아,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전혀 죄송할 것이 아닌데 죄송하다는 말에 나는 분수처럼 솟아올랐던 화를 멈추고 잠시 의자를 뒤로 돌려 반성을 했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팀장이 되고는 내가 왜 이렇게 화를 자주 낼까? 마음속에서 '직원 교육과 업무성과를 위해서'라고 답변이 튀어 올라왔다. 하지만 깊은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라고 했다.

완장을 차면 돌변한다더니 내가 그랬다. 팀장이 되니 갑자기 더 높아진 업무에 대한 열정, 더 강해진 목표 달성에 대한 집착, 더 높아진 예절 및 도덕 의식이 생겨났다. 그러니 팀원들이 못마땅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자연히 화(이하 질책)로 연결되었다.

한국의 일반적인 직장에서 질책은 윗사람이 한다. 그리고 아랫사람은 그것이 옳든 그르든 어느 정도까지는 "아 죄송합니다" 하고 받아들인다. 이미 고착화된 조직의 상명하복의 구조 때문이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히 나는 항상 맞는 판단을 하고 부하 직원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정도가 심하면 '저 인간들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 싶어 우월감까지 생기는데,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팀장인 내가 팀원보다 낫다? 과연 그런가? 혹시 팀장이란 자리가 나를 그렇게 착각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팀원들 질책 한 번 안 하고 팀장 역할을 수행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할 텐데, 통상 꼰대들의 질책은 큰소리, 빈정거림 혹은 무엇을 집어던짐, 서류 찢음 같은 좋지 않은 행위를 동반한다.

하지만 질책을 하는 이유가 진정으로 직원 교육과 업무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볼썽사납고 요란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이미 우리 기업 조직에는 상명하복의 구조가 갖춰져 있어, 내가 합당하지 않은 질책을 하거나 다소 잘못된 지시를 해도 "아, 죄송합니다"라는 정해진 답이 나오곤 하는데 말이다.

진실로 질책이 궁극적으로 교정을 위한 것이라면 부드러운 말로 얘기하고 그것이 안 먹히는 상황에서만 경고와 훈계 수준의 엄격한 화법으로 지적해도 충분하다. 그러면 꼰대라도 비교적 참아줄 만한 꼰대로는 불릴 수 있을 것이다.

갑자기 팀원들에게 미안해졌다. 하지만 차마 표현은 못한 채 퇴근을 하면서 "내일부터 나 출장이야. 좋지? 잘 부탁해"라고 특별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다음 편에 계속-

#인-잇 #인잇 #김창규 #결국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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