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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여름휴가, 어디 가지?…유럽에 떼지어 간 이유

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인-잇] 여름휴가, 어디 가지?…유럽에 떼지어 간 이유
7월, 열두 달의 허리가 꺾이고 태양이 지글거리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마음에 신호가 온다. 생생하던 의욕이 오후 두 시의 들풀마냥 축 처지고, 집중력도 아이디어도 바닥을 드러내면, 슬슬 사람이 미워지기 시작한다. 원고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대화가 겉돌기 일쑤다. 덩달아 몸도 무겁고 만사가 짜증스럽다. 아, 휴가 갈 때가 되었구나. 여행이 아닌 '요양'의 성격이 짙은, 깊숙이 나를 은신하기 급급하던 여름휴가.

어디로 가볼까? 수개월 전부터 계획을 짜고 멋진 장소나 이벤트를 궁리하는 일은 어림도 없다. 가급적 동행자는 없으면 좋고, 도시에서 멀리멀리, 사람 적고 자연에 가까운 곳이어야 했다. 그런 내가 도심에 있는 서점들을 열흘 가까이 다른 이들과 함께 '유랑'하기로 한 것은, 딴에는 꽤 큰 결심이었다.

한 출판사에서 기획한 '유럽서점 떼거리 유랑단'이란 여행 프로그램을 처음 본 순간 혹했다. 그러나 곧 마음이 나뉘었다. 무슨 산업시찰도 아니고, 휴가에서마저 온통 책과 사람들에 둘러싸여야 할까, 글로벌 트렌드까지 챙겨야 하나. '격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외치고 싶었지만, 나름 출판 입문 20주년을 그냥 보내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한 달 뒤, 나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열 명의 유랑단원들과 얼렁뚱땅 기념사진을 찍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디에 붙은 어느 서점엘 가는지 안내자료도 제대로 읽지 않은 채.

유랑의 첫 시작은 베를린이었다. 문화 예술의 도시답게 베를린에는 대형서점은 물론 개성 만점의 독립서점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침 8시부터 저녁까지 타이트하게 잡혀 있는 일정표를 보니 훅 피로가 몰려왔다. 함께 온 이들에겐 책과 서점이 즐거운 취향의 공간이겠지만 나에게는 업의 현장이다 보니 그런 마음이 드는 것 같았다.

졸린 눈을 비비며 찾아간 두스만을 시작으로, 한국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Do you read me'까지 샅샅이 찾아다녔다. 이 서점의 대표는 한국인들이 서점에 들어와선 책은 보지 않고 에코백만 몇 개씩 사간다며, 한국에 무슨 일이 있냐고 되묻기도 했다. 천장 위로 지하철이 지나다니는 서점, 아이들이 뛰어놀고 퇴근길 동네 사랑방이 되어주는 서점.... 주인의 철학에 따라 책의 배치와 공간의 꾸밈새가 확확 바뀌었다.

서점 유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 있는 도미니카넌이다. 역사가 800년이나 된 13세기 고딕 성당을 현대식 서점으로 리모델링한 곳으로 '천상의 서점'으로 불리기도 한다. 매일 아침 굳게 닫힌 철문을 여는 것으로 영업이 시작되는데, 겉과 달리 모던한 분위기의 서가에선 다채로운 책들의 세계가 펼쳐졌다. 옛 성당의 제단은 분위기 있는 카페가 되어 있다. 거니는 내내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양한 서점을 방문하면서 나의 오감도 점점 회복되어 갔다. 색색의 표지에 담긴 아름다움에 눈이 즐겁고 책과 사람, 공간이 뿜어내는 조화로운 에너지가 메마른 감성을 적셔주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강행군인데도 오히려 방전된 배터리에 녹색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 같았다. 일행들 모두 더 오래 더 많이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짙어졌다. 나는 몸과 마음이 한껏 충만해져서 서울행 비행기에 올랐다.

사실 제일 만만한 게 서점이었다. 중학교 3학년, 심란한 사춘기 마음을 달래러 엄마 몰래 가장 멀리 떠나(!) 갔던 곳은 시내의 대형서점이었다. 처음 떠난 유럽 여행, 낯선 도시에서 이방인의 불안함을 내려놓던 곳도 서점이었다. 일에 지치고 마음이 배고픈 날 슬쩍 들러 헛헛함을 채우던 곳도 서점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것은 서점이란 공간이 지닌 힘일지도 모르겠다.

상상력이든 정보의 세계이든 책은 한 작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질문에 대해 치열히 고민하고 대답해 가는, 생각과 체험의 결과물이다. 인생에 대해,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서… 마치 이른 아침 숲속의 나무들이 피톤치드를 뿜어내듯, 지혜와 해법과 감동을 뿜어내는 것이 한 권 한 권의 책이고 서점은 그 책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는 곳이다. 그러니 그 안을 거닐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리라.

바빠서 아직 휴가지를 생각하지 못했다면, 이번 여름 서점으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특히 요즘은 제주에만 50여 곳이 있을 만큼 개성 넘치는 독립서점의 전성시대다. 바닷가가 보이는 제주의 서점, 설악의 정기가 느껴지는 속초의 서점, 아늑한 남쪽 항구도시의 서점....

요즘 서점들은 취향과 라이프스타일 자체를 팔기에, 꼭 책을 좋아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사진을 찍고 싶게 할 만큼 예쁘고 독특한 공간도 구경하고, 시중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없는 귀한 책을 발견할 수 있다. 시간이 되면 작가들의 강연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어슬렁어슬렁 둘러보다 훅 나에게 말 걸어오는 책이 있으면 가볍게 펼쳐보라. 책장을 넘기는 동안 문장 하나가 지친 마음에 에너지를 주유해주고 인생 고민에 대한 솔루션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목이 마르면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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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소개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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