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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덴마크 문화로 본 '워라밸'

에밀 라우센 | 한국인 아내와 가정을 꾸리고 15년째 한국서 살고 있는 덴마크 남자

[인-잇] 덴마크 문화로 본 '워라밸'
일을 통해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고 자기개발의 기회도 갖고 싶다. 이는 덴마크에서 7년간 일을 하고 또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하며 살고 있는 나에게 여전히 유효한 소망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슬픈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근무 환경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한국에 살며 주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과다한 업무와 경쟁에 지쳐서 스스로가 마치 '일하는 기계'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요즘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 일과 삶의 균형 즉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이 뜨거운 이슈인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사실 워라밸은 덴마크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다. 덴마크 사람들도 시행착오를 거쳐왔고 현재도 완벽한 나라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한국보다 한발 앞서 워라밸이 이슈가 되면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됐고 문화로도 정착됐기에, 덴마크의 경험을 공유하는 게 한국 사회에도 유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덴마크 사람들은 워라밸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워라밸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도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워라밸을 중시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 그 시작은 공과 사의 명확한 구분이다.

● '사적인 시간' 존중하기

덴마크에서 근무 시간 외에 업무와 관련된 연락을 하는 건 매우 예의 없는 행동이다. 물론 한국과 같은 회식 문화도 없다. 같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끼리 1년에 한 번 정도 가족 단위로 함께 모여 식사하는 자리를 갖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흔한 일은 아니다.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나에게도 일과 쉬는 시간의 완벽한 구분은 굉장히 중요하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나는 보통 휴대폰을 방해금지 모드로 바꾸어 놓는다.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가 아닌 이상 근무시간 외 시간에 업무 관련 전화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사적인 시간과 공적인 시간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한국의 기업 문화에서는 '너무 하는 것 아냐?'라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겠지만, 덴마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한다. 덴마크에서는 직장인들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받아들여지며, 실제로 그렇게 해도 되는 자유가 있다.

덴마크 사람들은 '칼퇴근'을 한 뒤 집으로 돌아가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일에 대한 열정이 부족하다든가 애사심이 부족하다고 손가락질 받지 않는다. 집에서 충분히 재충전을 하고 일터에 다시 나올 때 일도 더 잘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루 근무를 마치는 순간은 물리적으로 일터를 떠나는 순간일 뿐 아니라 일과 관련된 스트레스도 함께 내려놓고 떠나는 순간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다.

● '공적인 관계' 맺기

덴마크 문화에서 보자면,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동료'이지 '친구'가 아니다. 한국의 회사원들에겐 지나치게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덴마크에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개념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동료들은 직장에 있는 시간 동안만 성립하는 관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서로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 평생 친구가 될 수도 있는 관계이지만, 그 이상으로 발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하지만 '한 개인이 맺는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단점이 될 수도 있는 이런 면조차, 공적으로 보면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 덴마크에선 사적인 감정이 업무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오히려 이를 경계하는 편이다.

관계에 있어서 다른 점은 또 있다. 덴마크에선 직장 내 직책이 맡은 역할의 차이일 뿐 사람의 귀천이나 높고 낮음을 나타내지 않는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철저하게 존중하도록 요구받는다. 실제로 덴마크 회사에 가보면 책상 배치나 사무실 구조만으로 누가 어떤 직책에 있는지 알아내기 어렵다. 회의 테이블도 둥근 테이블이다.

한국에서 군부대의 높은 사람이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집안일을 시켰다든지, 직장의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자녀 숙제를 대신 시켰다든지 하는 '갑질' 뉴스를 들은 적 있는데, 이런 일은 덴마크에선 정말 상상하기 어렵다. CEO나 국회의원, 혹은 총리라 할지라도 일터에서 특권의식을 드러내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 '워라밸'로 가는 길

워라밸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나는 한국에서 근무시간이 법적으로 점차 줄어들고 사회적으로 워라밸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을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법적·사회적 변화는 속도가 매우 더디고 따라서 수동적으로 마냥 기다리면 안 된다. 노력이 필요하다. 워라밸의 시작은 공과 사를 명확히 구분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결국에는 타인의 삶을 존중하는 태도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 사회의 변화는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글을 읽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직장 내에서 직장 선후배 동료들의 사생활을 존중해주고 워라밸이 잘 지켜지도록 서로 응원해주면 한국 사회의 변화도 더 빨리 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 이 원고는 인-잇 편집팀의 윤문을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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