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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책이냐 빵이냐, 그것이 진짜 문제는 아니로다

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인-잇] 책이냐 빵이냐, 그것이 진짜 문제는 아니로다
일요일 아침, 삼성동 전철역을 빠져나오는 발걸음이 다급하다. 평상시라면 늦잠에 이불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특별한 하루. 서울국제도서전의 마지막 날로, 나는 우리 출판사 부스를 지키는 '당번'을 명 받았다.

아직 공식 오픈 시간인 10시가 안 되었으니 관람객들은 오지 않았겠…, 아니 저 긴 행렬은 뭐지? 사람이 몰리는 오후에나 보게 되던 엄청난 인파가 벌써 입구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줄이 전시장 안에도 있다. 주말이라 아침부터 붐빌 것은 예상했지만 뜻밖이었다. 정녕 도서전의 인기가 이 정도란 말인가?

곧 전시 오픈을 알리는 안내가 나오자 입구에서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이 전시장 안으로 뛰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 무리는 안쪽에 있던 줄 뒤로 서둘러 자리를 잡았고, 한 무리는 B홀 방향으로 전력질주를 했고, 몇몇은 부스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잊고 있던 미션이 떠올라 나도 B홀 쪽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빈속을 자극하는 고소한 빵 냄새가 진동하자마자 알았다. 전시장 안으로 뛰어오던 사람들의 목적지를. 이번 도서전엔 독특하게도 한 유명 제과점이 부스를 냈다. 오랜 역사와 자신들만의 스토리를 책으로도 출판한 곳인데 '책 내는 빵집'이란 콘셉트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책은 쳐다볼 새도 없이 사람들 틈에서 정신없이 부탁받은 빵을 골랐다. 오후엔 줄이 길어 사기 힘들지 모른다고 하니.

의기양양 양팔 가득 빵 봉투를 들고 돌아오는데 왠지 뒤통수가 뜨끈하다. 이번 도서전에선 책보다 빵이 더 유명하다며, 빵밖에 보이지 않더라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책 내는 이들끼리 나눈 게 떠올랐다. 사람들이 전시장 중간쯤 있는 이 부스에서 빵을 사곤 그냥 가버린다는 우려도 들려왔다. 며칠째 전시장 곳곳엔 제과점 봉투를 든 이들이 꽤 많았는데, 나도 책보다 빵 찾아 전력질주를 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멋쩍은 기분으로 부스에 돌아오니 아까 본 줄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간절한 기다림 속에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이들에게선 비장미마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배우 정우성 씨는 이미 다녀갔는데, 도대체 아이돌도 아니고 무엇 때문에 저렇게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서 있죠? 부스를 둘러보던 독자가 이야기해준 바, 판타지 소설로 유명한 어느 작가의 팬 사인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초등학생부터 성인까지 팬덤이 장난이 아니네요. 그러고 보니 전날 전시장에서 목격한 사인회들도 만만치 않았다.

독자분들과 책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을 한참 지났다. 도서전이 폐막하기 전에 서둘러 이곳저곳 다른 부스들을 둘러보는데 거기 책만 있는 게 아니었다. 책의 성격에 맞게 사람들의 참여와 소통을 '제안'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그득했다. 책 속에 나오는 문장을 스탬프에 찍고, 다음에 읽고 싶은 도서의 주제를 응모하고, 삽화를 실제로 그려본다거나 신작 조형물 앞에 인증샷을 찍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림동화를 1인극으로 만들어 읽어주는 부스에선 꼬마들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문득 갓 편집자로 입문했던 무렵 도서전의 기억이 교차했다. 독자들과의 적극적인 만남을 위해 애쓰기보다는 간단히 책 설명을 하고 '점잖게' 서서 두꺼운 도서목록 책자를 나눠주고 부스를 지키는 게 일반적이었다. 지금보다 출판이 호황이던 시절이라 그랬을 리는 없다.

책을 둘러싼 시장과 문화가 만드는 이에서 읽는 이들에게로, 요즘의 모든 마케팅이 그러하듯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책은 견고한 취향으로 무장한 독자 개개인에게 깊고 진한 체험을 제공할 수 있을 때 살아남게 될 것이다. 계몽이 아닌 매력과 즐거운 상상력에 사람들이 기꺼이 '줄을 설' 때 말이다.

유난히 젊은 독자들의 행렬과 대화가 끊이지 않는 한 부스를 구경하려고, 인파를 헤치고 가는데 들뜬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 이 출판사 책 엄청 좋아하는데!"

빵의 고소함에, 빵의 스토리에 반한 수많은 사람들이 앞다퉈 달려가듯이 그 작가가 보고 싶어서, 그 문장이 읽고 싶어서 달려가게 만드는 매력적인 콘텐츠와 제안들… 당신은 가지고 있는가? 그 빵집의 시그니처라는 '튀소'를 한입 베어 물자 유난히 쌉싸름한 맛이 메마른 입안에 감돌았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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