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씨의 얼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경찰이 그녀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하고 이틀 만이었습니다. 그마저도 고 씨의 의지나 경찰의 결단에 따른 게 아니었습니다. 경찰서 내부, 진술 녹화실로 향하던 고 씨를 한 취재진이 포착한 것이었습니다. 고 씨는 경찰서 유치장을 떠나 검찰에 넘겨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며 철저하게 얼굴을 가렸습니다. 피해자 유족들은 울분을 토했습니다. "얼굴을 들라"며 분통을 터뜨렸으며, 경찰을 향해 "살인자를 보호하는 것이냐"고 외쳤습니다.
흉악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여론은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하라"며 들끓습니다. 다수의 여론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신상공개 여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은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공개에 대한 법적 기준은 2009년 '강호순 사건' 당시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듬해 마련됐습니다. 사회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강력사건 가운데 범죄가 잔혹하고 충분한 증거가 있으며, '알 권리' 보장과 재범 예방 등 공익에 부합할 때 성년인 경우에 한해 심의를 거쳐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습니다.
경찰은 고 씨의 신상을 공개하며 여론과 법적 기준에 대체로 부합하는 결정을 내렸으나 여전히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신상공개 결정 이후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진 겁니다. 고 씨는 완강하게 얼굴 공개를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아들과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신상공개 집행정치 신청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경찰이 고 씨의 긴 머리카락을 묶도록 하거나, 얼굴을 들게 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나왔을 때 돌아온 답은 "어쩔 수 없다"였습니다. 경찰은 "내부 지침 상 신상 공개된 피의자가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이더라도 고개를 들도록 강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경찰은 특정강력범죄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할 때 얼굴을 드러내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범죄가 잔혹하고, 증거도 충분하며, 공익성이 현저해 신상공개 결정이 내려졌음에도 피의자가 허리를 힘껏 숙이거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덮으면 방침은 유명무실이라는 겁니다.
경찰이 내부 지침을 들며 고 씨의 신상공개에 어정쩡하게 대처하는 동안 피해자 유족은 분노했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기도 했습니다. 일부 누리꾼들은 신상이 공개된 남성 피의자와 고 씨를 비교했고, "결국 머리카락이 긴 여성이라 봐준 꼴이 됐다", "신상을 남녀평등하게 공개하라"며 '젠더 대결'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만약 고 씨의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여러 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피의자의 얼굴을 뒤늦게 못 본 척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는 겁니다.
● 신상공개는 '예외적 조치'…명확한 매뉴얼 마련해야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공개에 대한 경찰의 지침은 말 그대로 모호합니다. 심의위원회의 개최는 '사회적 관심' 즉 여론에 민감하게 이뤄지며, 신상공개의 적절성, 일관성 논란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근무하는 한 경찰은 "이렇다 할 매뉴얼이 없어 여론에 따를 뿐이다. 기준도, 방법도 '오락가락'인 상황에서 실익은 누가 얻으며, 책임은 어떻게 질 수 있겠나"라며 볼멘소리를 털어놓습니다. 지침이 모호하니 경찰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어렵다는 하소연입니다.
피의자의 신상공개는 원칙에 반하는 예외적 조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개인정보보호법 및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에 따라 피의자 등 사건 관련자 신상은 공개해서는 아니 된다.) 신상공개의 결정 주체도 법원이 아닌 수사기관인 만큼 인권 침해, 가족 등 주변인이 당할 수 있는 2차 피해 우려도 매우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피의자 신상공개에 대한 논의는 흉악 범죄가 터질 때마다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자칫 잘 못 했다간 '피의자 망신주기에 그쳤다'거나 '여론에 휩쓸려 내린 섣부른 결정'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고유정 사례를 계기로 신상공개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의 빈틈이 확인된만큼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해 보입니다.
(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