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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본전도 못 뽑은 '신상공개'…분노만 더 키웠다

[취재파일] 본전도 못 뽑은 '신상공개'…분노만 더 키웠다
지난 12일, 고유정이 검찰로 넘겨졌습니다. 혐의는 살인·사체손괴·사체유기·사체은닉입니다.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뒤 바다에 버리는 등 유기했다는 겁니다. 고 씨가 체포되고 사건의 전모가 하나둘씩 밝혀졌습니다. 겨우 일부 수습된 피해자 시신에서 수면제 성분이 검출되었고, 범행 당시 옆방에선 6살 아들이 깨어 있었습니다. 고 씨는 범행에 쓰인 표백제를 환불하고 포인트 적립까지 챙겼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잔혹한 사건 내용을 담은 보도가 연일 이어졌고 온 국민이 분노했습니다.
전 남편 살해 고유정
그러나 국민들의 분노는 사건 자체의 잔혹성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피의자를 상대로 한 어설픈 신상공개가 더욱 화를 불렀습니다. 고 씨의 신상공개는 처음부터 삐그덕거렸습니다. 경찰은 고 씨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했으나, 고 씨 심경 변화로 인한 수사 방해 등을 우려해 뒤로 미뤘습니다. 하지만 정작 때가 되었을 때, 고 씨는 머리카락을 앞으로 길게 늘어뜨려 얼굴 공개가 불발됐습니다.

고 씨의 얼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경찰이 그녀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하고 이틀 만이었습니다. 그마저도 고 씨의 의지나 경찰의 결단에 따른 게 아니었습니다. 경찰서 내부, 진술 녹화실로 향하던 고 씨를 한 취재진이 포착한 것이었습니다. 고 씨는 경찰서 유치장을 떠나 검찰에 넘겨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머리카락을 꽉 움켜쥐며 철저하게 얼굴을 가렸습니다. 피해자 유족들은 울분을 토했습니다. "얼굴을 들라"며 분통을 터뜨렸으며, 경찰을 향해 "살인자를 보호하는 것이냐"고 외쳤습니다.
검찰 도착한 고유정 (사진=연합뉴스)
●  '정수리 공개'가 되고 만 신상공개...분노만 더 키워

흉악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여론은 "범죄자의 얼굴을 공개하라"며 들끓습니다. 다수의 여론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신상공개 여부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은 점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공개에 대한 법적 기준은 2009년 '강호순 사건' 당시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면서 이듬해 마련됐습니다. 사회적으로 관심이 집중된 강력사건 가운데 범죄가 잔혹하고 충분한 증거가 있으며, '알 권리' 보장과 재범 예방 등 공익에 부합할 때 성년인 경우에 한해 심의를 거쳐 피의자의 신상을 공개할 수 있습니다.

경찰은 고 씨의 신상을 공개하며 여론과 법적 기준에 대체로 부합하는 결정을 내렸으나 여전히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신상공개 결정 이후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진 겁니다. 고 씨는 완강하게 얼굴 공개를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아들과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느니 차라리 죽겠다"며 신상공개 집행정치 신청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경찰이 고 씨의 긴 머리카락을 묶도록 하거나, 얼굴을 들게 하지 않느냐는 지적이 나왔을 때 돌아온 답은 "어쩔 수 없다"였습니다. 경찰은 "내부 지침 상 신상 공개된 피의자가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숙이더라도 고개를 들도록 강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경찰은 특정강력범죄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할 때 얼굴을 드러내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범죄가 잔혹하고, 증거도 충분하며, 공익성이 현저해 신상공개 결정이 내려졌음에도 피의자가 허리를 힘껏 숙이거나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덮으면 방침은 유명무실이라는 겁니다.
얼굴 가린 고유정
'고유정 사건' 피해자 유족: "오늘 얼굴 보신 분 있습니까? 이럴 거면 신상공개를 왜 합니까? 남녀 문제를 떠나서 머리 긴 사람은 그럼 신상공개를 해도 얼굴 못 보여줍니까?"

경찰이 내부 지침을 들며 고 씨의 신상공개에 어정쩡하게 대처하는 동안 피해자 유족은 분노했습니다.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기도 했습니다. 일부 누리꾼들은 신상이 공개된 남성 피의자와 고 씨를 비교했고, "결국 머리카락이 긴 여성이라 봐준 꼴이 됐다", "신상을 남녀평등하게 공개하라"며 '젠더 대결'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만약 고 씨의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졌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집니다. 여러 매체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피의자의 얼굴을 뒤늦게 못 본 척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는 겁니다. 

● 신상공개는 '예외적 조치'…명확한 매뉴얼 마련해야

강력범죄 피의자 신상공개에 대한 경찰의 지침은 말 그대로 모호합니다. 심의위원회의 개최는 '사회적 관심' 즉 여론에 민감하게 이뤄지며, 신상공개의 적절성, 일관성 논란은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근무하는 한 경찰은 "이렇다 할 매뉴얼이 없어 여론에 따를 뿐이다. 기준도, 방법도 '오락가락'인 상황에서 실익은 누가 얻으며, 책임은 어떻게 질 수 있겠나"라며 볼멘소리를 털어놓습니다. 지침이 모호하니 경찰 어느 누구도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어렵다는 하소연입니다.

피의자의 신상공개는 원칙에 반하는 예외적 조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개인정보보호법 및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에 따라 피의자 등 사건 관련자 신상은 공개해서는 아니 된다.) 신상공개의 결정 주체도 법원이 아닌 수사기관인 만큼 인권 침해, 가족 등 주변인이 당할 수 있는 2차 피해 우려도 매우 신중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입니다.

피의자 신상공개에 대한 논의는 흉악 범죄가 터질 때마다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자칫 잘 못 했다간 '피의자 망신주기에 그쳤다'거나 '여론에 휩쓸려 내린 섣부른 결정'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고유정 사례를 계기로 신상공개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의 빈틈이 확인된만큼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해 보입니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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