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하루키가 길게 써내려간 '아버지'…그가 전하려고 한 것은?

[취재파일] 하루키가 길게 써내려간 '아버지'…그가 전하려고 한 것은?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문예춘추(文藝春秋)> 6월호에 특별 기고를 했습니다. 6월호가 발매된 것은 5월 10일이니 사실 이미 한 달 가까이 지난 일입니다. 무라카미 씨의 특별 기고 소식은 발매 당일 아사히 신문 등 일본 언론을 시작으로 이를 인용한 한국 언론들의 보도가 이어졌기 때문에 무라카미 씨의 한국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특별 기고의 내용이 그동안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던 (즉, 무라카미 씨가 그다지 밝히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야기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버지에 대해 글을 썼다. 그의 아버지는 전쟁(중일전쟁)에 참전한 경험이 있는데, 그때 중국인 포로를 처형하는 정경을 어린 자신에게 담담하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5월 10일 이후에 나온 당시의 기사들을 짧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그리고 무라카미 씨의 이번 기고가 그의 '반전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일본 언론의) 해석이 붙어 있습니다. 기사를 생산한 일본 언론이든, 이를 인용 보도한 한국 언론이든 그리 길지 않은 기사 내용은 대동소이합니다만, 자칭 무라카미 씨의 팬으로 마침 도쿄 특파원으로 일본에 있는 제가 그 기사만으로 '이런 일이 있었군' 하고 눈을 돌리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퇴근길 집 근처 편의점에서 <문예춘추> 6월호를 사서(특별 정가 1000엔) 무라카미 씨의 특별 기고 페이지를 찾아(p.240~p.267) '발번역'을 해 가며 읽었습니다.

전문 번역가에 비하면 부족하기 그지없는 일본어로 사전을 찾고, 구글 지도 등에서 지명(地名)의 정확한 표기를 체크하느라 예상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특별 기고 자체가 꽤 길었습니다. 페이지 수를 보면 아시겠지만, A5 국판(148*210㎜)인 <문예춘추>의 사이즈를 고려하더라도 28페이지는 만만치 않은 분량이었습니다. 우리말 번역을 마치고, 시험삼아 번역본을 200자 원고지 분량으로 옮겨보니 170페이지가 조금 넘었습니다. 이 정도면 웬만한 단편 소설을 훌쩍 뛰어넘는 분량입니다. 결코 짧지 않은 이 글을 일본 언론들은 잘도(!) 간략하게 요약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아무튼 이미 '속보성' 있는 기사를 쓰기는 이미 한참 늦어버린 셈이니 취재파일 독자분들에게 무라카미 씨의 이번 기고를 다른 기사들보다는 좀 더 '상세하게'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무라카미 씨의 팬들이라면 동의하실 텐데요, 그는 그동안 글에서 '본인의 가족'을 거의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40년 동안이나 소설과 에세이를 부지런히 발표하고, 틈틈이 잡지나 신문 기고를 해 왔지만 실제 본인의 가족 특히, 부인 요코 씨를 제외하고 직계 가족에 대해 쓴 것은 거의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팬들이 아는 정보라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교사' 출신이며, 무라카미 씨를 외동아들로 두었다는 정도일 겁니다. 또 그의 아버지가 어딘가 불교와 관련이 있다는 정보를 갖고 있는 팬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번 특별 기고에서도 무라카미 씨는 작심하고 <나의 뿌리에 대해 처음으로 쓰다>라며 글을 시작했습니다. 큰 제목은 <고양이를 버리다-아버지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로, 본인의 2007년 수필인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문학사상版)>의 제목을 빌렸습니다. 첫 페이지부터 팬들이 처음 보는 사진으로 시작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으로 보이는 어린 무라카미 씨가 어딘가의 운동장에서 야구 배트를 들고 웃으며 타격 자세를 취하고 있고(신발은 슬리퍼), 그 뒤에 한 중년 남성이 포수의 포구 자세로 앉아 있는(역시 신발은 슬리퍼) 사진입니다. 물론 이 중년 남성은 무라카미 씨의 아버지일 겁니다. 아버지에 대해 '거의' 쓰지 않은 무라카미 씨가 글 제목부터 이런 '희귀 사진'을 공개하고 시작하니 그가 제대로 작정하고 글을 썼을 거라는 짐작이 들었습니다.
<문예춘추><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6월호, 무라카미 하루키 특별 기고" data-captionyn="Y" id="i201321619"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90607/201321619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 A. '고양이를 버리다'

글의 제목인데도 불구하고, '고양이를 버리다'와 관계된 내용은 5월의 기사들이 많이 다루지 않았더군요. 어린 무라카미 씨의 집에는 고양이 몇 마리가 비교적 자유롭게 오가며 지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의 배가 불러왔다든가 하는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근처 해안에 고양이를 버리러 갔습니다. 무라카미 씨의 설명에 따르면 '고양이를 내다 버린다'는 행동 자체는 당시로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그 여름날 오후에, 해안에 암코양이를 버리러 갔다. 아버지가 자전거를 몰고, 내가 뒤에 올라타 고양이가 든 상자를 안았다. 슈쿠가와를 따라 고로엔의 해변까지 가서, 고양이가 들어있는 상자를 방풍림 안에 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아버지와 나는 고로엔의 해변에 고양이를 두고, 안녕 하고 말한 뒤, 자전거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전거에서 내려 '불쌍하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하는 느낌으로 현관의 문을 드르륵 하고 열었다. 그랬더니 아까 버리고 온 고양이가 '야옹' 하며 꼬리를 세우고 애교를 부리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우리를 앞질러서 이미 집에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돌아올 수 있었는지 나는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함께 살던 고양이를 버리는 것은 어린 무라카미 씨도 죄책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는 당시 아버지의 표정을 떠올립니다.

"그때 아버지의 멍한 표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멍한 표정을 한 얼굴은, 이윽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변했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은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후에도 그 고양이를 계속 기르게 되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집에 돌아왔으니까 뭐 기를 수밖에 없겠지, 하고 단념하는 마음으로."

무라카미 씨는 서두의 이 에피소드를 통해 이제부터 써 내려갈 아버지의 인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 같습니다. 이후의 글에서 무라카미 씨는 다소 문약(文弱)하고, 내성적이며 소박한 마음을 가졌던 아버지가 자기보다 한 세대 앞선 시대-중일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패전 이후까지-를 어떤 경로로 살아갔는지를 유일한 자식인 동시에 40년 경력을 가진 작가로서 '취재'해 갑니다.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B. '버림받은' 경험

바닷가에 버린 고양이가 다시 돌아온 사건에 아버지가 '안심'했던 것은, 본인(아버지) 역시 어릴 적 부친으로부터 비슷한 일을 당했기 때문으로 무라카미 씨는 해석합니다. 무라카미 씨의 조부인 무라카미 벤시키(村上弁識)는 교토의 큰 절의 주지였는데, 둘째였던 무라카미 씨의 아버지를 '승려'로 '출가'시킨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조부인 벤시키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가 많은 경우 장남 이외의 아이들을 입을 줄이기 위해 양자로 보내거나, 어딘가의 절에 견습승으로 맡기는 것은 당시에는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라(奈良) 어딘가의 절에 맡겨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교토로 다시 돌아왔다. 추위 때문에 건강을 해쳤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새로운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이 컸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다시 평범하게 자랐다. 그러나 그 경험은 그의 소년시대 마음의 상처로서, 어느 정도는 깊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가를 '당했다가' 돌아온 것에 대한 마음의 상처를 간직하고, 아버지는 불교 관계의 전문학교에 들어갑니다. (본인이 어떤 진로를 희망하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절집의 아들이었던 만큼 그 이외의 선택지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스무살이 된 1938년에 '징병'됩니다. 이미 1937년에 중일전쟁이 시작돼 전선이 확대되던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부터 무라카미 씨는 아버지의 중일 전쟁 참전 사실을 담담하게 써 내려가는 동시에, 저 끔찍한 '난징 대학살'은 아버지가 중국 전선에 투입되기 약 10개월 전에 일어난 사실이라고 명시합니다. 아버지가 중일 전쟁에 참전한 것은 아들로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어딘가 기억 속에서 '난징 대학살'과 아버지가 이어져 버려 그동안 애써 '무시'해 왔다는 고백도 곁들입니다.

"혹시 아버지가 이 부대(구 일본육군 보병 제20연대)의 일원으로 난징 공략전에 참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나는 오랜 기간 갖고 있었고, 그래서 그의 종군기록을 구체적으로 조사해보려는 마음이 좀처럼 들지 않았던 것이다. 생전의 아버지에게 직접 전쟁 때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묻지 못한 채로,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못한 채로 아버지는 2008년 8월에 구석구석으로 전이된 암과 심각한 당뇨병으로 90세를 일기로 교토 니시진(西陣)의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C. 전장에서의 아버지

1938년 10월에 병력 수송선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무라카미 씨의 아버지는 중국군(정확하게는 장제스가 이끌던 중화민국군)의 게릴라식 저항으로 길게 늘어진 중국 전선에서 소모적이고 지지부진한 전투를 겪습니다. 무라카미 씨의 아버지는 치중병(輜重兵, 우리로 치면 보급병)이었는데, 난징 대학살 당시에 선봉으로 투입됐다가 철수한 보병 20연대의 보급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본인이 난징 대학살이 자행된 현장에는 없었지만 학살의 10개월 뒤 바로 '그 부대'의 보급을 담당하던 부대에 배속됐기 때문에 전혀 관련이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무라카미 씨의 '의심'도 아마 그런 부분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아버지는 교토의 산속에 있는 학교에서 승려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마 성실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소한 사무적 실수로 징병 되어 엄격한 신병 교육을 받고, 38식 보병총이 손에 쥐어지고, 수송선에 태워져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중국전선으로 투입됐다. 부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중국군과 게릴라를 상대로 쉴 새 없이 전투를 반복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교토의 산속 절과는 모든 것이 정반대의 세계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정신의 커다란 혼란이 있었고, 동요가 있었고, 영혼의 격렬한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많은 기사들이 주요 내용으로 다룬 부분이 나옵니다. 바로 아버지가 있던 부대에서 중국인 포로를 '참살'한 내용입니다.

"유일하게, 아버지가 나에게 당신이 속해 있었던 부대가 포로로 잡은 중국 병사를 처형한 일이 있다고 밝힌 적이 있었다. 어떤 경위와 기분으로 아버지가 나에게 그 일을 말해주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꽤 오래전의 일이라 전후 관계가 불확실하고, 기억은 고립되어 있다. 나는 그때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다. 아버지는 처형의 모습을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중국인 병사는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소란을 피우지도, 무서워하지도 않고 참수당했다. 가만히 위를 올려다본 상태였다, 고 아버지는 말했다. 아버지는 목이 잘려 죽은 그 중국인 병사에 대한 경의를-아마도 당신이 죽을 때까지-깊이 간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같은 부대의 동료 병사가 처형을 집행하는 것을 옆에서 보기만 했던 것인지, 아니면 좀 더 깊이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내 기억이 혼탁한 것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처음부터 애매하게 말을 했는지 이제는 확인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더라도, 그 일이 아버지의 마음에-병사이기도 했고 승려이기도 했던 그의 영혼에-커다란 응어리로 남았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로 보인다."

무라카미 씨는 중국인 병사의 처형 장면을 묘사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아버지의 상처와 정념이 자신에게 이어졌다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처형 경험'을 간접 체험한 내용을 설명함으로써, 무라카미 씨는 '아버지'에 대해 글을 쓴 '의도'를 드러냅니다.

"아버지의 회상, 즉 군도로 사람의 목이 잘리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것도 없이 어린 나의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다시 말해 하나의 의사체험으로서 말이다. 바꿔 말하면 아버지의 마음 속을 오랫동안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연결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기도 하고, 또 역사라는 것도 역시 그런 것이다. 그 본질은 '이어받다'라는 행위, 또는 의식 속에 있다. 너무나 불쾌해서 눈을 돌리고 싶은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그것을 스스로의 일부로서 이어받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역사라고 하는 것의 의미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버지는 전장에서의 체험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스스로 한 일이든, 목격한 일이든, 아마도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않고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만은, 설령 서로의 마음에 상처가 되어 남는다고 할지라도, 어떤 형태로든 피를 나눈 아들인 나에게 말로써 남겨 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꼈던 것은 아닐까."

사실 무라카미 씨는 아버지에게서 어릴 적 들은 '처형의 간접경험'을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소설에 녹여 낸 적이 있습니다. <태엽감는 새 연대기(1995)>에서 '사형 집행인 보리스'가 등장하는 에피소드가 있었죠. 또 같은 소설에는 만주국 수도 신징(新京) 동물원에 근무하던 일본인 수의사가 야구 유니폼을 입은 중국인들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신징에서의 사건은 소설 속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아니면 등장인물('아카사카 시나몬'이라는 인물입니다)의 꿈속 사건인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도록 애매하게 처리되기는 했지만, 두 사건 모두 이번 하루키의 '특별기고'를 읽고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어릴 적 들려준 '전쟁 체험'이 그 뿌리가 되었다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난징 대학살 희생자 기념관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중국 사람들
D. 무라카미 씨는 왜 이 글을 썼을까

아버지의 참전 경험을 건조한 필치로 추적한 뒤, 글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과 자신의 출생으로 이어집니다. 전장에서 돌아온 뒤 무라카미 씨의 아버지는 교토 대학 국문과를 졸업해 일단은 교사가 되었고, 역시 교사 일을 하던 어머니를 만나 결혼해 나를 낳았다, 는 식입니다. 무라카미 씨의 오랜 팬들이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정보도 있고(태어난 곳, 살던 곳이라든가 하는), 처음 듣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왜 무라카미 씨가 아버지와 거의 연을 끊은 것 같은 상태에 들어갔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무라카미 씨가 도쿄로 진학을 하고, 전공투 시대를 통과해서 재즈 카페를 경영하다가 전업 작가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을 무렵의 이야기인 듯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자란 시대도 환경도 다르고, 사고방식과 세계를 대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건 당연하다.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 그런 점을 새삼 관계의 재편성 같은 것으로 재인식했다면 이야기는 다시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런 새로운 접점을 시간과 공을 들여 추구하는 것보다는 일단 내가 하고 싶은 일에 힘과 의식을 집중하고 싶었다. 그때 나는 아직 젊었고, 눈앞에는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들도 많았고, 스스로 추구해야 할 목표를 너무도 명확하게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잡하게 얽힌 혈연보다, 그편이 나에게는 훨씬 중요한 안건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도 물론,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나만의 작은 가정이 있었다."

그러나 무라카미 씨는 아버지의 일생을 추적하면서 느낀 감정에 대해 최대한 스스로의 언어로 표현하려 합니다. 그에 따르면 그건 '자기 자신이 투명해지는 감각'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개인적인 문장이 얼마나 일반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나는 손을 움직여 실제 문장을 쓰는 행위를 통하지 않으면 사물을 생각할 수 없는 타입의 인간이므로(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것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 과거를 조망하고, 그것을 눈에 보이는 언어로, 소리를 내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치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문장을 쓰면 쓸수록, 그것을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자기 자신이 점점 투명해지는 것 같은 불가사의한 감각에 휩싸이게 된다. 허공에 손을 들어 올려 가만히 바라보면, 손바닥 반대편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다."

E. 사라진 고양이에 대하여

글의 끝 무렵에, 앞서 무라카미 씨가 아버지와 '버리러' 갔던 고양이와는 다른 고양이가 등장합니다. 어릴 적 무라카미 씨가 살던 집(아마도 효고현 니시노미야시에 살던 시절로 보입니다)에서 기르던 하얗고 작은 새끼 고양이의 일입니다. 어느 날 무라카미 씨가 바깥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새끼 고양이가 마당에 있던 큰 소나무를 슬금슬금 오르기 시작합니다. 눈앞에서 자기의 용감함과 기민함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이라고 무라카미 씨는 표현합니다. 새끼 고양이는 나무 밑동을 기어 올라가 어느덧 줄기와 잎들이 무성해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올라가 버립니다. 그러나 이내 소나무 위쪽에서 새끼 고양이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올라갈 수는 있어도 내려올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라고 무라카미 씨는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불러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버지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버린 새끼 고양이를 구출하지 못한 채로 하룻밤이 지났고, 그 이후 새끼 고양이는 종적을 감추어 버립니다.

"그 고양이는 밤사이에 어찌어찌 아래로 내려와 그대로 어딘가로 가버렸을지도 모른다(어디로?). 아니면 아래로 내려올 수 없어서 소나무 가지 어딘가에서 힘이 빠져 소리도 내지 못하고 천천히 쇠약해져 죽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바깥 마루에 앉아 그 소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종종 이런 상상을 했다. 작은 발톱을 세워 필사적으로 가지를 움켜쥔 채로 바짝 말라 죽어버린 작고 하얀 새끼 고양이를."

여기까지 읽어오신 분들 가운데, 아마도 무라카미 씨의 열성 팬이 계시다면 이미 떠올리셨겠지만, 나무 위로 올라가 버린 새끼 고양이의 이야기는 <태엽감는 새 연대기>에서 등장인물인 '아카사카 시나몬'이 말하는 능력을 잃게 된 계기를 그린 에피소드 그대로입니다. 무라카미 씨는 아버지의 개인사를 이제서야 독자들에게 풀어놓으면서, 인생이란 이런 식의 때론 가혹한 '우연'이 끝내 가져오고 마는 작은 사실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우연'들이란 특별한 것 없는 극히 평범한 일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생긴 것들입니다. 아버지가 어릴 적 작은 절에 '출가'했다가 돌아온 것도 그렇고, 관공서의 실수로 징병 되어 중국 전선에 파병되었던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해 아버지와 결혼하게 된 것도 그렇고, 그렇게 둘 사이에서 태어난 무라카미 씨가 장성한 이후로 아버지와 거의 대화를 하지 못했던 것도 어쩌면 우연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우연의 결과로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여기에 무라카미 씨가 이 글을 쓴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 게 아닐까요. 글의 거의 마지막에 그는 이렇게 씁니다.

"우리는 광대한 대지로 떨어지는 엄청나게 많은 빗방울 가운데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각자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이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만큼의 사상이 있다.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것을 '계승해 간다'고 하는 한 방울로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어딘가에 깔끔하게 흡수되어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치환되어 사라진다고 해도 말이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집합적인 무언가로 치환되어 가기 때문에 더더욱 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글을 마치면서, '발번역'을 하는 동안 줄곧 눈길이 머문 점을 한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라카미 씨는 이 긴 글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한 번도 밝히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집니다. 교토 안요지의 주지였던 조부(무라카미 벤시키, 이름인 弁識는 친절하게 '읽는 법'도 알려줍니다)와, 그 절을 물려받은 숙부(무라카미 시메이), 그리고 3대째 주지가 된 사촌(무라카미 준이치)의 이름을 명시한 것과 대비됩니다. 자신의 '뿌리'에 대해 처음으로 쓰겠다며 글을 시작했지만, 글을 다 읽고 난 뒤에도 무라카미 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채로 글 속에 머뭅니다. 무라카미 씨가 이렇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을 여전히 익명의 그늘 안에 의도적으로 남겨둔 것은, 어쩌면 이 이야기가 그저 자신의 '가족사'가 아니라, 독자 개개인이 자신의 이야기로 치환할 수 있는 '집합적인 무언가'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