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인-잇] '뛰어도 제자리, 멈추면 뒤처지는' 우리는 러닝머신 세대

장재열 | 비영리단체 청춘상담소 '좀놀아본언니들'을 운영 중인 상담가 겸 작가

[인-잇] '뛰어도 제자리, 멈추면 뒤처지는' 우리는 러닝머신 세대
88만 원 세대의 붐이 한차례 지나간 이후, 어느 날 우리 곁에는 삼포 세대라는 단어가 다가왔습니다. 2010년대 초 경향신문의 기획시리즈 <복지국가를 말한다> 특별취재팀이 만든 신조어였지요. 4포 세대, 5포 세대, n포 세대로 늘어가면서 88만 원 세대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했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아직 생존 중입니다.

n포 세대라는 키워드에는 공감이 느껴지는 요소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탁월한 네이밍이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전의 어떤 00세대보다도 장기 생존한 이 키워드에 기반해서, 분명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공공에서는 청년을 위한 정책들이 생겨났고, 지금도 계속해서 기획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각지대에 놓였던 청년층에 대한 정책과 연구가 다양해지고 늘어나는 '현상'은 분명 반가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우려도 존재합니다. 점점 더 청년이 '돌봐주어야 할' 사회적 약자로써 대상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지요.

상담으로 만난 친구 중에 할머니와 둘이 사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쭉 그렇게 살아오다 보니, 아무래도 예쁜 새 옷을 자주 입지는 못하는 형편의 친구였지요.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옷을 모아서 주자는 의견을 내셨다더군요. 다음날, 대부분의 친구들이 십시일반 옷을 가지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입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아이의 체격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가져온 것이 대부분이라 맞지도 않았을뿐더러, 학교에 입고 올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서른이 훌쩍 넘은 지금도 그는 그날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선생님께 원치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던 어렸던 자신보다도, 옷을 얻어 입어야 했던 가난보다도, 그날 이후 학급의 동등한 구성원이 아닌 타자화, 대상화가 된 그 기분이 더욱 견디기 괴로웠다고요.

결국 88만 원 세대와 n포 세대. 두 키워드는 그 통찰과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한계를 가집니다. 첫 번째는 이 키워드들을 만들고,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상은 정작 청년들에게서 기회를 박탈한 이들이 대다수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그러한 태생적 한계 때문에 이 키워드들엔 현상에 대한 '통렬한 분석'은 있으되, 지금의 세대를 지배하는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이지요.

가끔 토론이나 인터뷰 자리에 참석할 기회가 있는데, 이런 질문 많이 받습니다. "청년들이 열심히 안 사는 것도 아니고, 이제는 '너희가 노오력을 해라'라는 말이 꼰대짓이라는 건 압니다. 그리고 예전 우리 시대만큼, 아니 그 이상 청년들이 더 열심히 산다는 건 압니다. 그런데 그 '열심히'가 뭔가 열정이나 에너지보다는 강박증 같습니다. 그렇게까지 겁을 먹어야 하는 세상인가요? 너무 자신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닌가요?"라는 질문 말이죠.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습니다. "이전 세대도 열심히 뛰었고, 우리 세대도 열심히 뜁니다. 멀리서 보면 열심히 달리는 똑같은 두 사람이지요.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전 세대는 평지 위에 서 있었다는 겁니다. 각자의 달리기 실력 차이는 있지만, 열심히 달린다면 예전보다 1㎝라도 앞으로는 가는 느낌을 분명히 받을 수 있었어요. 그렇기에 열심히 뛴다는 말이 '전진한다'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는 러닝머신 위에 서 있는지도 몰라요. 열심히 뛰면 현상 유지, 가만히 서면 뒤로 밀려가는 거지요. 그리고 러닝머신의 끝엔 낭떠러지가 있고요. 열심히 뛰면서도 공포에 질려있는 모습들. 조금 이해가 가시나요?"

내년이면 2020년이 됩니다. 또 다른 10년이 시작되는 만큼, 분명 새로운 세대 규정의 단어가 쏟아져 나올 테지요. 저는 기대와 동시에 걱정이 됩니다. 또다시 기성의 눈으로 바라본 무언가가 재생산되지는 않을까. 그럼 네가 해보면 어떠냐고요? 물론 저는 사회학자도, 경제학자도 아니기에 우리 세대를 둘러싼 환경적 요소를 철저히 분석하지는 못합니다. 누군가의 삶을 듣는 경청자가 제 역할의 전부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합니다. 당사자성을 지닌 우리의 이야기들을 최대한 많이 전하기 위해 이 시리즈를 시작했습니다. 앞으로 1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연령대에 따라, 직업군에 따라, 환경과 지역적 요소에 따라 제가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들과,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을 들려드리려 합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이야기들을 전해주셔도 참으로 반갑겠습니다.

부디 이 시리즈가 또래 청년들에게는 나만 그러함이 아님을 실증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근거 있는 위안'이, 기성세대에게는 조금 더 이해를 수반한 시선의 마중물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년 세대에 대해 새로운 담론을 주장할 다음 연구자는 청년의 시선과 정서를 이해한 분이기를 바라봅니다. 적어도 지난 10년의 세대 담론과는 조금 달랐으면 좋겠습니다. 동아시아인의 문화와 환경을 19세기 서양인이, 지극히 '그들의 시선'에서 분석한 그 옛날 제국주의 시대의 보고서처럼은 되지 않기를 바라며, 조금은 발칙하게, 조금은 솔직하게 시리즈를 열어봅니다.

※ 본 칼럼의 사례는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 인용되었습니다. 

#인-잇 #인잇 #장재열 #러닝머신세대                 
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