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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누구나, 한 권의 책을 가슴에 품고 산다

이혜진 | 해냄출판사 편집주간

[인-잇] 누구나, 한 권의 책을 가슴에 품고 산다
"누구나 한 권의 책을 가슴에 품고 있다고 하셨는데, 강사님은 어떤 책을 쓰고 싶으세요?"

순간, 희망의 밧줄 같은 것이 내 앞에 스르륵 내려왔다. 책 쓰기를 주제로 한 나의 첫 강연, 첫 번째 질문자였다. 의심 반 기대 반이 뒤섞인 100여 개의 눈동자 사이에서 청년의 질문을 듣고 있노라니 강연 부담에 뻣뻣하던 몸에 긴장이 다 풀릴 것만 같았다. 나는 덥석 그 밧줄을 잡았다.

"저는, 그러니까, 다른 사람한테 어떤 책을 쓰고 싶냐고 질문 받아본 게 처음인데요. 너무 고맙습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쓰고 싶은 게 있었어요." 울컥, 정작 강연보다 내가 쓰고 싶은 (언제가 될지 알 수도 없는) 책 이야기에 더 열을 올리고 말았다.

자기 인생의 콘텐츠를 만들어보자고 기획된 대규모 창작캠프에서 '당신이라는 책'을 주제로 강의를 하는 자리였다. 실제 한 권의 책은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고 무엇이 필요한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 짧은 질문이 예리하게 내 안으로 파고들어 묵혀두었던 어떤 바람 같은 것을 뒤흔들었다. 뜨거운 뭔가가 내 가슴속에 일렁이는 것까진 청중은 알 수 없었다. 아, 사람들이 이래서 책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이구나.

20년 가까이 나는 질문하는 사람이었다. 당신의 가슴속에 무슨 이야기가 있나요? 세상에 꺼내어 함께 나누고픈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나요? 또 나는 20년 가까이 제안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주제 한번 써보시면 어때요? 선생님의 그 말씀, 지금 사람들에게 정말 절실한 내용이에요. 선생님의 말씀을 이런 방식으로 구성해볼게요. 그리고 듣는 사람이었다. "아, 네!, 와~ 음... 오!"

편집자로 살며 세상에 뿌려진 많은 이야기에서 어렵사리 열쇠를 찾아 그들의 마음을 열고 그들의 삶을 기다리며 그들과 함께 달리고 그들의 뒤에서 숨가쁘게 쫓아갔고 그들의 문장과 숨결에 '빙의'되어 텍스트를 유영했다. 그렇게 '남의 인생' 전문가가 되는 사이 청춘은 중년의 초입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목이 말랐다. 세상을 들었다 놨다 하는 분들 곁에서 좋은 책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해갈되지 않는 절절한 목마름. SNS의 따봉 숫자가 채워줄 수 없는 아주 근원적인 목마름. 나라는 존재, 내 존재 안에 있는 이야기들이 아우성쳤다. 장기근속 편집자의 직업병, 절대 아니다. 사회라는 거대한 틀 속에 어렵사리 한 귀퉁이를 얻어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다 그렇다. 내 것을 쉴 새 없이 내주고 끊임없이 남의 것을 들어야 하는 일이란.

그러니 일생에 한 번쯤 제 이름 박힌 책을 쓴다는 것은, 오롯이 내가 삶의 주인공으로 내 목소리를 내어보겠다는 선포이자 결심이다. 묵혀두었던 나의 이야기, 남은 1도 관심 없는 내 인생의 축적물을 스스로 집 지어 가꾸겠다는 초대장이다.

요즘 들어 기성 출판사가 아니더라도 여러 플랫폼을 통해 직접 책을 내는 이들이 많아지는 것은, 또 그런 책들이 사랑받는 것은 사람들의 이러한 '자기 감수성'이 높아진 결과가 아닐까.

안 그래도 너무 많은데, 뭐 저 사람까지 꼭 책을 내야 하나, 사실 책 한번 내보고 싶다고 상담을 요청하는 분들의 원고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세상의 인지도에 비례해 서둘러 '작가감'을 따지며 판단해버렸다. 그러나 그날 강연 무대에서 알았다. 책 파는 이의 굳어진 계산이 아니라 책 쓰고 싶은 이의 절실함이 무엇인지 알아버렸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강퍅한 비즈니스 잣대 이전에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소중한 책이다. 분량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고 구성도 다르다. 책을 쓰는 행위는 결국 자기의 인생을 짓는 행위다. 그러니 일생에 걸쳐 '당신이라는 책'을 정성껏 써야 하고, 기회가 된다면 독자가 단 한 명일지라도 나의 이야기, 나의 주제를 실물 책으로 만들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그동안 책을 위한 책보다는 삶이 책이 되는 경우를 선호했던 것도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다음 행사를 위해 다른 건물로 들어서는데 키 큰 청년이 내 쪽으로 화다닥 다가왔다. 아니, 나의 가슴을 일깨워준 그 '질문의 현인'이 아닌가? 너무도 반가운 마음에 덥석 손이라도 잡고 싶은 찰나.

"강사님, 아까 질문하면 책 주신다고 해서 제일 먼저 손들었는데요. 허허, 제가 책을 못 받아서요. 주소 알려드릴까요?"
그럼 그렇지,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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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잇 사람과 생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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