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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⑦ - 사라진 안 의사 가족의 유해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분노를 짊어지고 있다. 항소하는 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사형 집행을 앞둔 아들에게 전한 말입니다. 안 의사는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혐의로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고,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조마리아 여사는 아들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습니다.

● 독립운동에 헌신한 안중근 의사 가족
왼쪽부터 조마리아, 안정근, 안공근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 안성녀, 안정근, 안공근 등 3남 1녀를 두었습니다. 안 의사 순국 이후 안중근의 장녀 안현생을 명동성당 수녀원의 프랑스인 수녀에게 맡긴 뒤 아들을 따라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습니다. 안정근·공근 형제가 일가족의 생활안정 등을 위해 힘쓰는 동안 조마리아 여사는 위대한 독립운동가의 어머니로 활동했습니다. 1920년 1월 <독립신문>은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해외에 온 이래 거의 쉬는 날이 없이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톡으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여 동포를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하였다"고 적었습니다.

1919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 선생은 안정근에게 임정의 최대 외곽단체인 대한적십자회의 운영을 맡겼습니다. 임정에 가담한 안정근은 북간도 특파원으로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단체를 통합하는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어 러시아어에 능통한 안공근 또한 임정의 러시아 외교특사로 임명되면서 두 형제는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나서게 됐습니다. 안공근은 이후 김구 선생의 최측근으로 활약했습니다.
안공근 선생과 조마리아 여사가 살았던 연립주택가(좌) 윤봉길 의사 (우)
1922년 조마리아 여사도 안중근 의사 부인 김아려 등과 함께 상하이로 이주해 안공근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에서 멀지 않은 연립주택가에 있던 안공근의 집은 한인애국단의 본부이기도 했는데, 이 곳에서 윤봉길, 이봉창 의사 등 한인애국단원들이 태극기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당시 집은 연립주택 일부가 철거되면서 사라진 것으로 최근 확인됐습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
조 여사는 자기보다 세 살 위인 백범 김구의 모친 곽낙원 여사와 동기간처럼 지내면서 당시 상하이 교민 사회에 큰 어른으로 활동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산증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조마리아 여사에 대해 임시정부와 상하이 교민들 모두 존경했고, 훌륭한 분이었다고 어머니(독립운동가 정정화)에게 들었다. 안정근, 공근 선생은 뵌 적은 있다. 안공근 선생은 백범 선생의 바른 팔 역할을 하면서 재정을 많이 맡았다. 윤봉길 의사 거사 이후 중국 측에서 헌금을 많이 했는데 안공근 선생이 맡아서 관리했다."고 회상했습니다.

● 찾지 못하는 안 의사 가족의 유해…어디서 사라졌을까
중국 청나라 말기 상하이 찡안쓰(精安寺) 만국공묘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7월 상하이에서 66세로 별세했습니다. 사인은 위암이었습니다. 장례는 프랑스 조계 천주교당에서 상하이 교민장으로 치러졌습니다. 유해는 '찡안쓰(精安寺) 만국공묘'(Bubbling Bell Cemetery)에 묻혔습니다. 당시 상하이에는 몇 개의 외국인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조 여사가 안장된 곳은 찡안쓰라는 오래된 사찰 옆에 있는 곳입니다. 임시정부의 다른 요인들도 이곳에 묻혔습니다. 1940년대 말에 별세한 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아려 여사와 안정근 선생도 찡안쓰 만국공묘에 안장됐습니다. (안공근 선생은 1939년 충칭에서 행방불명됐습니다.)
송욱 취파용
그런데 1952년 상하이시 민정국은 찡안쓰 묘지 부지를 공원으로 바꾸기로 하고, 묘지들을 다른 곳으로 이장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당시 신문에 묘지 이전을 요청하는 공고를 내고, 만약 이장하지 않으면 정부 방침에 따라 처리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등 임시정부 주요 인사 유해의 경우 상하이 교민 사회에서 나서서 현재의 '쑹칭링 만국공묘'로 이전됐고 지난 1993년에 고국으로 봉환됐습니다. 하지만 조마리아, 김아려, 안정근 등 안 의사 가족의 묘는 이장 과정에서 사라졌습니다.
1950년대 상하이 재개발로 찡안쓰 만국공묘(좌)가 찡안 공원(우)으로 바뀌었다
지난달 말 찾아간 상하이 찡안쓰 만국공묘 자리는 공원으로 완전히 변해 있었습니다. 묘지들을 이전하고 1955년 문을 연 찡안 공원에는 예전 납골당이 변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설이 남아 있을 뿐이었습니다. 곧바로 박은식 선생 등이 안장됐던 '쑹칭링 만국공묘'로 향했습니다. 외국인 묘지는 오른편에 따로 조성돼 있었습니다. 한국으로 봉환된 박은식 선생 등의 묘비는 남아 있었습니다. 무명씨(無名氏)라고 적힌 묘비 하나가 눈길을 끌었지만 안 의사 가족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쑹칭링 만국공묘(좌)와 다창 공동묘지터(우)
상하이 공동묘지 변천사를 다룬 중국 자료를 보면 찡안쓰 공동묘지에서 이장됐던 곳으로 푸둥(浦東) 공동묘지와 다창(大場) 공동묘지 두 곳이 나옵니다. 하지만 푸둥 묘지는 현재 공원으로 변했습니다. 다창 공동묘지는 상하이시 외곽에 있었는데, 옛 묘지 정문만 남아 있었고 묘들이 있었던 곳에는 큰 공장 건물들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만난 상하이 시민은 다창 공동묘지 동쪽에도 외국인 묘지들이 많았다고 회상했습니다. 하지만 1970년 전후 문화대혁명 기간에 묘지들이 상당수 파괴됐고, 일반 사람들의 묘지는 그냥 묻어 버리기도 했다면서, 일부 유명한 중국 인사들의 묘지만 이장됐다고 말했습니다.

● "이장 자료도 발견되지 않아…시간이 없어"

결국 관건은 안 의사 가족의 유해 이장 당시의 서류들입니다. 수소문 끝에 지난해 초부터 안 의사 가족의 유해를 추적해온 쑤즈량(蘇智良) 상하이사범대 교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쑤 교수는 취재진에게 "관련 자료가 있을만한 곳은 상하이시 당안관(기록보관소), 민정국, 쑹칭링 만국공묘 관리처 등 세 곳이다. 그런데 이 세 곳의 자료를 샅샅이 뒤져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고 탄식했습니다. 이어 "1950년대 당시는 중국이 한국과 수교 상황도 아니었고, 일본인들의 묘와 혼동했을 수도 있어 이장할 때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며 "찡안쓰 공동묘지의 무연고 유해들을 해변에 묻었다는 말도 들어봤지만 이 역시 관련 기록이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쑤즈량(蘇智良) 상하이사범대 교수
결국 현재 안 의사 가족의 유해를 찾기 위한 단서는 끊긴 상태입니다. 그래도 옛 자료를 계속 찾는 것 외에 몇 가지 확인할 것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우선, 1950년대 중국과 북한은 수교 상태였던 만큼 북한에 있던 안중근 의사 후손들이 이장해 갔을 가능성입니다. 쑤 교수는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이지만 북한 측에 확인할 필요는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하나는 당시 이장 작업을 담당했거나 참여했던 사람들을 찾는 것입니다. 물론 이미 60여 년이 지난 만큼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 늦으면 작은 가능성도 없어집니다. 안중근 의사와 그 가족의 유해를 찾으려는 정부와 학계의 더 큰 노력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취재파일 - 안중근 유해 찾기 키워드]
▶ ① - '감옥서의 묘지'가 어딘가?
▶ ② - 주목해야 할 '둥산포' 묘지
▶ ③ - 최후 형무소장 '타고지로'의 악행
▶ ④ - "안중근 의사는 침관에 누워 계신다"
▶ ⑤ - "어렵고 힘들다"는 건 국민도 다 압니다
▶ ⑥ - 안중근 기념관은 돌아오는데…
▶ ⑦ - 사라진 안 의사 가족의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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