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봉에서 바라본 망주봉
수많은 시간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며
꽃들이 어떻게 햇살을 받는지
꽃들이 어떻게 어둠을 익히는지 외면한 채
한 곳을 바라보며
고작 버스나 기다렸다는 기억에
목이 멜 것이다.
- 조은, <언젠가는> 中
가끔은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며, 또 오지 않을 전화를 기다리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니었는지 스스로 자문할 때가 있다. 막연한 기다림으로, '하매 올까?', '언젠가는 올 거야!' 목을 한껏 뽑아 올려 눈을 휘둥글리면서, 또는 귀를 쫑긋 세워 어느 작은 기척이라도 보고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그렇게 종종거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다가 나중에서야, 그렇게 목을 매고 부르고 기다리던 것이, 어쩌면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왜 그랬을까', '~~했더라면' 류의 뒤늦은 탄식을 쏟아냈던 적지 않은 경험들이, 어쩌면 나의, 또 우리네의 일상이었음을 이제는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중이라서 그런지도 모를 일이다.
산과 들에 꽃이 피는지도, 처마 끝에서 하염없이 떨어지며 마당을 무심히 헤집던 빗줄기의 긴 선분도, 어느 봄날 연초록의 잎사귀에 매달려 아롱대던 봄 햇살의 화사함도, 무량한 억새밭이 서로 몸을 부대끼며 조근조근 전하던 이야기에도 귀 막은 채로, 그렇게 무한히 아름다운 세상에 눈 감은 채로 무언가에 쫒기 듯 그렇게 살아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기다리던 버스나 전화가 어쩌면 세속적인 성취나 물질에의 욕망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저마다의 특별한 그 무엇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꽃 역시 정작 소중한 것이었지만,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하여 그냥 흘려보냈던 수많은 것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마치 소중했던 인연을 알아보지 못한 어리석음처럼, 또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밖으로 나서 산을 넘어오는 봄과 마주할 수 있는데도 그걸 하지 못하는 게으름처럼 말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네 삶은 이러한 오류와 실수의 반복이 아니었을지...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설사 기다리는 그것이 버스가 아닌 그보다 낫다는 ktx나 비행기일지라도 막연한 기다림보다는 차라리 '지금 이 순간'을 되뇌며 걸어서라도 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꼭 멀리, 정해진 그곳으로만 가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막연한 기다림보다는 차라리 걸어서라도 가는 것이.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더 자주 하게 된다.
그래서 또, 걷는다.
그곳이 어디든, 가다 보면 그곳에도 삶이 있고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인생이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 아니던가. 다행스럽게도 좋은 인연을 만나 동행이라는 행운을 얻는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일이겠으나, 그렇지 않다고 해서 실망할 일도 아닐 것이다. 어느 것이든 그 나름의 의미야 구하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날,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의 선유도(仙遊島)의 둘레길을 걸으러 가는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즐거운 동행이 있었다. 어쩌면 작고, 또 어쩌면 큰 인연이 될 수도 있는 좋은 사람들 말이다.
아!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내가 인솔대장이었다는 것. 아쉬운 점은 원정대의 규모는 더없이 단출했음에도, 규모에 비해 대원들은 각양각색이었고, 저질 체력임에도 지속적인 투덜댐은 남부럽지 않은, 그래서 조금은 거시기한(?) 대원들이 쪼금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고군산군도는 말 그대로 군산 앞바다에 산재해 있는 6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의 무리를 일컫는 말이다. 그 많은 섬들 중 사람이 살고 있는 섬은 16개. 그 섬들 중 중심이 되는 섬이 바로 선유도다. 그리고 선유도의 옛 이름이 군산도(群山島). 이 군산도라는 지명에 지금의 군산시와 고군산이라는 이름의 기원이 숨어 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군산도(선유도)에 금강과 만경강을 따라 내륙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고자 수군부대인 만호영을 설치하였다. 이후 세종 때에 와서 이 수군부대를 육지인 옥구군 북면 진포로 옮기게 되는데, 이때 진포가 군산진(群山鎭)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그 군산진이 바로 현 군산시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군산도는 옛 고(古) 자를 붙여 고군산(古群山)으로 불리어졌으니, 그래서 고군산군도다.
그 섬들이 지금은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섬이지만 섬이 아닌 지역이 되어버린 것이다. 새만금 방조제를 따라 30여분을 달려가면 그곳에 고군산군도가 있다. 그렇게 신시도를 지나고 무녀도를 건너면, 그곳에 선유도(仙遊島)가 있다.
길은 선유도 명사십리(明沙十里) 해수욕장에서부터 시작된다. 명사십리 해수욕장은 이름에 걸맞게 동쪽 해안 약 1㎞, 서쪽 해안 약 2㎞를 합쳐 10리(里)에 이르는 천연 사구(沙丘) 해수욕장이다.
해수욕장에는 제철이 아니었음에도 삼삼오오 가족끼리 또 연인끼리의 정다움이 넘실대고, 정다움은 또 그만큼의 소음을 내어 파도소리와 어우러져 해변을 떠다닌다.
그런데, 바다와 백사장의 밀당을 방해하는 단말마의 비명 소리. 짚라인(Zipline)을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 건너는 그들이 내지르는 소리다. 하지만 바다와 백사장은 '뭔 일 있음?' 그저 무심하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늘 하던 대로 서로를 쓰다듬는 것만이 그들의 할 일인 양, 일체의 관심조차 배제한 시크함(?)으로 그렇게 제 일에만 열중이다.
그들의 할 일과는 별개로, 해수욕장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매력이 있다. 광활한 공간이 주는 해방감이 있고, 동심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이라는 것, 그리고 바다와 물이라는 동경의 대상이 주는 편안함도 그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대봉은 150m 남짓의 낮은 산이지만, 산의 초입부터 오르막인지라 일행들은 밭은 숨을 몰아쉬며 헉헉댄다. 하지만 어쩌랴. 아무리 투덜댄다 한들 길 위에 발을 들인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
그러니 열심히 발을 내딛는 것 말고는 어쩔 도리가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그저 발을 반복적으로 내딛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 그 쉬운 과정(?)이 위안이라면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를 하다 보면 스스로가 느끼는 승부처가 있고, 산을 오르는 그 순간이 그에게는 아마도 승부처였던 모양이다. 비록 투덜대지만 스스로에게야 질 수는 없는 법. 그러니 기를 쓰고 산을 올라야 하는 이유를 제 스스로 찾아낸 것이다. 결국 그의 감투 어린 열정은 그에게 정상정복이라는 감개무량한(?) 기쁨을 누리게 한다.
비록 산은 완연한 봄기운 아래에 있었지만, 꽃들은 봄보다 두어 발짝 뒤처져 따라오는지라, 그들의 흔적은 희미했고 또 옅었다. 그나마도 성미 급한 꽃들이 행인을 반기고 있음만으로도 고마울 따름이다.
산 중턱에서 바라보는 망주봉이 아스라하다. 아마도 산을 오르는 이유 중 하나는 지상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망망한 풍경과 대면하는 즐거움일 것이다. 눈을 돌리면 너른 바다가 아득하고, 또 그 바다는 구획된 공간 안에서 다양한 수산물들을 키우는 건강한 밭이기도 했다. 그 밭에서 무엇이 자라고 있을지…
정상이 머지않았나 보다. 앞서 가던 일행들이 탄성을 내지른다.
<2편에 계속>
* 선유도 선착장~군산시정관광안내소~선유도 해수욕장(명사십리)~선유3구 마을~대봉전망대~몽돌해변~군산시정안내소~초분공분~장자대교~대장도~장자마을~장자대교~군산시정관광안내소~선유도 선착장
* 거리(소요시간) : 14km(5시간) / 문의 : 군산시 관광진흥과 063-454-33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