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 100년 전 판결문을 통해 본 3.1운동 - 또 다른 '유관순들'을 찾아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작성 2019.03.03 08:0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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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마침] 100년 전 판결문을 통해 본 3.1운동 - 또 다른 유관순들을 찾아서
※마부작침 주: [마침]은 마부작침의 길고 긴 종합기사입니다. 스크롤 압박이 심한 장문의 기사지만 링크 건너가지 않고 한 번에 읽고 싶어하는 독자를 위해 준비했습니다. 기사를 끝마친다는 의미도 담았습니다.
마부작침꼭 100년 전. 1919년 3월 1일. 강압적인 일제의 주권 강탈 이후 9년 만에, 한민족은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만세를 외치는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은 당시 인구의 10%에 해당하는 200만 명이 넘는 인원이 참가한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양한 계층과 직업인이 참가했으며, 이후 현 대한민국의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SBS 데이터저널리즘팀 [마부작침]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관련 형사사건의 당시 판결문을 분석했다.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은 국가기록원이 수집·번역해 온라인에 원문과 함께 공개하고 있지만, 그 분량이 방대한데다 일제 당시 법률 용어와 개념이 낯설어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편이다. 또 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면 판결문 자체가 없다. 이를테면 시위 과정에서 일제에 살해됐거나 즉결심판 처분을 받은 경우엔 판결문이 아예 없는 것이다. 3.1운동 참가자 상당수가 누락됐을 수 있다는 의미다. 또 주로 남한 지역 법원의 판결문들이 중심이기 때문에 북한 자료들은 빠졌을 가능성도 크다. 여기에 일제 재판소의 판결인만큼 독립운동에 대해 일제의 불온한 시선과, 일제의 법 체계에 따른 불법-위법 관점에서 기록된 자료라는 점은 이번 분석의 분명한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3.1운동 참가자들의 신상 정보와 참가 일시·장소 같은 사건 정보는 물론, 구체적인 활동상이 상당히 담겨 있다는 점이 [마부작침]이 이번 분석에 뛰어든 이유다.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시각에 따른 자료라는 점을 엄중히 전제한 뒤, 본 분석을 활용한다면,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본다. 3.1운동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한국독립운동사략> 등 우리 측 기록이 역사적 의의가 크다는 점은 자명하다. 하지만, 일제의 기록을 통해서 드러나는 3.1운동의 단면들도 의미가 적지 않다. 3.1운동 판결문에서 담긴, 조선의 숱한 필남필부들의 3.1운동 모습은 어떠했을까. 일제는 그들에게 어떤 죄목을 적용해, 얼마의 형량을 부과했을까. 재판은 얼마나 불공정하게 진행됐을까. [마부작침]의 이번 분석은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한 것이다.

국가기록원은 지난 2014년, 3.1운동 판결문이 포함된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판결문을 통하여 3.1운동의 구체적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며 "일제 측의 기록이지만 3.1운동 연구와 3.1운동사에 중요한 사료로써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마부작침]이 100년 전 '그날의 함성'을 일제의 판결문 1,699개라는 프리즘을 통해 탐색해본다.

● 독립만세를 외친 10대 7백여 명…그들도 유관순처럼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유관순 열사마부작침광무 6년, 메이지 35년. 서기로는 1902년 12월 11일생. 3.1운동 당시 유관순 열사는 17살이었다. 유관순 등 11인에 대한 1919년 6월 30일자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피고 유관순은 경성에 있는 이화학당 생도인데, 대정 8년 3월 1일 경성에서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을 발표하고 단체를 만들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시위운동을 하고 있음을 보고 동월 13일 고향으로 돌아와 동년 4월 1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병천시장의 개시를 이용하여 조선독립시위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고, 자택에서 태극기를 만들어 이를 휴대하고 동일 오후 1시경 시장으로 달려가 그곳에서 수천 명의 군중단체에 참가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이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라 외치고 독립시위운동을 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하였다."

"...병천헌병주재소 헌병은 이를 제지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피고 유관순의 아버지이며 피고 유중무의 형인 유중권도 그 피해자의 한 명이 되자... 피고 유중무, 유관순, 김용이, 조인원, 조병호는 군중에 솔선하여.... 유관순은 동 소장을 붙잡고 흔들고 또 그 가슴에 매달렸고..."

"...만세를 부른 후 자신은 주재소로 가서 보았더니 아버지의 사체가 있었기에 화가 난 나머지 '자신의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정당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를 사용하여 민족을 죽으니냐'고 말하고 헌병이 총을 겨누기에 죽지 않으려고 갑자기 그 가슴에 매달렸다는 내용..."
- 조인원 외 10인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서
※복심법원=2심 법원, 대정 8년=1919년, 경성=지금의 서울

17살 유관순이 3월 1일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독립시위를 조직하고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 조선독립만세를 불렀으며 헌병의 발포에 아버지가 숨지자 이에 항거했던 사실이 일제 재판소의 판결문에도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유관순은 1심에서 징역 5년, 2심에서 3년형을 받았고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 투옥 중에 사망했다.

"모두 20-30명에 달하자 대오를 지어 박차용은 나팔을 불며 선두에 서고, 다른 사람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연호하면서 그를 따라 동교 앞에서 서쪽 무안 가도로 행진하여 북문까지 약 7정의 도로를 열을 지어 걸었다."
-윤차암 외 6인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판결문에서
※정: 일제의 길이 단위로 1정은 약 109.09미터

1919년 5월 5일자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 판결문의 한 대목이다. 앞서 4월 2일 경남 밀양에서는 10대 청소년 수십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를 주도한 것 역시 10대였다. 주동자로 지목된 14살, 15살 소년들은 징역 8월~1년 6월까지 받았다.

유관순 열사나 이들 소년처럼 3.1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10대는 얼마나 많았을까?
마부작침판결문에 나온 피고인 연령을 종합한 결과, 유관순을 포함한 10대는 716명, 전체의 9.0%나 됐다. 피고인 중 가장 비중이 컸던 건 20대로 3,322명(41.7%)였고 그 다음은 30대(26.3%), 40대(13.6%) 순이었다. 3.1운동 참가를 이유로 일제의 법정에 서야 했던 이들만 놓고 볼 때 이렇다는 것이다.

"근래 조선 각 지역에서 애국지사들이 번갈아 일어나서 조선독립을 위하여 죽을힘을 다하여 활동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는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실로 매우 유감이다. 한국 국민인 사람은 마땅히 애국심을 떨쳐서 오는 주천리 장날을 기하여 나를 시작으로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천선재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서

이는 만세시위를 선동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에 처해진 천선재의 1919년 5월 2일 판결문 중 한 대목이다. 당시 천씨의 나이는 78세, 판결문에 나온 3.1운동 피고인 중 최고령이다. 전체 3.1운동 판결문 피고인의 평균 연령은 31.8세로 집계됐다.

유관순 같은 3.1운동 여성참가자를 따로 집계해보고 싶었으나, 판결문에는 피고인 성별 정보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다만 경성지방법원의 '김형기 외 209인' 판결문에는 "신특실-(여), 노예달-(여), 최정숙-(여), 이아수-(여), 유점선-(여), 탁명숙-(여), 김독실-(여)"처럼 성별 표시가 있었다. 참가자 직업 또한 일부 학생들 외에는 언급이 거의 없었다.

● 1919년 3월과 4월에 집중…경기도가 최다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독립운동 관련 형사사건 판결문은 1906년부터 1945년까지 40년 동안 피고인 기준 19,167건(3심제 따라 중복 포함)이다. 판결일로 볼 때 3.1운동이 발생한 1919년이 9,018건(47.0%)으로 가장 많았고 1920년 1,594건(8.3%), 1921년 1,185건(6.2%)이다. 1919~1921년 3년 간 판결문이 11,797건으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의 61.5%를 차지한다. 3.1운동이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는 점은 판결 건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부작침]이 분류한 3.1운동 판결문은 피고인 기준 7,965건(3심제 따라 중복 포함), 판결문만 1,699건이다. 각 피고인별로 판결문에 나오는 '이유' 부분을 분석했다. 일제의 시각으로 보면 범행 시기와 장소를 보기 위해서다. 3.1운동 참가자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행위를 이유로 재판받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마부작침3.1운동 판결문 중 행위의 세부 내역을 확인할 수 있는 건 6,952건이었다. 시작 시점 기준으로 1919년 3월에 4,803건, 4월 1,846건으로 95.6%가 1919년 3, 4월에 몰려 있었다. 3월 초순이 1,723건으로 가장 많았고, 3월 중순 1,489건, 하순엔 1,591건으로 이어지다 4월 초순 1,567건을 기점으로 증가세가 꺾인 것으로 파악됐다.

"대정 9년(1920년) 2월 24일경 경성부 원동에서 동년 3월 1일은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선언 제1주년 기념일에 해당됨으로 동일을 기하여 이 선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불온 인쇄물을 반포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기로 기도하고…"
- 이동욱 외 8인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에서

판결문을 통해 1년 뒤인 1920년 3월 1일에 3.1운동 관련 사건이 26건 발생했다는 게 확인됐다. '기념일인 3월 1일을 기하여 조선독립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선인은 일제히 자유 만세를 고창하자' 등의 내용이 담긴 문건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당시 사람들이 3.1운동 1주년을 기념한 사실도 기록돼 있었다.

장소 확인이 가능한 판결문은 6,796건이었다. 당시 행정구역 기준으로 13개도(강원도, 경기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 황해도) 중에서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2,064건이 발생한 것으로 분석됐다. 다음은 경상북도 1,281건, 전라남도 485건, 강원도 417건, 황해도 414건 순이었다.

지금의 기초자치단체 격인 부·군 단위로 분석했을 때 100건 이상 발생한 지역은 경기도 경성부(822건), 안성군(333건), 수원군(142건), 경상북도 영덕군(271건), 안동군(257건), 의성군(184건), 대구부(152건), 전라남도 광주군(163건), 전라북도 임실군(111건) 등 모두 9곳이었다.

다만, 이 행위 시점과 장소에는 북한 지역에 있던 법원의 판결문이 빠져 있고, 심급별로도 누락된 판결문이 있기 때문에 3.1운동이 전반적으로 이러했다고 말할 순 없다. 혹시 북한에서 보관하고 있는 판결문이 이후에라도 공개된다면 더 정확한 자료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 그들은 왜 시위운동을 계획했나…"손병희 등에 찬동하여"

"피고는... 대정 8년 3월 1일 손병희 외 32명이... 소위 조선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운동을 한다는 것을 듣고 다중을 규합해 조선독립의 시위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여..."

"피고는... 손병희 등이 대정 8년 3월 1일 발표한 조선독립선언의 취지를 찬동하여 길주 부근에서도 이에 성원하여 정치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시위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여..."

"피고는 손병희 등이 조선독립의 선언을 발표하자 그 취지에 찬동하여...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름으로써 여러 지방의 치안을 방해하였다."


상당수 판결문의 이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있다. 손.병.희. 3.1 독립선언에 서명한 민족대표의 맨 앞을 차지한 의암 손병희 선생이다. 판결문에서 '손병희' 이름이 언급된 횟수를 세어보니 722회에 이를 정도였다.(손병희 판결문 포함) 3.1운동을 주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손병희 등 민족대표 48명에 대해 일제 재판소는 무슨 죄로, 어떤 형량을 부과했을까.

마부작침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손병희 외 36명에게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형법상 소요 죄를 적용해 징역 1년~ 3년을 선고했다. 독립선언서를 출판법상 허가받지 않는 문서로 규정하고 선언서 작성과 출판에 관여했는지, 교부·반포했는지에 따라 양형을 달리했다. 학생시위를 주도했던 김원벽과 강기덕은 보안법 위반만으로 징역 2년에 처해졌고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더라도 집회에 참석하거나 출판·배포 등에 관여한 증거가 없던 11명은 무죄가 됐다. 이들 중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라간 건 최린, 최남선, 박희도, 정춘수, 현상윤 5명이다.

● 3.1운동에 '내란죄' 적용하려던 일제

"전 조선인에게 그 평화의 교란을 선동하고 연이어 조헌을 문란하게 하는 불온한 문서를 공표함으로써 각지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개시케 하고, 게다가 해당 독립운동이야말로, 마침내 감화되어 폭동을 하기에 이른 자가 있음을 예지하면서…"
-손병희 외 47인 판결문에서

일제는 3.1운동 참가자들에게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가능한 한 중형을 가해 전국적으로 확산하던 시위를 억제하려 했다. 위에 언급한 '손병희 외 47인'에 대한 판결문을 보면 3.1운동 참가자를 일제가 어떻게 처벌하려 했는지가 잘 드러난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은 이 사건이 내란죄에 해당한다며 최상급심 법원인 고등법원에서 관할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당시 내란죄는 '정부를 전복하거나 방토를 참절하고 기타 조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범죄'로 고등법원 단심으로 판결했다. 주도자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중범죄였다. 현재 대한민국 형법에서도 내란죄에 대해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폭동한 자'를 대상으로 수괴는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하고 있다.

하지만 8개월 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은 내란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해당 사건 관할을 경성지방법원으로 다시 지정했고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보안법과 출판법 등을 적용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마부작침]이 분석한 3.1운동 관련 판결문 1,699개 가운데 일제가 내란죄를 적용하려 했던 판결문은 모두 7건에 피고인 298명이다. 사건만으로 보면 '손병희 등 48인 사건'을 포함해 '경기도 수원군', '경기도 안성군', '평안북도 강계군', '황해도 수안군' 사건 등 모두 5건으로 확인됐다. 고등법원은 이들 사건 모두 내란죄는 아니라며 지방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일제 입장에서는 3.1운동을 내란죄로 강하게 처벌해 진정시키고 싶어도 당시 시위가 독립선언서 들고 다니고 만세를 외치면서 평화적으로 행진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내란죄 적용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 3.1운동 참가자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무엇이었나
마부작침3.1 운동 관련 판결문에 등장하는 죄명은 40개가 넘는다. 죄명 여러 개를 동시에 적용받는 경우도 많았는데, 가장 많은 죄명은 '보안법 위반'이다. 피고인 7,965명(3심제에 따라 중복 포함) 가운데 89.4%, 7,117명이 보안법을 적용 받았다. 형법의 소요죄가 24.6%(1,960명), 출판법 위반이 16.2%(1,291명)로 그 뒤를 이었다. 일제는 내란죄 적용 시도와 별도로 3.1운동 대응을 위한 법도 만들었다.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제령 제7호). 3.1 독립선언 이후 한 달 반이 지난 4월 15일 공포됐다.

보안법은 정치에 관해 불온한 언동을 하거나 타인을 선동하는 행위 등을 규제했는데, 최고 형량이 2년에 불과했다. 반면 '제령 제7호'는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다수 공동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거나 또는 방해하려는 자'로 대상을 규정해 다수에 해당하기는 하나 구체적인 행위와 결과 없이 의도만 있어도 처벌할 수 있도록 했고, 최고 형량도 10년으로 대폭 늘렸다.

소요죄는 다중이 모여 폭행 또는 협박한 행위를 대상으로 했다. 출판법 위반은 허가를 얻지 않고 출판한 저작자와 발행자를 처벌하는 것이다. 단순히 독립만세를 부르거나 시위에 참여하면 보안법 위반, 폭력 시위로 이어졌다면 소요죄,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거나 배포한 행위는 출판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3.1운동 참가자들에겐 대부분 이 세 가지 죄명 가운데 하나 이상이 적용됐다.

앞서 설명한 '제령 제7호'(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을 적용받은 피고인은 343명(4.3%)으로 분석됐다. 이외 살인이나 방화 등 나머지 죄명은 대부분 시위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것들이 많았다.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만으로는 예심에서 고등법원 판결까지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북한 지역에 위치한 법원의 판결문이 빠져 있고 심급별로도 누락된 판결문이 있기 때문이다. 3.1운동 참가자의 죄명과 형량을 살펴보는 데는 조선총독부 법무국이 1920년 1월 작성한 '망동사건처분표' 자료를 참고할 만하다. 1919년 3월 1일부터 12월말까지 각 재판소에서 처리한 사건 가운데 조선총독부에 보고된 것을 정리한 이 자료에 따르면 3.1운동 관련 전체 유죄 판결의 71.7%가 보안법 위반, 21.8%는 소요죄, 출판법과 제령 제7호 위반은 각각 3.5%와 2.1% 비율이었다.
마부작침3.1운동 형사사건 피고인 7,965명(3심제에 따라 중복 포함) 가운데 징역형을 선고 받은 사람은 4,259명이다. 1심 지방법원에서 평균 징역 1년이 선고됐고, 2심 복심법원에서는 평균 1년 4개월, 3심 고등법원에서는 평균 1년 7개월의 형이 선고됐다. 징역형 다음으로는 태형이 많았다. 태형은 십자형 형틀에 눕혀 태로 볼기를 치는 방법으로 16세 이상 60세 이하 남자에게만 하루 1회, 30대까지만 집행하도록 규정돼 있었는데, 3.1운동 관련 피고인들에겐 평균 87대의 태형이 선고된 것으로 분석됐다. 벌금형과 구류, 금고 등이 뒤를 이었다.

최다 적용 죄명인 보안법 위반(7,117명)의 경우 3,903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형량은 평균 1년 1개월이었다. 최고령 피고인인 천선재(당시 78세)는 동네 사람 3명에게 독립만세를 외치자고 권유한 것만으로 징역 1년형을 받았다. 3.1운동 참가를 여러 사람에게 권했다는 이유로, 장날에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는 이유만으로도 1년 넘게 신체의 자유를 박탈당한 것이다. 출판법 위반은 징역 1년 3개월, 소요죄는 1년 11개월이 평균 형량으로 분석됐다.

장 신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2007년 발표한 논문 <삼일운동과 조선총둑부의 사법 대응>에서 "3.1운동 참가자에 대한 형량은 시위의 폭력성 여부, 독립선언서의 제작·반포 유무에 크게 좌우되었다"며 "이 때문에 3.1운동을 기획한 33인을 포함한 48인보다, 위력을 과시한 시위에 참가한 다수의 민중이 더 엄한 처벌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 [마부작침]은 왜 3.1운동 판결문을 집중 분석했나

3.1운동은 당시 전체 인구 2천만 명의 10%가 넘게 참가한 거국적인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조선총독부 집계만 봐도 50만 명이 참여하고 7,500명 넘게 사망한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이었다. 일제 재판소 기록이긴 하나 판결문은 숫자 이상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사료이며, 공개는 돼 있었으나 이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해 좀 더 보기 쉽게 하는 노력은 아주 활발하진 않았다. [마부작침]은 이제까지 3.1운동에 대한 숱한 연구와 보도에 '판결문 분석'이라는 작은 노력 하나를 더 얹고자 했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최근 3.1운동의 기초자료를 종합하고 이를 지리정보시스템과 연동해 제공하는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공개했다.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참여한 이홍구 국사편찬위 사료연구위원은 "소요사건 관계서류나 외무성 기록은 간단하게 1차 보고하는 문건인데 판결문은 해당 시위에 대한 내용을 풍부하게 볼 수 있는 자료"라면서 "일제의 시각에 의해 사건을 규정한 것으로 이번 데이터베이스에도 판결문 자료를 사건개요 정리 등에 많이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도면회 대전대 교수는 "일제가 그래도 두드러진 인물이라 생각해 체포한 사람들이 판결문에 담긴 것이니 전체 참가자 규모를 파악하기에는 좋은 자료가 아니고 고문을 당했다든가 하는 실제 겪었던 고초는 담겨 있지 않다"고 자료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당대에 다른 기록이 부족하기 때문에 판결문은 최후의 근거가 될 수밖에 없고 보훈처도 판결문 없으면 보훈처 심사를 못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기록원이 공개한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은, 1906년부터 1945년까지 형사사건 피고인 19,167명에 대한 것이다. [마부작침]은 판결일 기준 1919년 3월 1일~1920년 12월 31일, 사건 개요에 '만세', '독립' 중 1개 이상을 포함한 판결문을 추려냈다. 또 개별 판결문을 일일이 읽어 3.1운동과 직접 관련 없는 건 제외했다. 그렇게 선정한 '3.1운동 판결문'은 1,699개, 여기에 등장하는 피고인은 5,922명이다.

[좀더갈자]
-조선총독부는 1912년 [조선태형령]을 선포했다. 즉결 심판 대상이 되는 행위에 대해 일본인에게는 구류나 과태료형을 부과하고 조선인에게는 태형을 실시한다는 차별적인 법령이었는데 비용 절약과 신속한 처벌이 법령을 만든 주된 이유였다. 판결문을 보면 3.1운동 피고인 중에도 353명은 태형에 처해졌다.
-정식 재판 외에 헌병경찰에 의한 즉결심판이 있었다. 즉결심판은 경찰서장이나 경찰분서장을 맡은 일본 헌병분대장이 피고인 진술을 듣고 조사한 뒤 즉시 판결하는 방식으로 이뤄져 판결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판결문은 없으나, 참가자 상당수는 즉결심판을 거쳐 처벌받았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1912년부터는 지방법원, 복심법원, 고등법원 3급 3심제가 적용됐다. 그러나 3.1운동 사건 피고인이 2심 결과에 불복해 상고 신청한 건 거의 전부가 기각됐다. 각 판결기관별 평균 형량과 판결 현황은 아래 ①번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판결문에는 해당 사건을 담당했던 조선총독부 소속 검사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판결문에 등장하는 검사들 가운데 최호선(崔浩善)처럼 조선 이름도 있지만 대다수는 일본 이름이었다.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꿨을 가능성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판결기관별 주요 검사들이 담당했던 판결문 수는 아래 ②번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① [마부작침] 판결기관별 판결 / 형량 현황 ☞ http://bit.ly/2SwXfFM
② [마부작침] 판결기관별 주요 검사 담당 판결문수 ☞ http://bit.ly/2IHcjB3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김학휘 기자 (hwi@sbs.co.kr)
안혜민 기자·분석가 (hyeminan@sbs.co.kr)
조애리 디자이너·개발자 (dofl5576@gmail.com)
인턴: 박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