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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적북적] 우리는 서로를 선택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좀도둑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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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78 : 우리는 서로를 선택했다 - 고레에다 히로카즈 <좀도둑 가족>

아마도 한국인들이 가장 꾸준하게 믿고 보는 일본 영화감독이자 21세기 들어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고 있는 감독 중 한 사람,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는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좀도둑가족>은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개봉됐던 고레에다 감독의 최신작이자 스물한 번째 감독작으로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어느 가족>을 본인이 소설화한 작품입니다.

정확히 뭐가 먼저일까 궁금해서 출판사에 문의를 해봤더니, 고레에다 감독은 먼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찍은 뒤에 소설로 정리하는 3단계 방식으로 일한다고 합니다. 감독의 소설 원고 한 장을 샘플 삼아 받아보기도 했는데, 퇴고를 거듭한 흔적이 빽빽한 모습에 단순히 문자로 옮긴다, 는 수준이 아니라, 영화란 매체로 보여준 이야기를 진지하게 글로 전환하고자 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시작부터 느낌이 좋다. 쇼타는 다시 배낭을 매고 이동한다. 오늘 일의 메인은 컵라면이었다. 쇼타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매운 돼지김치라면이 늘어선 진열대 앞에서 멈춰선 뒤 다시 배낭을 발치로 내렸다. 하지만 진열대 사이 좁은 통로에 있는 점원이 도통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는 중년의 베테랑으로, 상당히 무서운 상대였다.

"저 녀석을 혼자 제칠 수 있으면 너도 다 큰 거야"라는 오사무의 말에, 쇼타는 그와의 대결을 오늘 '일'의 클라이맥스로 삼았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틈을 보이지 않았다.

이 이상 장바구니도 없이 매장 안에 머무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너무 눈에 띈다. 슬슬 다른 진열대로 이동해볼까 생각한 찰나, 오사무가 상품을 한가득 담은 바구니를 들고 와 점원과 쇼타 사이에 섰다. 점원의 시야를 가린 오사무는 거기에서 타바스코 소스를 찾기 시작했다.

어시스트가 필요해진 상황이 속상하지만, 덕분에 안심하고 일할 수 있다. 쇼타는 오사무가 좋아하는 카레우동과 자신이 좋아하는 돼지김치라면을 재빨리 배낭 안으로 미끄러뜨려 넣고 출입구로 향했다."


시바타 가는 문자 그대로 '좀도둑 가족'. 좀도둑질을 가업 삼고 '되는 대로 사는 라이프스타일'을 가풍 삼아 아버지에서 아들로 전수 중인 어딘가 얼렁뚱땅한 가족입니다. 어찌 보면 끔찍할 정도로 엉망이고, 어찌 보면 하루하루 그럭저럭 살아가며 서로에게 서로의 어깨를 아~주 조금씩 내주고 있는 이들 앞에 어느 날 한 소녀가 나타납니다.

책 뒤표지에 있는 그들에 대한 소개 문구를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옆자리 파친코 구슬을 천연덕스럽게 훔치는 할머니, 할머니 연금을 축내며 좀도둑질을 일삼는 아버지, 세탁공장에서 손님 옷 주머니를 뒤지는 어머니, 가슴을 흔들며 연애를 파는 어머니의 이복동생, 아버지에게 진지하게 좀도둑질을 배우는 아들, 그리고 어느 겨울날 우연히 소타네 집에 온 작은 소녀."

이 가족은 대체로 대책이 없습니다. 어쩌다 보니 얼렁뚱땅 한 지붕 아래 모여서 어찌 보면 끔찍할 정도로 엉망이고, 어찌 보면 하루하루 그럭저럭 살아지는 각자의 인생을 서로 조금씩 기대고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배려가 조금씩 번지는 순간도 분명 있지만, 그 안에서도 한 푼이라도 서로 뜯어낼 궁리, 이용할 궁리, 그리고 무관심 같은 것들이 쉴 새 없이 오가기도 합니다.

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서로를 선택했다는 사실입니다.

"귀엽게 생겼구만."

하쓰에는 유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뺨에 들러붙은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유리의 머리칼은 염색한 듯 갈색이었다. 그 색 때문인지 더더욱 감정이 사라진 듯 보였다.

이거 왜이랬니?"

양팔에 화상 자국 같은 흉터를 발견하고 하쓰에가 물었다. 아직 그렇게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넘어져서...."

물어보면 늘 그렇게 대답하는지 제 이름을 말할 때보다 분명한 말투였다. 하쓰에는 유리의 셔츠를 걷어보았다. 배에도 붉고 푸른 멍이 많았다. 아키가 얼굴을 찌푸렸다. 쇼타도 고로케를 베어 물면서 빤히 보았다. 하쓰에는 멍에 손을 갖다댔다. 유리가 피했다.

"아프니?"

유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충 상황은 파악했다.

"상처투성이네"라는 하쓰에의 중얼거림을 듣고 오사무는 노부요를 바라보았다.

'어쩔까?'

오사무는 눈으로 그렇게 물었다.

유리는 낯빛이 좋지 않았다. 아니, 표정 자체가 없었다. 감정의 스위치를 꺼버림으로써 처한 사황이나 자신에게 가해지는 일에 필요 이상으로 상처받지 않으려는 방어본능이 틀림없었다. 노부요는 여자아이를 잠깐 본 것만으로 알았다.

노부요는 지금은 짐 보관소로 바뀌어버린 주방 테이블에 앉아, 한 단 높은 곳에서 가족이 우동 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늘 여기에서 혼자, 식사를 한다. 그래서 오늘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자아이의 자그마한 등을 보고 있자니.... 아니, 보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노부요는 내내 눈을 감고 못 본 척했던 것들이 마음 깊숙이에서 떠올랐다."


이 가족은 피학대 아동 유리를 얼떨결에 '주워옵니다.' 사회의 정확한 척도로 말하자면 '유괴'이지만, 이 가족과 유리 본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구조'입니다.

"팔 년쯤 전에 노부요는 닛포리의 술집에서 호스티스로 일했다. 오사무는 그 가게의 단골손님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카운터 안으로 들어오고, 손님의 주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서 도망쳐 혼자 살던 노부요의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 무렵 오사무가 파친코 가게에서 하쓰에를 만났다.

오사무가 옆자리 구슬을 슬쩍하는 하쓰에를 보고 흥미가 발동해, 하쓰에가 사는 지금의 집에 놀러 온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하쓰에는 혼자 살았다. 혼자 키운 아들은 결혼 후 잠시 함께 살기도 했다. 그러나 강성인 며느리와 하쓰에가 잘 어우러지지 못해 일 년을 못 채우고 따로 살게 되었다.

그 후 아들 내외는 도통 연락이 없었다. 직장 문제 때문에 하쿠타로 갔는데 가족들과 그곳에서 계속 산다는 소식만 어렴풋이 들었다.

'오사무'는 아들의 본명이었다. 며느리 이름이 '노부요'이다. 하쓰에의 집에서 두 사람이 들어와 살기로 한 날, 그때부터 이 이름을 쓰기로 결정했다.

린이 린이 아닌 것처럼 노부요는 노부요가 아니며, 오사무도 오사무가 아니다. 아키를 포함해 이 집에 사는 가족은 하나같이 두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실은 유리, 아니, 린 뿐만 아니라, 가족 전원이 묘한 인연이라면 인연, 악연이라면 악연으로 저마다 조금씩 얽혀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해 왔습니다.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좀도둑 가족'의 일원이 되기 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는, 진정한 '시바타 가'의 아들 쇼타는 오사무가 아빠로서 아들 쇼타에게 보이고 있는 본보기대로 새로 생긴 여동생에게 정성스레 이 집안의 가업, 좀도둑질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쇼타가 다가와 주인 할아버지와 린 사이에 서서 시야를 가로막았다. 슈퍼에서 오사무가 해준 어시스트를 이번에는 쇼타가 린에게 해주는 셈이다. 쇼타는 뒤돌아보지 않고 왼손으로 린의 어깨에 신호를 보냈다.

'지금이야.'

린은 눈썰미로 익힌 '의식'을 따라 했다. 입술에 갖다 대야 하는 손등을 실수로 이마에 갖다 대고 말았지만.

린은 제일 좋아하는 노란색 얌체공을 뜯어낸 뒤 두 손으로 꼭 쥐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해냈어!'하고 린이 공을 들어 보이자 쇼타는 '잘했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게를 나섰다. 그 순간 "어이!"하고 주인 할아버지가 불러 세웠다.

쇼타는 온몸이 굳었다.

야마토 할아버지는 천천히 방에서 나온 뒤 계단을 내려와 샌들을 신었다. 그리고 유리 진열장에서 젤리봉 두 개를 성큼 집어 쇼타에게 건넸다.

"받으렴."

쇼타는 말없이 받았다.

"대신...... 동생한테는 시키지 마라."

그러고는 쇼타가 좀도둑질 전에 늘 하는 의식을 해 보였다. 할아버지는 전부 알았던 것이다. 쇼타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밖으로 나왔다. 손에 쥔 젤리봉이 차가웠다.

쇼타는 린이 뒤따라오는 기척을 느꼈다. "동생에게는 시키지 마라." 할아버지의 한마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쇼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가슴 깊은 곳에서 몇 번이고 씁쓸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저는 이 가족의 외부인이자, 이 가족의 어딘가에서 나의 가족을 생각하게 되는 독자로서 동생에게 좀도둑질을 가르치는 일의 부끄러움을 10살 쇼타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슈퍼 할아버지, 야마토의 에피소드가 이 이야기 전체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바타 가는 서로를 선택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가족이죠.

야마토 할아버지는 그 가족 바깥의 이웃 아닌 이웃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대책 없고 무책임한 아버지 오사무를 결코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보진 않지만, 오사무가 쇼타에게 주지 않았고 줄 수 없었던 그 가르침을 이 이웃, 야마토 할아버지가 넌지시 건넸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쇼타는 린 만큼이나, 어쩌면 린보다도 끔찍한 방법으로 자신의 원래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이지만, 이 대책 없는 가족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쇼타를 키웠습니다. 그리고 이웃 야마토 할아버지와의 이 한 순간으로, 아버지에게서 배워야 했을 것들을 배웠습니다.

이것이 쇼타를 좀 더 자라게 합니다. 야마토 할아버지와 쇼타의 이 한 순간은 시바타 가의 붕괴 이후 사회, 제도, 공권력이 시바타 가를 어떻게 처리하는가와도 극명한 대비를 보입니다.

좀도둑 가족 시바타 가에 대해서 외부인으로서 어떤 판단을 내리기 전에, 또는 다 그런 거지 뭐 어쩔 수 없이, 체념해 버리기 전에, 우리가, 사람과 사람들이, 서로에게, 야마토 할아버지가 될 수는 있지 않을까.

그것이 서로를 선택했던 시바타 가의 예정된 붕괴와 시바타 가를 가차 없이 처리하는 사회 사이의 간극에 놓인 유일한 어떤 대안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열 살 쇼타의 이 첫 각성을 비롯한 여러 사건들로, 이야기는 이 뒤부터 조금씩 결말을 향해 달려갑니다. 결말이라기보다는, 이 가족의 앞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완벽으로부터는 한참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서로를 가족으로 선택한 사람들. 이 사람들이 가족으로서 계속 행복하기는 아무래도 힘들어 보이죠.

그리고 그 필연적인 붕괴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계속해서 소소하면서도 커다란 반전들이 일어납니다. 서로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이들이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또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저마다 해나가는 각자의 다른 선택들과 이 가족을 이루기 위해 과거에 했던 여러 선택들이 그 반전을 만듭니다.

"쇼타와 오사무도 아키와 린 쪽으로 합류했다. 네 사람은 손을 잡고 파도에 맞춰 점프를 하며 놀았다.

"내 말이 맞지?"

노부요는 하쓰에를 보지 않은 채 말했다.

자신이 선택한 쪽이 '유대'가 강한 법이다. 노부요는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린을 데려와 키우겠다는 각오가 섰다는 말이로구나 하고 하쓰에는 바로 알아들었다.

"그런 건 길게 가지 않지만......"

이런 행복은 언제까지고 계속되지는 않는다. 하쓰에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지...... 피가 이어지지 않아서 좋은 것도 있지 않아?"

노부요는 아무래도 그렇게 믿고 싶은 듯했다.

혈연이라고는 아무도 없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쓰에는 노부요가 의지하는 희망을 더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뭐, 쓸데없는 기대를 안 해야 말이지......"

피로 이어져 있으면 오히려 그렇게 되는 법. 아득한 옛날에 접었다고 생각한 감정이 사실은 마음 한구석에 가라앉아 있었던 것뿐임을 깨달을 때가 있다.

그것은 자신이 전남편과 그 가족에 대한 질투를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피는 성가실 뿐이다. 하쓰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노부요는 하쓰에의 말에 조금 쓸쓸한 듯 웃었다.

'딸로 여기고 조금은 기대해도 되는데.'

노부요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쓰에는 노부요의 웃는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노부요, 가만히 보니 예쁜 얼굴이네......"

노부요가 깜짝 놀라며 하쓰에를 보았다.

"갑자기 무슨 말이래?"

"얼굴 말이야."

하쓰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가족에 대해 이야기할 때 노부요의 얼굴은 자비로운 보살 같구나. 하쓰에는 생각했다."


이 짧은 행복 한때 이후, 시바타 가의 붕괴와 반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낭독을 들으신 후 직접 책을 찾아 확인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사회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 너, 우리, 이웃이란 무엇인가.

누구나 결국은 한 번쯤 처절하게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묵직한 질문들이 적당한 온도와 유머에 실려 다시 한번 가슴을 두드립니다.

그 어려운 질문들에 답을 내놓는 것은 언제까지나 힘들지 몰라도, 하나 약속드릴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시바타 가에 속했던 모든 인물들이 이 이후에도 부서지지 않고 살아남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거라는 겁니다.

(* 출판사 '비채'의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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