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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사법농단 수사 이후의 법조계 - 법원 편

절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발생했다. 재판의 독립을 취임사로 내걸었던 대법원장에 의해 재판의 독립이 침해된 역설적인 상황은 발생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재판의 독립은 법관의 독립과 동의어기에 재판의 독립을 위해선 법관의 독립은 당연히 담보되어야 했다. 하지만, 재판의 독립을 반복해 강조했던 사법부의 수장이 앞장서 법관의 독립을 해한 것이 검찰 수사로 드러났다.

사법부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였던 사법농단 수사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구속 기소로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런데 많은 판사들은 사법농단 수사 그 이후가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국민들에게 재판에 대한 신뢰와 법관에 대한 권위를 강요했지만, 내부의 치부가 드러나며 더 이상 강요된 신뢰와 권위조차 얻기 힘들어진 사법부를 어떻게 일으켜 세울 것이냐는 거다. 그리고 내부의 갈등을 얼마나 잘 봉합해 판사가 재판에만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느냐, 이것에 사법부의 미래가 달렸다고 공통적으로 이야기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시험대에 올랐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리더십이 이제 진짜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검찰 수사 직전, 수사 기간 동안 노출됐던 법원 내 갈등이 재판 기간 동안 오히려 더 증폭될 수 있다. 법관들에 대한 탄핵과 징계 촉구 이야기도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할 건데, 이 과정에서 법원 내부에서 새로운 논쟁이 시작될 수도 있다. 이런 내부 갈등을 김 대법원장이 극복해 갈 수 있을까"(A 판사)

A 판사는 사법 농단 사태와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검찰에 구속되던 날, 이 판사는 현 대법원장의 리더십을 거론했다. 소위 '왕당파'라고 분류할 수 있기에 A 판사의 얘기는 물론 편향적일 수 있다. 하지만, 현 대법원장을 지지했던 B 판사 역시 김명수 대법원장의 리더십을 문제 삼고 있다는 건 눈여겨 볼만 하다. 다만, A 판사와는 비판의 지점은 다르다.

"사법농단 수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후 대법원을, 법원행정처를 어떻게 개혁할 것이냐는 거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행정처 개편을 위해 외부 사람들의 목소리도 듣겠다고 별도 위원회까지 만들었다. 거기서 행정처 개혁 방안을 만들겠다는 거였다. 중이 제 머리를 못 깎으니 외부인을 통해서 행정처 개혁 방안을 만들겠다는 건데, 결국 나온 방안은 행정처가 만든 것이었다. 위부 위원회가 방안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대법원장이 진짜 개혁 의지가 있는가. 기존 행정 관료 판사들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 아닌가."(B 판사)

● 사법행정권 사용을 자제하며 개혁해야 하는 구조적 한계

김명수 대법원장은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가 촉발된 후 취임했다. 사태의 수습과 그 이후의 사법부 개혁이 김 대법원장의 주요 과제였음은 분명했다. 그런데 어쩌면 김 대법원장은 구조적으로 난감한 상황에서 취임했다. 이를 한 고위 법관은 이렇게 표현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수습을 사법행정권을 제대로 행사해 보지 않았던 사람이 맡게 됐다. 사태 수습과 사법부 개혁을 위해선 사법행정권의 발동이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모순적일 수도 있는 이 상황을 제대로 헤쳐나가지 못할 경우, 김명수 대법원장은 반대 세력과 지지 세력 양쪽으로부터 비판받을 수도 있다."
2017년 9월 취임 당시의 김명수 대법원장
실제 그랬다. 사법부 개혁을 바라며 김 대법원장을 지지했던 판사들은 더딘 속도와 방향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비판적이었던 판사들은 검찰 수사로 사법부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는데 왜 대법원장이 나서서 이를 방어하지 않느냐고 볼멘소리를 높였다. 양측으로부터의 비판. 시작은 법원 자체 특별조사단의 조사 결과 발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명수 대법원장 체제에서 법원의 자체 조사는 2차례 진행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 1차 조사위원회가 '판사 블랙리스트'는 없다고 결론 낸 후 출범한 2차 조사위원회는 다수의 판사 사찰 문건과 재판 개입 정황을 보여주는 문건을 확인했다. 2차 조사위의 결과는 법원 자체 조사가 판사 사찰에서 나아가 재판 개입으로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됐고, 3차 조사위는 재판 개입 정황을 보여주는 다수 문건을 확인했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의 지시로 만들어진 3차 조사위(특별조사단)의 결론은 "뚜렷한 범죄 혐의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목은 김 대법원장의 입으로 쏠렸다. 검찰 수사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 상황에서 대법원장이 수사와 관련된 어떤 입장을 내놓을지가 관건이었다. 대법원장의 결단, 즉 리더십에 관심이 쏠린 것이었다. 김 대법원장은 입장 표명에 앞서 법원 내부 구성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이에 각급 법원에선 판사 회의가 열렸고, 판사들은 서로의 다름을 확인했다. 언론과 판사들은 '법원 내부 갈등'을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6월 15일, 김 대법원장은 수사 협조 입장을 밝혔는데, 5월 25일 특별조사단의 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21일 만이었다.

●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대법원장의 리더십과 그 후

"전임 대법원장 시절 벌어진 일의 수습은 현 대법원장이 맡게 됐다. 무슨 결정을 하든 사법부 역사상 '초유'일 수밖에 없는 만큼, 결정에 앞서 사법부 구성원들의 의견을 묻는 건 필요했다고 본다. 문제는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서 불필요한 잡음과 갈등이 노출되고 증폭된 것에 있다. 만약 의견 청취 과정을 생략하고 대법원장이 빠른 시기에 수사 관련 입장을 냈으면 어땠을까. 수사 협조가 아닌 수사 의뢰를 하면서 추상같은 모습을 보였으면 어떠했을까. 요즘은 대법원장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다."(C 판사)

C 판사는 현 대법원장을 지지한다. 아니, 지지했다. 현재는 대법원장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사법부 개혁이라는 과제를 잘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유보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지만, 현 대법원장의 모습은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검찰 수사 기간 중 진행됐던 행정처 개혁 방안이 좌초되는 걸 목도하며 김 대법원장에게 걸었던 기대를 내려놓았다고 덧붙였다.
양승태 수사결과 발표 (사진=연합뉴스)
수사 협조 입장 표명과 검찰 수사, 그리고 그사이 진행된 사법부의 개혁 방안 마련. 여기에 김 대법원장을 지지하지 않았던 판사들도 비판적인 건 마찬가지다. 검찰이 청구한 압수수색 영장이 법원에서 번번이 기각되면서 제 식구 감싸기 비판이 제기됐을 때, 김 대법원장은 뭘 했느냐는 거다.

"현 대법원장이 수사에 협조하겠다고 했으면 다음 스텝을 생각했어야 하지 않나. 재판 관련 문건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법원행정처 문건은 최대한 협조해 검찰에 제공하면서 불필요한 잡음은 없앴어야 하지 않나." (D 판사)

검찰 수사를 받은 D 판사이기에 걸러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김명수 대법원장의 모습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필요는 있다.

사법농단 사태는 은폐에서 답을 찾을 수 없다.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선 환부를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생긴 원인을 파악해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에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선 잘못은 드러내고 잘못을 개선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런 측면에서 고위 법관들의 의견과 달리 필자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수사 협조 표명을 지지한다. 그것이 없었다면 '재판 개입'이라 반헌법적 행위는 영원히 묻혔을 테고, 그걸 감행했던 사람들은 계속해 법대 위에서 다른 사람을 심판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불필요한 생채기를 줄이기 위해서는 그 과정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는 거다. 그리고 드러난 잘못에 대해서는 명확한 책임 추궁이 필요했다는 거다. 수사 기간 동안 법원행정처 문건 제공과 관련한 법원과 검찰의 줄다리기. 그 싸움의 승자와 패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임의 제출 가능성을 이유로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될 때마다, 여론은 점점 더 검찰 쪽으로 기울어져 갔다.

법원은 영장의 요건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고 항변했지만, 비판은 영장 판사를 넘어 사법부를 향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로 홍역을 앓고 있는 만큼 현 대법원장이 영장 심사의 방향을 지시할 수는 없다. 다만, 임의 제출이 가능한 자료라도 선제적으로 충분히 제공했다면 사법부에 대한 불필요한 비판을 줄일 수 있었을 테다. 수사로 드러난 혐의를 바탕으로 연루된 판사들에 대한 징계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면, 재판에 대한 불신이 확산되는 걸 다소나마 막을 수 있었을 테다.
양승태 구속 이후 대국민 사과 나선 김명수 대법원장
● "전임 대법원장에게 보였던 로열티의 1/10만 보였더라면…"

김명수 대법원장이 검찰 수사 전후로 보인 모습은 사법농단 수사 이후 사법부의 미래도 녹록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사법농단 사태의 근원적 배경이었던 대법원장의 권한, 그리고 대법원장을 보좌하는 법원행정처를 어떻게 개편할지. 과제는 산적해 있다. 개혁안은 지지 세력으로부터도 비판받고 있고, 연루된 판사들의 추가 징계를 미루면서 재판 불신을 방조하고 있다는 비판도 받는다. 결정적 순간, 결정적 문제에 대해 대법원장의 입장이 명확히 보이지 않음으로써 '부작위 리더십'이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기도 하다.

김 대법원장의 고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판사들은 김 대법원장이 결단력 있고, 민주적이고, 수평적이면서 추진력 있는 리더이길 기대한다. 어느 하나를 만족시키는 것도 녹록지 않은데, 메시아를 원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는 개혁이 필요한 곳, 개혁이 필요한 시기에 리더를 맡는 사람의 숙명이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개혁을 해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싫은 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하다 보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된다. 취사선택,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지만 아직 김 대법원장에게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법부의 미래를 대법원장 1명에게만 맡겨둘 수만은 없다. 사법부의 다른 구성원들도 목소리를 내야 하고, 리더십 못지않게 팔로워십도 중요하다. 그런 측면에서 사법농단 수사 이후의 사법부를 위해선 김 대법원장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딱히 비판적이지만도 않은 E 판사 얘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나 박병대 전 대법관에게 보였던 로열티(충성심)의 1/10만 김명수 현 대법원장에게 보였다면 상황이 지금까지 오지는 않았을 테다. 전임 대법원장 시절 인사권에 눌려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고위 법관들이 인사권을 사실상 놓은 지금에 와서야 사안별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건 비겁하지 않나. 어쩌다 운 좋게 대법원장이 됐다는 식으로, 대법원장으로 인정하지도 않는 일부 법관들의 대법원장에 대한 비판은 비판을 가장한 비아냥이나 비난 아닌가" (E 판사)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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