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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룸] 북적북적 169 : 이국종류 '칼의 노래'…[골든아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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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도로 위에 뿌려져 스몄다. 구조구급대가 아무리 빨리 사고 현장으로 달려가도 환자는 살지 못했다…. 구조구급대는 현장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병원을 선택할 것이어서 환자는 때로 가야 할 곳을 두고 가지 말아야 될 곳으로 옮겨졌고, 머물지 말아야 할 곳에서 받지 않아도 되는 검사들을 기다렸다… 그런 식으로 병원과 병원을 전전하다 중증외상센터로 오는 환자들의 이송 시간은 평균 245분, 그 사이에 살 수 있는 환자들이 죽어나갔다."

분명 소설은 아닌데 논픽션 르포도 아니고 보고서나 백서 같기도 하면서 에세이 같은 면도 있고 읽다 보면 다시 소설 [칼의 노래]도 종종 떠오르는 책. 소말리아 해적의 총탄에 사경을 헤매던 삼호주얼리 호 석해균 선장을 살려낸 그 의사,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한국 중증외상 치료의 척박한 현실을 증언해 다시금 화제가 됐던 아주대병원의 이국종 교수가 2002년부터 올해까지, 말 그대로 생사를 넘나드는 수많은 고비에 처해 절망하고 또 절망하고 그러면서도 내 앞의 사람은 살리기 위해 또 나서고… 고군분투해온 그 시간의 기록을 묶어서 책으로 냈습니다. 중증외상환자를 살리는 데 필요한 '골든아워' 60분, 그러나 병원까지 평균 이송시간은 245분, 그 차이만큼 살릴 수 있는 환자를 죽이고 있는 한국 의료의 현실, 그래서 제목도 [골든아워], 두 권으로 나왔습니다.

"나는 우리가 여태껏 해온 일들이 '똥물 속으로 빠져들어 가면서도, 까치발로 서서 손으로는 끝까지 하늘을 가리킨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곧 잠겨버릴 것이고, 누가 무엇을 가리켰는지는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팀이 만든 의무기록은 남는다… 지금으로부터 많은 세월이 지난 뒤, 또 다른 정신 나간 의사가 이 분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시스템을 다시 만들어보고자 마음먹는다면, 우리의 기록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그 기록의 일환이다."

"대한민국에서 '기본'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 중증외상 분야뿐인가? 노동 현장이나 교육 현장이나, 수많은 사안들이 주먹구구식으로 흘러간다. 힘없고 돈 없는 이들에게 '기본'이라는 말은 참으로 사치스러운 단어다. 기준도 저마다 달라 싸움은 곳곳에서 벌어진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인정하기 쉽지 않았다. '왜 우리는 안 되는 것인가?' 하는 답 없는 의문만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오만에 가기로 결정하고 나는 오랜만에 웃었다. 최악의 상황을 맞더라도 마지막으로 좋은 일을 하러 가는 셈 치자며 팀원들을 다독였다. 내 말에 누구도 웃지 못했다. 어쩌면 그들에게 나는 배를 버리려는 선장처럼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환자를 뉘일 병상이 없어 현장은 아비규환인데, 그 다급한 목소리는 세종시 청사 안에 닿지 않았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현장을 지휘한다는 정부의 관료들과, 난감한 얼굴로 나를 찾아와 더 이상의 업무 진행이 불가능함을 전해오는 팀원들 사이에서 무력하기만 했다… 우리는 늘 정책과 형평성이라는 수식어가 만들어내는 사각지대에 고립되어 있었다."

"2년 만에 연구실 냉장고를 들어 엎었다. 1년이 지나도록 처박아둔 반찬들이 냉장고 안에서 곰팡이를 피우며 좁은 연구실 전체를 악취로 물들이고 있었다… 썩은 플라스틱 반찬통에 밴 부패한 반찬의 흔적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깊고 진해서 마치 내 인생에 깊이 물들어버린 피의 흔적 같았다. 색마저 바랜, 변형된 플라스틱 용기들을 모두 버렸다… 어떤 상황에서든 제 그릇에 따라 견디기도 하고 폐기되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견디느냐 견디지 못하느냐는 제 역량에 달렸다. 설거지를 마치고 포개 놓은 그릇들을 바라보며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내 그릇의 크기에 비춰볼 때 너무 많이 와버렸다."


"살릴 수 있다면 죽이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현장에선 절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이국종 교수가 17년간 보아온 바로는 그렇습니다. 우선순위가 있는 것 또한 자연스럽지만 항상 순위에서 밀리는 것 또한 있기 마련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기분이 나아지진 않습니다.

이국종 교수는 환자를 제외한 등장인물 전원을 실명으로 썼습니다. 담담하게 적은 것 같지만 곳곳에 현실에 대한 분노와 분투, 그리고 찾아오는 허무, 그럼에도 다시 생명을 구하러 출동하는 그런 일상… 읽는 내내 이 교수가 당시에 느꼈을, 글을 쓰면서 다시 떠올렸을 그런 감정이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이 책은 뭐라고 분류하기가 어렵습니다. 에세이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르포도 아니고 그 어딘가… '이국종류'라고 할까요. 그게 뭐 중요하냐는 생각도 듭니다. 이 교수의 바람대로 이 책이 후에 중증외상 의료의 현실 개선을 바라는 이들에게 지침이 됐으면, 아니 그전에 실질적인 개선이 조금이라도 더 이뤄졌으면 합니다. 뭐를 할 수 있을까요.

저도 한때 보건복지 분야 취재를 담당한 일이 있어 몇몇 아는 이들이 등장하니 좀 반가웠습니다. 책의 말미에는 마치 소설의 등장인물 소개하듯이 등장했던 이들의 약력과 어떤 일들을 했는지가 간략히 적혀 있습니다. 그래서 더 묘한 느낌이 듭니다.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2002~2018 기록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골든아워], 이미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는데 제가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출판인들이 뽑은 올해의 책이기도 합니다.

*흐름출판으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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