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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성인잡지 아닙니다!"…내년 성인지 예산 '0원'은 어디?

[취재파일] '성인잡지 아닙니다!
"성인잡지 예산이라는 줄 알았잖아…."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내년 성인지 예산을 한 푼도 편성 안 한 중앙부처가 늘었는데, 거기에 대법원도 있더라"는 얘기를 하다가 나온 말입니다. 기자 경력 합하면 반백 년이 훌쩍 넘는 기자들끼리의 대화도 이러한데, 대부분의 시민들에게도 '성인지'라는 개념의 생경함은 꽤 클 듯합니다. 실제로 한 신문사는 지난해 3월 모 정당 토론회 당시 '성인지 예산' 논의에 대해 '성인잡지'로 기사를 잘못 써, 정정보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성인지 예산(性認知 豫算·Gender Sensitive Budget)'은 국가재정이 '성 평등'한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예산을 분배하는 걸 말합니다. 예를 들면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여성 화장실 갯수와 면적을 남성보다 많이 배정하는 의사결정 방식을 생각해 보면 되겠지요. 이해하시기 쉬운 예로 화장실을 말씀드렸지만, '성 평등' 관점에서 정책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담겼다면 성인지 예산사업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재정법을 보면 "정부는 예산의 편성과 집행에 있어서 예산이 남성과 여성에게 미치는 효과를 평가하고 그 결과를 정부의 예산편성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돼 있습니다.
부처별 성인지 예산사업 현황 (출처 : 국회예산정책처)
● "중앙부처 9곳, 내년 성인지 예산 '0원'"

내년 성인지 예산안은 33개 중앙관서에서 제출한 261개 사업, 총 25조 6천283억 원 규모로 편성됐습니다. 41개 중앙관서가 성인지 사업을 편성했던 올해에 비해 8개 부처가 줄었고, 사업 수는 345개에서 84개가 줄었습니다. (정확히는 9개 부처가 줄었고, 1개 부처가 처음으로 성인지 예산을 편성했습니다.) 예산도 올해 33조 8천472억 원에서 8조 원 넘게 줄었습니다. 국회 예산정책처 관계자는 "종료된 사업도 있지만 대부분 사업목적이나 성과관리 재검토를 통해 성인지 목적에 합당하지 않은 사업들을 기획재정부와 여성가족부 등의 논의로 재조정한 결과"라고 말했습니다.

* 2018년도 정부제출 부처별 성인지 예산서 *
[취재파일] '성인잡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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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법원·헌법재판소도 성인지 사업 '제로'

눈여겨볼 것은 성인지 예산 편성이 '제로'인 곳들입니다. 올해는 있었지만 내년에는 성인지 예산사업을 편성하지 않은 부처는 공정거래위원회·관세청·국세청·대법원·법제처·병무청·통계청·해양경찰청·헌법재판소 등 모두 9곳입니다.

이들 부처의 올해 성인지 예산사업을 한번 볼까요? 공정거래위원회는 '소비자 권익증진 지원' 명목으로 1개 사업에 7천300만 원, 관세청은 '여행자 통관 선진화'와 '관세 탈루심사' 등 2개 사업에 29억400만 원, 국세청은 '모범납세자 선정 지원 사업'에 3천500만 원을 편성했습니다. 병무청은 '사회복무요원 교육'에 81억 9천500만 원, 통계청은 '청사 시설관리'에 33억300만 원, 해양경찰청은 '복지역량강화 및 보육시설 관리'에 17억 5천만 원을 책정했습니다.

사법분야에서는 대법원이 국선변호료 지원 명목으로 595억 2천400만 원, 헌법재판소 역시 국선대리인 보수로 1억 1천200만 원을 편성했고, 법제처는 어린이법 제정 사업에 2억 9천200만 원을 책정했습니다.

사업 제목만 봐도 '성 평등'과 크게 관련 없는 각 기관의 기본사업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렇게 편성사업이 '성인지' 목적과 맞지 않아, 해당 사업들은 내년엔 모두 재조정됐습니다. 그러면서 해당 부처들의 성인지 사업은 '제로'가 된 겁니다.
[취재파일] '성인잡지 아닙니다!




[취재파일] '성인잡지 아닙니다!
● 성인지 사업 '0원'…그러면 사업도 '제로'?

대법원이 내년에 '0원'을 편성한 성인지 사업은 그러면 완전히 사라진 걸까요? 위의 두 표를 봐 주십시오. 대법원은 2018년도 성인지 사업으로 '국선변호료 지원'에 595억여 원을 배정했었습니다. 그리고 2019년도엔 600억여 원을 책정했습니다. 사법행정에 꼭 필요한 예산입니다. 다만 이런 필수사업을 그간 목적에 맞지 않는 '성인지 사업'으로 분류해왔던 겁니다.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은 재작년 국정감사에서 엉뚱한 사업을 성인지 사업으로 '둔갑'시켜온 대법원을 비판한 바 있습니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대법원이 국선변호료 지원과 가족등록업무 전산화 작업 같은 "엉뚱한 사업"을 성인지 예산으로 편성했다고 지적했던 건데요. 박 의원은 "대법원이 성평등 실현에 기여하는 사업을 생각해 낼 의지가 없는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런 비판의 결과가 오히려 대법원의 성인지 사업 '제로'로 귀결됐다면, 이걸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사법부의 성인지 예산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담아낼 최후의 보루가 사법부이기 때문일 겁니다. 예산은 정책의 방향성을 보여 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안 그래도 대법관 구성이 '서울대 법대 출신 50대 남성' 중심이라는 이른바 '서오남' 비판을 받고 있는 대법원입니다. 성인지 예산이 '제로'로 나타난 것이 현재 대법원의 방향성과 맞닿아 있는 건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 "성인잡지처럼 '핫'하진 않지만, 그래도 지켜봐야…"

성인잡지처럼 '직관적'이어서 한눈에 들어오면 좋겠지만, 성인지 예산은 용어 자체는 여전히 어렵고 낯설기만 한데요. 현재 국회서 심사 중인 2019년도까지 도입 10년 차에 접어드는 성인지 예산. 개념은 생소하지만 규모는 꽤 큰 편입니다. 정부가 제출한 내년도 성인지 예산은 25조 6천여억 원에 달합니다. 지자체 중 가장 많은 예산을 편성한다는 서울시 내년도 예산안이 35조 7천여억 원이고, 경기도가 24조 3천여억 원입니다. 광역자치단체 한 해 예산에 맞먹습니다. 이렇게 큰돈이 제대로 잘 쓰여지는지 따져봐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신해룡 전 국회예산정책처장은 최근 한국언론진흥재단 강의에서 "예산은 정치과정의 산물이며, 한 나라의 장래는 그 나라의 재정을 보면 알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470조 5천억 원 규모의 '슈퍼 예산안'이 현재 국회에서 심의 중입니다. 국회는 오는 30일까지 심의를 마치고 다음 달 2일까지는 본회의에서 예산안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성인지 예산을 포함해 내년 우리나라의 살림살이는 어떤 방향으로 가게 될지, 앞으로 열흘 정도는 좀 더 눈을 치켜뜨고 여의도를 주시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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