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V] "잔혹한 독재자? 중동의 개혁가?"…두 얼굴의 왕세자

정윤식 기자 jys@sbs.co.kr

작성 2018.10.25 17:56 수정 2018.10.25 18:00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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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원유 수출국 사우디아라비아. 검은 다이아몬드의 축복을 받은 이 부자 나라에는 모든 것이 가능한 남자 '미스터 에브리띵(Mr.Everything)'이 있습니다.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Mohammad bin Salman bin Abdulaziz Al Saud, 1985년생). 미국과 유럽 언론에서 이름의 앞 글자를 따서 'MBS'라고 불리는 사우디 왕위계승 서열 1위. 세계 최연소 국방장관을 거친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회장이자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21세기 사우디 또는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새로운 사우디를 만들겠다는 개혁의 리더.

그렇게 알려졌던 빈 살만 왕세자가 지금 휘청이고 있습니다.

'자말 카슈끄지(Jamal Khashoggi, 1958년생)'라는 이름을 가진 한 언론인의 피살 사건이 시작이었습니다.

■ 반체제 언론인 카슈끄지가 사라진 날…"MBS 천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카슈끄지가 사라진 건 지난 2일이었습니다. 터키인 여자친구와의 결혼 서류를 준비하려고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사우디 총영사관에 들어간 직후였습니다.

카슈끄지가 들어간 뒤 총영사관의 분위기는 뭔가 이상했습니다. 여러 대의 외교 차량이 주변에서 이동하는 모습이 포착됐는데 카슈끄지는 몇 시간 동안이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약혼녀와 새로운 출발을 위해 총영사관으로 들어가던 모습이 카슈끄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20일이 넘도록 흔적조차 발견되지 않는 카슈끄지는 과연 어떻게 된 걸까. 터키 정보부가 제공한 정보에 의해 나온 각국 언론 보도에 따르면 카슈끄지는 공관 안에서 괴한들에 의해 신체를 훼손하는 고문을 당하다 결국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됐다고 합니다.

사우디 총영사는 이 과정에서 괴한들을 말리려다 오히려 위협을 당했으며 이런 모든 상황이 고스란히 담긴 녹음 파일까지 존재한다는 겁니다.

외교 공관 안에서 누가 어떻게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을까요? 실마리는 며칠 뒤 공개된 CCTV에서 나왔습니다. 카슈끄지가 총영사관에 들어가기 3시간 전 검은 양복을 입고 건물에 들어서는 남자가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의 경호원으로 확인된 겁니다.

무트레브라는 이름의 이 경호원은 카슈끄지가 들어간 지 3시간 반 뒤에 왕세자 전용기를 타고 사우디로 돌아갔습니다. 카슈끄지가 피살된 지난 2일 현장의 사우디 요원이 왕세자실로 발신한 전화 통화기록 4건이 확인됐다는 현지 보도도 나왔습니다.

또 다른 CCTV 에서는 이 사건이 계획적인 살인이라는 증거가 추가로 발견됐습니다. 카슈끄지가 총영사관에 들어선지 1시간 반 뒤 CCTV에는 카슈끄지와 똑같은 옷과 안경을 착용한 남자가 나오는 장면이 포착됐습니다.

마치 카슈끄지가 살아서 나온 것처럼 꾸미려고 사우디 측에서 대역까지 동원한 겁니다.

■ "잔혹한 살해의 배경은 사우디 왕세자"…트럼프조차 사우디에 등 돌리다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그동안의 경찰조사 결과를 토대로 카슈끄지가 계획적으로 잔혹하게 살해됐다고 밝혔습니다. 사우디에서 건너온 15명의 암살단이 3팀으로 나눠 살해에 가담했고 사전 답사까지 했다고 말했습니다.

[에르도안 / 터키 대통령 : "지금까지 얻은 정보와 증거들은 카슈끄지가 잔혹하게 살해됐다는 것입니다." 한 언론인의 죽음에 터키 대통령이 직접 나선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사우디의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절대 권력자 빈 살만 왕세자가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배후로 떠오른 겁니다.

[토머스 프리드만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 "주 이스탄불 사우디 총영사관에서의 살인은 사우디 왕세자의 최측근들이 저질렀다는 정황이 명백합니다."]

처음엔 아무 관계 없다고 강변하던 사우디 정부는 결국 지난 20일 카슈끄지가 "살해된 게 맞다"고 뒤늦게 말을 바꿨습니다.

[사우디 국영방송 TV : "검찰은 카슈끄지가 영사관에서 사람들과 말싸움을 벌이다 몸싸움 끝에 숨졌다고 말했습니다."]

사우디 정부가 왕세자의 관련성을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사우디와 빈 살만 왕세자를 보는 국제사회의 시선은 갈수록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사우디의 오랜 군사동맹국으로서 사우디 왕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빈 살만 왕세자를 옹호하던 당초 입장에서 한발 물러섰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 미국 대통령 : "매우 강력한 성명을 발표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우디에 대한 대응도) 매우 가혹해야 할 것입니다. (제재도 고려하고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아낼 것입니다."]

미국 국무부는 카슈끄지 피살 사건에 책임이 있는 사우디 정부 인사 21명에 대해 비자를 취소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카슈끄지 실종 21일 만에 미국이 사우디에 대한 첫 응징에 나선 겁니다.

사우디에 5천억 원 규모의 무기 수출을 승인했던 독일은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무기를 수출하지 않을 것이라 밝혔고 캐나다는 13조 원 규모의 장갑차 판매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 "사우디를 바꿀 개혁의 젊은 기수 vs 두 얼굴을 가진 잔혹한 독재자" 진실은?

이번 사건이 불거지기 전까지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개혁의 기수로 서방의 열렬한 환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경전의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와하비즘'이 지배하는 나라, 사우디아라비아. 그런 사우디에서 여성의 운전을 허용하고 여성이 축구장에서 함께 경기를 관람할 수 있도록 한 것도 빈 살만의 개혁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사우디에서도 언젠가 석유는 고갈된다며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나라, 두바이처럼 외부의 자본과 기술에 개방된 혁신적인 경제를 만들겠다는 게 빈 살만이 표방한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빈 살만이 택한 수단은 강한 권력에 의한 드라이브였습니다.

살만 사우디 국왕의 여섯째 아들이지만 뛰어난 업무능력과 강한 권력의지로 31살에 왕위계승 서열 1위로 올라선 그는 권력을 굳히기 위해 경쟁자들을 쓸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부패를 척결하겠다며 다른 왕자와 기업인, 관료 등 사우디 최상층부 인사를 대거 체포했습니다.

세계적인 투자가 알 왈리드를 포함해 체포된 왕자만 무려 11명. 지식인을 비롯한 반체제 인사 30명을 붙잡아 가뒀습니다.

숨진 카슈끄지는 잦은 탄압에도 빈 살만 왕세자의 행보를 비판하던 언론인이었습니다.

천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나라를 제 손으로 바꿔보려는 개혁의 젊은 기수인가. 아니면 비판과 도전을 용납하지 않는 잔혹한 독재 군주인가.

전 세계가 빈 살만 왕세자의 두 얼굴 앞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가운데 국제정세도 혼돈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유럽 주요국들과 미국이 사우디에 대한 전방위 압박에 나선 가운데 사우디가 석유 공급을 줄여 서방 국가들의 목을 조를 거라는 우려도 나옵니다.

이번 사건의 진상이 어떻게 드러날까요? 세계 정치와 경제에는 어떤 여파를 미칠까요?

세계의 눈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쏠리고 있습니다.

※ SBS 뉴스의 오디오 특화 콘텐츠 '보이스'가 '보이스 V'라는 이름의 비디오 콘텐츠로 새롭게 단장해 여러분들을 찾아갑니다. 당신이 원하는 뉴스, 당신을 위한 비디오 콘텐츠. SBS 보이스 V.보이스 카슈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