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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가을 '타는' 남자 - 태백 함백산(咸白山) 종주기(記) ①

[라이프] 가을 '타는' 남자 - 태백 함백산(咸白山) 종주기(記) ①
▲ 함백산의 능선이 아스라하다.
 
이 가을에 한 번이라도
타오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하다.
내내 가슴이 시퍼런 이는 불행하다.

(중략)

사람도 그와 같아서
무작정 불을 지르고 볼 일이다.

이원규의 시, <단풍의 이유> 中
나무들은 제 속의 뜨거움을 토해내며 붉게, 또는 노랗게,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 단풍, 나무들의 가슴앓이

산은 검붉게 타오르는 화염 덩어리였다.

10월로 접어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때에 산은, 산에 사는 나무는 제 가야 할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그 시간들이 지척에서 손짓하고 있음을 외면할 수 없었나 보다. 그 시간들이 못내 아쉬운 그들이 제 속의 뜨거움을 토해내며 붉게, 또는 노랗게, 가슴앓이를 하고 있었다.

뜨거웠던 지난 여름날의 그 창창했던 푸르름이 시나브로 떠난 자리마다에는 여태껏 속으로 속으로만 쟁여놓았던 뜨거운 열정이 숲 곳곳에 번져나고 있었다. 지난 봄, 두견새가 산을 돌며 피울음을 울었듯, 소슬한 찬바람이 산을 타고 내려오는 기척에 숲은, 나무는 그 이파리 가득 그들의 마지막 설움을 피를 토하듯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행·불행이야 나중의 일… 우선은 맘껏 타오르고 볼 일이다.
시인의 말이 아니어도, 그들 역시 이 가슴 미어지는 가을날에 어찌 타오르지 않을 수가 있을 것인가. 행·불행이야 나중의 일… 우선은 맘껏 타오르고 볼 일이다. 그렇게 가을을 노래하는, 또 가을이 아픈 나무들의 반란은 강원도 태백, 만항재의 골골마다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열망은 뜨거웠고, 그래서 더 붉고, 샛노랬다.

누구에게나 마지막은 언제나 비장한 것임을 그들인들 어찌 모를까.

어쩌면 단풍이라는 현상은 그렇게 가야 할 때를 아는 어느 곧은 생명이, 거역할 수 없는 순리 앞에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자꾸만 뒤돌아보며 흘리는 눈물이며, 또 제 스스로를 불태우는 다비식(茶毘式)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그 붉음이 더욱 장엄하다.
산들은 산꼭대기에서부터 검붉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 만항재에서 만난 가을

10월의 어느 날, 강원도의 산들은 산꼭대기에서부터 그렇게 검붉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태백의 함백산 가는 길이 그러했다.

'크고 밝은 뫼'란 뜻으로 대박산(大朴山)으로 불리기도 했던 함백산(1572.9m)은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중 하나인 정암사(淨巖寺)를 품고 있으며, 지하에는 무진장의 석탄을 간직한 남한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적멸보궁 : 석가모니의 진신(眞身)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암자나 사찰을 이르는 말)
길은 낙엽들에 자리를 내어준 지 이미 오래인 듯하다.
함백산 가는 길은 만항(晩項)재에서 시작된다.

만항재는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와 태백시 사이에 있는 고개로, 그 높이가 무려 1,330m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만항재는 야생화 공원으로도 유명하다.
가는 계절을, 이 단풍을 어이할꼬.
하지만 10월의 만항재는 어느새 짙은 가을로 접어드는 기색인지라, 야생화보다는 단풍이 먼저 아는 체를 한다. 낙엽들은 바스락대며 발밑에서 스러지고, 길 위에 선 등산객들은 처연하게 물들어 가는 단풍에 탄성이 절로 난다. 이 단풍을 어이할꼬. 행락객들은 단풍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아직 산행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만항재에 찾아온 가을은 쉬이 등산객의 발걸음을 놓아주질 않는다. 단풍에 취한 무리의 그들은 인솔 대장의 성화에 못 이겨 그제서야 아쉬운 듯 발길을 돌린다.
단풍과 억새가 콜라보로 가을 연주를 한다.
붉게 물드는 단풍 아래로 억새의 은빛 날개에서 빛들이 부서지고, 또 흩어져 간다. 계절은 이미 만추(晩秋)였음을… 풍경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고도 남는다. 도시를 떠나온 지 서너 시간 만의 변화다.

그래도 만항재는 야생화들의 낙원임을 숨길 수는 없었나보다. 양지바른 곳곳에 부용이며, 용담, 구절초, 마타리 등의 꽃들이 단풍에 치여 제 빛을 잃어가면서도 굳이 아는 체를 한다.
함백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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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이며, 용담, 구절초, 마타리 등의 꽃들이 단풍에 치여 제 빛을 잃어가면서도 굳이 아는 체를 한다.
● 산 너머의 산, 그 산 너머의 산

만항재에서 함백산 정상까지는 3km 남짓이지만, 태백선수촌 삼거리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1km만 열심히 걸으면 어느새 정상이다. 표고상으로는 고작 250m만 올라가면 정상에 닿을 수 있는 것이다.

길을 걸은 지 오래지 않아 두 갈래의 길은 둘레길과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을 두고 선택을 강요한다. 정상까지 얼마? 애걔, 1km? 당근 정상이지… 비록 정상이건만 그저 우스워 보일 따름이다. 사람들은 둘레길을 걷고자 했던 처음의 마음을 잊고 기꺼이 정상으로 향한다. 한편으론 이 정도의 수고스러움으로 정상을 밟아도 되는 건지…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산을 오르는 그들은 어쩌면 생애 가장 긴 1km와 만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코웃음 치진 마시라.

정상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드는 순간, 산은 곧바로 30도 남짓의 오르막을 강요한다. 무수히 이어진 돌계단들의 행렬 앞에서 그까이꺼~를 외치던 일부 등산객들은 이내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고, 발걸음은 자꾸만 더뎌진다. 그들은 어쩌면 생애에서 가장 긴 1km와 만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영상 10도 남짓의 서늘한 날씨에 추위를 걱정하였던 나 역시 한 바가지의 땀을 쏟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품삯으로 정상에 오를 수만 있다면야, 그야말로 헐값이다. 그러니 오르막을 탓할 일도 아니다. 어여 가자~
이 정도의 품삯으로 정상에 오를 수만 있다면야, 그야말로 헐값이다.
그렇게 힘겹게 오른 어느 산 중턱에서 바라보는 첩첩의 산들… 어느 산을 오르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건만 중첩된 산맥들의 웅장한 질주는 언제나 가슴을 뛰게 한다. 그 속에서 수억 년의 세월이 함축된 엉킴과 풀림을 만나고, 끝없이 이어진 저 너머의 근원을 향해 질주하는 억세고 질기면서 고집까지 센 어느 근육질 전사(戰士)의 모습을 발견한다.
멀리에 보이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지금 바로 이 순간의 한걸음에 집중한다.
산 너머의 산, 그 산 너머의 산은 산에 가는 이들이 가야할 길이자, 미지의 꿈이다. 어쩌면 정작 중요한 것은 산맥이라는 파노라마의 끝이 아니라, 오를 대상으로서의 다음, 바로 눈앞의 산이 존재한다는 사실일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멀리서 바라본 저 산맥의 끝이 지금 이 순간 바로 앞의 땅을 딛고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임에는 틀림이 없다. 멀리에 보이는 그곳으로 가기 위해, 지금 바로 이 순간의 한걸음에 집중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고작 1km를 걸어도 어디를 걷느냐에 따라 감상의 크기가 달라지나 보다. 주저리주저리 많은 말들이 길 위로 쏟아진다.
멀리 풍력발전기가 산등성이를 따라 긴 행렬을 이루고 있다.
● 정상에 오르다

정상이 가까워졌음인지 멀리 풍력발전기가 산등성이를 따라 긴 행렬을 이룬다. 함백산에도 바람의 길목을 막아선 풍력발전기는 바람과 어우러져 그렇게 멀리서 맴을 돌고, 또 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더니… 드디어 정상.

하지만 살짝 민망해지는 정상 정복이기도 하다. 1,572.9m의 산을 이렇게 어물쩍 오르는 건 왠지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다소 건방진(?)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상은 정상이다.
정상에는 만추의 추억을 쌓으러 온 등산객들로 분주하다.
함백산 정상의 표지석
정상으로 가는 길목이 분주하다. 만추의 추억을 쌓으러 온 등산객이 많은 탓이다. 게다가 인증샷을 남기려는 사람들은 좁은 정상 표지석 앞을 가득 메우고, 줄을 서 차례를 기다린다. 결국 남는 것은 사진뿐이던가. 추억을 간직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저 묵묵히 기다릴 뿐이다. 찍는 이와 찍히는 이는 짝을 맞춰 서로를 찾고, 또 찍느라 분주하다.
정상에 서면 가슴이 열리면서 거친 세상살이의 여정에서 묻었던 숱한 티끌들이 훌훌 털어지는 느낌이다.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산들의 파노라마는 그야말로 아득하다. 가슴이 열리면서 거친 세상살이의 여정에서 묻었던 숱한 티끌들이 훌훌 털어지는 느낌이다. 이 맛, 이 기분 때문에 기어이 정상에 오르나 보다. 굳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논할 계제는 아니지만, 이 광활한 자연의 품 안에서, 이 자연을 벗 삼아 내가 누군가와 더불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산에 온 이유로는 충분해 보인다.
가는 계절을 어쩌지 못하는 여린 생명의 안쓰러운 아쉬움의 흔적이 짙다.
산 정상아래 바위틈에서 쑥부쟁이가 애처롭다. 가는 계절을 어쩌지 못하는 여린 생명의 안쓰러운 아쉬움의 흔적이 짙다.

설화에 따르면, 쑥부쟁이는 늙은 부모를 모시며 살던 어느 심성 고운 처자의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 처자의 아비가 불쟁이(대장장이)였고, 그 부모를 쑥을 캐서 봉양하였다 해서 쑥부쟁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왔으니, 그는 위험에 빠진 사냥꾼이었다. 처자의 도움으로 살아난 사냥꾼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 약조하고 떠났지만 감감무소식이라... 나중에야 처자는 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슬픔을 안은 채 산에 올라 쑥을 캐던 쑥부쟁이는 그만 절벽에서 떨어져 죽고 만다. 그러자 그녀가 죽은 자리에서 꽃이 피어났는데, 사람들은 쑥부쟁이의 영혼이라 여겨 그녀의 이름을 꽃에 붙여주었다고 한다.
매정한 계절은 제 갈 길을 간다. 한 치의 뒤돌아봄 없이 그렇게 시간은 가고 또 간다.
그런 사연을 품은 꽃이니 떠나가는 계절에 대한 아쉬움이야 오죽할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정한 계절은 제 갈 길을 간다. 한 치의 뒤돌아봄 없이 그렇게 시간은 가고 또 간다. 다행인 것은 그 시간의 윤회 속에 다음의 봄도 들어 있음이다. 쑥부쟁이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열리고, 눈이 맑아진다.
길은 또 다시 어디론가로 향한다.

정상이 목적지가 아니었음을… 정상은 그저 시작일 뿐이라고… 앞으로 가야할 길에 비하면 새발에 피일뿐이라고 눈앞에 펼쳐진 광활한 능선이 재촉을 한다.

정상을 넘어서자, 끝없이 이어지는 능선의 아우라.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열리고, 눈이 맑아진다. 절대고독의 평화를 담은 아득한 평원이었다. 새삼 함백산을 찾은 이유는 정상을 밟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이 능선을 걷기 위해 왔던 것임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순간, 이 아스라한 풍경과 마주하기 위해 내가 이곳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좌우로 백두대간의 산맥을 거느리고 걷는 경험을 어느 때에 또 할 것인가.
계속 머무를 수는 없다. 떠날 수 있어야 다시 만날 수도 있는 법이다.
문득, 왠지 그대로 멈춰 서 바라보기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숲속에서는 숲이 보이지 않듯, 능선의 어느 틈으로 스며드는 순간 능선을 잃을 것 같은 마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는 가야 한다. 대단한 환호의 순간마저도 다 지나는 과정일 뿐… 계속 머무를 수는 없는 법. 떠날 수 있어야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산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주목(朱木).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살다

이제 길은 두문동재로 향한다. 6km 남짓의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을 풍경 앞에서 저절로 뜨거워진 가슴을 식히며 저 능선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능선길로 접어들자, 주목 군락지가 코앞이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는 주목(朱木). 그냥 오래 사는 나무이겠거니 했었다. 천년을 넘게 산다는 게 말이 되냐면서... 그런데, 내가 어리석었다. 놀라지 마시라~ 함백산을 마주보고 있는 두위봉(1,466m)에서 서식하는 주목(천연기념물 제433호)는 수령이 최대 1,400년에 이른다고 한다. 무려 14세기라는 어마어마한 세월을 살아낸 것이다.
한 철을 사는 꽃과 천 년을 사는 주목이 어울려 살고 있다.
1,400년이면 고구려, 백제, 신라 간의 그 쟁투의 시간 언저리에 태어나 삼국통일의 슬픈(?)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황산벌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해간 계백 장군의 소식을 바람결에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두위봉의 주목은 강산이 수십 번 바뀌고, 스쳐간 인걸이 얼마인지 셀 수조차 없음에도, 아직도 강건한 모습으로 산의 터줏대감으로 존재한다니, 그 불로장생의 능력이 새삼 감탄스러울 뿐이다.

새삼 무슨 삶의 애착이나 미련이 그리도 많아 이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내야 했던 것인지 그 까닭이 궁금해진다. 그저 주목의 숙명일 뿐인 것인가.
주목이라는 이름이 그러하듯, 나무의 안과 밖은 모두 붉다.
어쩌면 주목에게 주어진 그 긴 세월을 견디기 위해서는, 유치환 시인이 노래했던 <바위>처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 속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忘却)하고"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긴 세월의 풍파를 어찌 견딜 것이며, 그 기억들은 또 어찌할 것인가.
주목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주목들은 그들의 삶 속에서 결코 서두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빛과 물을 탐하여 주변의 나무들과 경쟁하지 않으며, 그랬기에 더 빨리, 더 크게 자라야 한다는 욕심 또한 덜하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주어진 대로 천 년을 산다. 그들은 욕심내지 않아도 어느 순간 그들만이 세상에 남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그랬기에 천 년이라는 세월을 살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문득 굳이 오래 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도 주목이 살아가는 방식인 비록 느릴지라도 서두르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니 욕심낼 일도 없는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 전하는 작은 울림은 있어 보인다.
주목 한 그루, 잿빛의 앙상한 가지로만 남아 하늘을 우러른다.
함백산의 몇몇 주목들은 살아서 천 년이 아닌, 죽어서 천 년을 사는지 이름에도 새겨진 붉음의 외피를 벗고 잿빛의 앙상한 가지로만 남아 하늘을 우러른다. 그 고혹적인 자태에 사람들은 환호를 보내지만, 주목은 그저 태연하다. 그를 스쳐간 이가 얼마이며, 소소한 삶의 여정이야 얼마나 가소로울 것인가. 천 년의 세월을 살면서 배운 처세술일 것이다.

사람들아! 어여~ 사진 찍고 가던 길 가시라~
관목 숲에 불덩이 하나가 숨어 있다.
늙은 주목과 작별을 고하던 찰나, 멀지 않은 관목 숲에 불덩이 하나가 숨어 있다. 금방이라도 온산을 불태울 것처럼 붉다. 붉어서 조심스럽고 또 위험해 보인다. 혹여 저 불덩이가 보는 이의 마음에까지 옮겨 붙는다면… 아서라! 그 뒷감당을 어이할꼬~

불덩이가 혹여 제 가슴에 옮겨 붙을까 서둘러 길을 재촉하는 이들을 오래된 주목이 물끄러미 굽어본다. 아마도 놀라 꽁무니를 빼는 그들이 우스워 보일 것이다.

어여 가자~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길을 재촉하는 이들을 오래된 주목이 물끄러미 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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