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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공권력 남용의 피해자…무죄 받고 날벼락

법원
지난해 성범죄 혐의로 기소됐던 A 씨는 올해 무죄가 최종 확정됐습니다. 억울함을 호소한 끝에 1심에서 무죄, 검찰이 항소했지만 2심에서도 역시 무죄가 선고됐고 최종 확정된 겁니다.

2심 재판이 끝날 때 판사는 무죄 부분을 관보와 신문에 공시하는 것을 원하냐고 물었습니다. 무죄를 선고 받기는 했지만, 혐의가 혐의이고, 괜히 무죄라고 공시를 해도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재판을 받았다는 걸 모르는 지인들도 있을 텐데, 괜히 공시를 하게 되면 재판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A씨는 무죄 부분 공시를 거부했습니다.

● 무죄 판결 공시 거부, 그런데 혐의와 집 주소까지 공개…왜?

그런데 최근 A 씨의 구체적 혐의와 상세한 집 주소까지 공개됐습니다. 실명은 물론이고 생년월일까지 공개돼 동명이인이라고 발을 뺄 수도 없게 됐습니다. 무죄 판결을 받고도 재판 받은 사실 자체가 꺼림칙해서 무죄 공시도 거부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이유는 A 씨가 신청해 법원이 받아들였던 형사보상에 있었습니다.

형사보상제도는 무죄가 확정된 사람이 신청할 경우, 법원의 결정에 따라 재판 과정에서 든 교통비와 변호사 비용 등을 국가가 보전해 주는 제도입니다. 수사기관, 즉 국가의 공권력 남용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을 다소나마 구제해 주기 위한 제도입니다. A 씨는 무죄 확정 이후 형사보상을 신청했고, 지난달 형사 보상이 결정됐습니다.

문제는 이 형사보상 결정문이 최근 누구나 볼 수 있는 관보에 게재된 겁니다. 관보에는 A 씨가 받았던 구체적인 혐의, A 씨의 이름과 집 주소, 본적과 직업까지 구체적으로 기재됐습니다. 형사 보상의 근거가 됐던 무죄 판결의 시기와 내용도 간단히 명시가 되어 있지만, 무죄와 관련된 혐의가 뭔지, 형사 보상을 받은 사람이 누군지에 더 눈길이 가기 마련입니다.
법원 관보
● "관보 게재의 구체적 기준 없어"…무죄 받은 사람에 2차 피해

형사 보상 결정문은 무죄 판결 공시와 달리 당사자의 동의와 관계없이 모두 관보에 게재됩니다. 그럼 결정문 그대로를 관보에 게재하는 것이 원칙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형사보상법은 보상 결정을 관보에 게재하도록 하고 있지만, 결정의 '요지'를 게재해야 한다고 하고 있을 뿐입니다.

관보 게재를 요청한 법원, 그 법원들의 사법 행정을 총괄하는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주민번호 전체를 노출을 금지하는 것 말고는 개인 정보를 어느 범위까지 공개할 지 구체적인 기준은 없다"고 답했습니다. 결국 각급 법원의 재량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SBS는 올해 게재된 개인에 대한 형사 보상 결정문 전체를 관보에서 살펴봤습니다. 그랬더니 올해 형사보상 결정문을 관보에 게재한 곳은 38곳, 이 중 상세 집 주소를 공개하지 않은 곳은 제주지방법원 1곳뿐이었습니다. 나머지 법원들은 아파트 동 호수까지 공개하고, 본적지, 구체적인 직업까지 기재한 곳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지방법원 뿐 아니라 대법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3세미만 미성년자 강제추행', '준강간', '주거침입 절도' 등 구체적인 혐의가 결정문 상단, 가장 눈에 잘 띠는 곳에 게재된 경우도 상당수였습니다. 무죄 선고가 확정이 됐다고 하더라도, '저런 혐의를 검찰이 괜히 기소했겠나', '뭔가 문제가 있으니까 재판을 받았겠지' 하는 식의 오해와 편견을 부를 수 있는 내용들이 관보에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개인정보가 노출되는 사람이 한 해 5천 명이 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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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권의 최후 보루에 의해 노출된 개인 정보…2번 우는 국민

다시 A 씨의 이야기입니다. A 씨는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혹시나 주변 사람들, 특히나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가까운 지인들이 관보를 보고 자신을 오해할까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공권력의 남용으로 기소됐다가 오랜 시간 재판을 받고, 무죄 결정에 안도할 틈도 없이 법원의 부주의한 형사 결정문 게재로 또 다른 피해를 입지는 않을 지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SBS 취재가 시작되자 관보를 운영하는 행정안전부는 법원이 개인 정보를 최소화해 게재를 요청하도록 법원행정처와 협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향후 관보 게재를 요청하는 기관이 개인 정보 노출을 최소화해 게재 요청을 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방향으로 관보 관련 대통령령도 개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현재가 아닌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숨기고 싶은 내용이 상세한 개인 정보와 함께 게재된 사람들의 피해를 막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더욱이 이런 피해가 인건 보후의 최후 보루라고 할 사법부, 유죄가 확정된 사람의 판결문 공개도 개인 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소극적인 법원에 의해 이뤄진 현실이 법 개정 전이라도 조속히 바로 잡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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