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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일본 극우 야스쿠니 신사가 일왕을 비판한 이유는?

최호원 기자 bestiger@sbs.co.kr

작성 2018.10.12 09:24 수정 2018.10.15 17:0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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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월드리포트] 일본 극우 야스쿠니 신사가 일왕을 비판한 이유는?
지난 10일 일본 야스쿠니 신사의 총책임자인 고호리 쿠니오(小堀邦夫) 구우지(宮司)가 퇴임을 발표했습니다. 구우지는 우리 사찰의 주지스님과 비슷한 자리인데, 이번 퇴임은 지난 3월 취임 이후 불과 7개월 만입니다. 극우세력의 본산인 야스쿠니 신사의 구우지가 갑작스레 사임한 이유는 한 주간지의 기사 때문입니다.
사임한 야스쿠니 신사의 구우지(宮司) 고호리 쿠니오주간 포스트는 최신호에서 고호리 쿠니오 구우지가 지난 6월 신사 내 회의에서 현 아키히토 일왕을 비판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고호리 구우지는 신사 회의실에서 열린 '제1회 교학연구위원회 정례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간지 녹음 파일 확보)
주간 포스트 '일왕이 야스쿠니를 무너뜨리려 한다"각하가 열심히 (태평양전쟁 전몰자를 위한) 위령의 여행을 가면 갈수록 야스쿠니 신사는 (국민으로부터) 멀어지는 거예요. 그런 생각이 안 들어요? 어디든 위령 여행을 가면 거기엔 혼령이 없어요. 유골은 있어도…이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논의해 결론을 발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에요. 지금 각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무너뜨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알겠어요?"

일본 보수세력의 성지인 야스쿠니 신사의 총책임자가 자신이 받들어야 할 일왕을 오히려 정면 비판한 겁니다. 고호리 구우지는 특히 일왕의 '위령의 여행'에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아키히토 일왕은 1992년 중국, 1993년 오키나와, 2005년 사이판, 2016년 팔라우, 2017년 필리핀 등 태평양전쟁의 격전지들은 두루 방문해왔습니다. 방문지에선 숨진 일본군뿐 아니라 현지 전몰자에 대해서도 위령의 뜻을 나타냈죠.
2016년 필리핀 전몰자 묘역에서 고개 숙인 아키히토 일왕 부부반면 야스쿠니 신사는 1989년 즉위 후 단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왕의 이런 태도에 큰 위기감을 느낀 겁니다. '야스쿠니를 무너뜨리려고 한다'는 발언까지 나온 이유입니다. 일왕은 일본 국민들에게 정신적 아버지와 같습니다. 그런 일왕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경우 야스쿠니는 애국의 성지라는 위치를 잃어버리고 결국 주말마다 극우 세력들만 모여드는 장소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말마다 야스쿠니 신사 앞에 모이는 극우세력야스쿠니의 더 큰 걱정은 내년 5월 아키히토 일왕의 뒤를 이을 나루히토 왕세자도 야스쿠니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고호리 구우지는 말을 이어갑니다.

"앞으로 반년 간 알게 될 거예요. 남은 재임 기간 중 결국 한 번도 참배를 오지 않으시면 지금 왕세자가 즉위 후 참배할 수 있을까요? 새롭게 왕비가 되는 분은 신사나 신도를 아주 싫어하는데 과연 올까요?"

아키히토 일왕이 끝내 재임 중 참배하지 않을 경우 반전주의자로 알려진 아들 나루히토 왕세자도 즉위 후 참배하지 않을 것이고 게다가 왕세자비까지 야스쿠니를 싫어한다는 설명입니다.
1988년 당시 히로히토 전 일왕아키히토 일왕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요? 일본 왕실 취재전문 기자들은 주간 포스트에 "아버지인 히로히토 전 일왕이 1978년 A급 전범 합사 이후 참배하지 않았던 뜻을 이어받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습니다. 히로히토 전 일왕은 바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죠. 히로히토 전 일왕은 1975년 11월까지 야스쿠니에 참배를 했지만, 78년 A급 전범 합사 이후엔 발길을 끊었습니다.

히로히토 전 일왕이 A급 전범 합사에 반대했다는 사실은 A급 전범 합사로 극우 세력을 결집해온 야스쿠니 신사에겐 치명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2006년 전 궁내청 장관 도미타 토모히코의 메모가 공개되면서 알려졌습니다. 도미타는 1988년 4월 히로히토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내용의 일명 '도미타 메모'를 남겼습니다.
일본 TV에 촬영된 1988년 작성 도미타 메모"A급 전범이 합사 됐는데, 거기엔 마쓰오카, 시라토리 등(태평양전쟁 지지 외무장관들)도 포함돼 있어. 전에 쓰쿠바 구우지(宮司)는 신중하게 처리해 (합사 하지 않았는데)…마쓰다이라 현재 구우지는 평화를 사랑했던 자기 아버지의 생각을 모르고 (합사를 강행) 그래서 난 그 후 참배하지 않아. 그것이 내 마음이야."

메모를 보면 히로히토는 자신과 A급 전범을 분리해서 생각하면서 스스로는 전쟁 책임이 없다고 여긴 듯합니다. 그는 태평양전쟁 과정을 구술한 '쇼와천황 독백록'에서도 "군부와 의회가 전쟁을 일으켰고 나는 입헌군주로서 재가만 했을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죠.

하여튼 '일왕이 A급 전범 합사를 반대했다'는 도미타 메모는 그동안 야스쿠니 내부에선 금기어였습니다. 주간 포스트는 이 도미타 메모가 6월 야스쿠니 회의에서도 거론됐다고 전했습니다. 내년 야스쿠니 설립 150주년을 언급하며 한 직원이 "정말 그게(도미타 메모) 히로히토 일왕의 발언이었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대로 시대가 50년, 100년 경과해 가면서 어떤 식으로 국민들을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고호리 구우지는 "설교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고 무시했다고 주간 포스트는 전했습니다.
1943년 히로히토 일왕의 야스쿠니 신사 방문 사진위 사진에서 보듯이 과거부터 일왕들과 야스쿠니 신사의 관계는 각별했습니다. 태평양 전쟁 당시 히로히토 일왕은 야스쿠니를 통해 '묻지마 애국주의'를 확산시켰고 야스쿠니는 일왕을 통해 '신사 이상의 위상'을 확보했습니다. 패전 이후에도 야스쿠니 신사는 여전히 일왕을 내세우며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히로히토 전 일왕은 1978년 A급 전범 합사 이후 참배를 중단했다고 하지만, 1959년 B.C급 전범이 합사된 후에도 꾸준히 야스쿠니를 찾았습니다. 즉 참배를 통해 전범을 '범죄자'가 아닌 '애국자'로 인정해버린 겁니다. B.C급 전범 합사에 눈감아놓고 A급 전범 합사는 반대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후 43년간 일왕들이 야스쿠니 참배를 중단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A급 전범 합사에 대한 일왕가의 반대 정서는 야스쿠니 측에 적지 않은 부담입니다. 일본 국민들이 야스쿠니 신사의 문제점을 인식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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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막고 있는 것이 바로 일본 정부, 즉 아베 총리입니다. 아베 총리는 A급 전범 용의자로 체포됐던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손자이죠. 아베 총리는 현 아키히토 일왕과 나루히토 왕세자의 한국 방문에도 반대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위령의 여행'을 반대하는 야스쿠니 신사와 똑같습니다. 이번 야스쿠니 구우지(宮司)의 사임 사건은 시작일 뿐입니다. '역사를 직시하고 다시는 전쟁을 하지 말자'는 현 일왕가의 뜻이 야스쿠니 신사와 아베 정권의 방해를 넘어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될지는 지켜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