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치안본부의 수장이었던 강민창 전 내무부 치안본부장이 지난 6일,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지난해 12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이 개봉하면서 배우 우현이 연기한 강 전 치안본부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는데요. 박종철 군의 사망 이후 강 전 치안본부장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오늘 리포트+에서는 당시 치안본부 사람들의 행적을 짚어봤습니다.
■ "'탁' 치니 '억' 하고" 어처구니없는 발표…6월 항쟁으로 이어진 '박종철 열사 사건'
전두환 정권 말기였던 1987년 1월, 경찰은 박종철 군을 불법 체포해 서울 용산구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고 갔습니다. 경찰은 박종철 군에게 선배이자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 씨의 소재를 말하라며 그를 고문했고, 1월 14일 박종철 군은 심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게 됩니다.
경찰은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에서 의사 오연상 씨를 불렀지만, 오 씨가 도착했을 때 이미 박종철 군은 숨진 뒤였습니다. 다급해진 경찰은 사망 하루 만에 "심문하던 중 박종철 군이 갑자기 '억' 하고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사망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건 개요를 발표하며 고문치사를 은폐하려 했습니다.
쪽지를 전해 받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는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이 내용을 폭로했습니다. 1987년 6월 9일, 민주화를 외치던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 군이 전경이 쏜 최루탄에 사망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흐름은 더욱 거세졌고 6.10 민주항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 "남영동은 악명 높은 곳이었다"…치안본부 '그때 그 사람들' 어떻게 살고 있나?
지난해 영화 '1987'이 흥행하면서 은폐된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데 기여했던 의인들에 대한 인터뷰가 쏟아져 나왔지만, 치안본부 사람들의 행적은 잘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문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이후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박종철 군이 사망한 직후, 논란이 계속되자 치안본부는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가 지나친 공명심 때문에 멋대로 벌인 일"이라며 두 사람이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고문을 했다고 '꼬리 자르기'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지난 2월, SBS 취재진은 강 경사를 어렵게 만날 수 있었는데요. 강 씨는 "역사의 죄인이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강 씨는 "그때 이후 내 인생이 송두리째 없어졌고 그 뒤로 국기에 대한 경례도 안 했다"고 후회스러운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재판 끝에 유 경정과 박 경정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당시 남영동 대공분실의 1인자로 불렸던 박 치안감은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박 치안감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고 이후 '고문기술자' 이근안 씨의 은신과 도피를 지원했다가, 2000년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뒤 정확한 행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며칠 전 생을 마감한 당시 강민창 치안본부장 역시 책임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박종철 군의 시신을 부검한 황적준 박사의 일기장이 공개되면서, 강 치안본부장은 직무유기와 직권남용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습니다. 당시 황 박사의 일기장에는 부검 전후로 경찰의 회유와 협박 내용 등이 메모 형식으로 상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93년 대법원은 강 치안본부장에게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확정했습니다.
당시 처벌받진 않았지만, 은둔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SBS 취재진은 올해 초 남영동 대공분실의 수사단장이었던 전 모 씨를 만났는데요. 박 치안감 바로 밑에서 일했던 전 씨는 남영동을 "악명 높은 곳"이라고 기억하며 자신은 물고문과 전기고문에 반대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사건이 터진 직후에는 치안본부에 사표를 낸 뒤 죄책감에 시골에 내려와 자중하며 살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기획·구성: 송욱, 장아람 / 디자인: 감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