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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D 부장은 왜 사무실에 몰래 들어가 휴일근로를 했나?

'근로시간 단축' 법개정 후 남은 숙제 ② 직장인들 목소리를 들어보니…

[취재파일] D 부장은 왜 사무실에 몰래 들어가 휴일근로를 했나?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장과 공공기관에서는 당장 다음달부터 ‘주 최대 52시간 근무’가 시행됩니다. 근로자 50인 이상 299인 이하 사업장은 2020년 1월부터, 근로자 5인 이상 49인 이하 사업장은 2021년 7월부터 역시 근로시간 단축의 적용을 받습니다.

시간외근로가 일상화된 기업은 그동안의 업무 방식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기업 내에서 그동안 관행적으로 이뤄졌던 불필요한 업무는 없는지, 생산성을 높이려는 노력보다 당장 근무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외부 수요에 대응해왔던 건 아닌지 되돌아보고,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해 나갈 방법을 찾아야 할 겁니다.

이런 과정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기에, 삼성전자나 LG전자, SK하이닉스 등 일부 여력이 있는 대기업들은 근로기준법이 국회를 통과하기 전인 올 초부터 ‘주 최대 52시간 근무’를 시범 실시해왔습니다. 근로시간 단축이 의무화되는 7월 이전에 시범 실시를 통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나 돌발변수를 확인하고 개선점을 찾기 위한 나름의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취재 과정에서 만난 직장인들 사이에선 아직 커다란 변화의 움직임을 찾기 어렵습니다. 근로시간 단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이기도 하지만, ‘공짜 야근이 진짜 사라질까?’하는 의구심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가 더 큽니다. 막연한 불안이나 불신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직장인들의 목소리를 들어봤습니다.

제조업체 사무직 직원 A씨는 포괄임금제 적용을 받는 근로자였습니다. 그는 비관적인 전망의 근거로 ‘회사에서 야근을 줄이라고는 하지만 정작 일의 양은 줄여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루 평균 2~3시간씩 야근을 하고 있다는 그는 취재진에게 “업무의 양과 효율성이 변함 없는 상태에서 최대 52시간 근무제가 도입될 경우 결국 회사 밖으로 일을 싸가지고 나가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IT기업에 근무하는 직원 B씨의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현재도 회사가 몇 시간 야근을 하라고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야근을 하지 않으면 일정을 맞출 수 없는 만큼의 업무가 주어지니 야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자신이 일주일 걸린다고 얘기하면 회사는 닷새 안에 끝내라, 닷새 안에 끝내겠다고 하면 사흘 안에 끝내라, 이런 식으로 업무가 주어지고, 상사나 고객의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무능력한 직원이 되는 현실에서 “야근을 줄이라”는 회사의 말이 진짜 근무시간을 줄이라는 뜻인지 회사 안에서만 야근하지 말라는 뜻인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근로시간 단축의 실효성을 의심하는 직장인 가운데는 우리의 기업문화가 ‘여전’하다는 걸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스타트업 기업에 다니는 사무직 직원 C씨는 ‘얼마나 사생활을 희생해서 업무를 했는가’를 조직 기여도의 지표로 삼는 경향이 여전하다고 강조합니다. 하다 못해 회식 자리만 빠져도 뒷말이 나오는데, ‘이번 주는 52시간을 채웠으니 더는 일 못 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직장인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겁니다.

"법은 멀고 상사는 가깝다"며 우스개 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상사의 말을 잘 듣고 장시간 회사에 머무는 걸 더 높이 평가하는 기업 문화 속에서 수십 년간 직장생활을 해온 상사들이 법이 바뀌었다고 하루 아침에 기존의 시각을 바꿀 수 있겠느냐는 의문을 표시하는 겁니다.

‘주 최대 52시간 근무’를 한발 앞서 실시해본 대기업의 사정도 궁금합니다. 사무직인 대기업 부장 D씨는 사내에서 ‘근무시간 단축’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전반적인 분위기는 나아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던 일이 줄어든 건 아니기 때문에 일이 밀릴 때는 오히려 스트레스가 높아진다고 말합니다.

얼마 전에는 주말에 나가 일을 해야 할 상황이 생겼는데, 해당 주에 이미 52시간의 근로시간 한도를 모두 채운 상태여서 회사 출입구에서 경비담당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직원카드를 찍지 않은 채 사무실에 들어가 일을 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물론 그날 일을 하라는 상사의 지시는 없었지만, 다음 월요일 제대로 된 보고를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겁니다.

직장생활을 해보신 분들은 아마 이들의 이야기가 이해가 가실 겁니다. 그래서 직장인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이 실제로 보장되려면 법률 개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법 개정은 시작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정부의 강한 법 집행 의지와 함께 기업 문화 개선을 위한 노력이 병행되어야만 합니다.

일부에선 국내 기업의 생산성이 여전히 낮은데 근로시간만 줄이면 결국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질 거라는 우려를 쏟아 놓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근로시간 단축이야말로 한국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 기업들은 산출을 늘리는 수단으로 직원들의 시간을 더 많이 투입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택해 왔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들고 때로는 공짜였기 때문에 기업으로선 당연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근로시간 단축은 이제 생산성을 높이지 않는 기업에 큰 비용을 요구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기업이 생산성 향상에 눈을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 겁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원하는 기업에 변화하는 환경은 혁신의 동력이 될 겁니다. 제가 만나본 직장인들의 우려가 현실이 되고 현재의 부작용이 고착화 하지 않도록, 기업의 각성과 개개인이 노력이 필요한 때입니다. '저녁이 있는 삶’이 우리 사회에 자리잡기 위해선 아직은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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