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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필리핀 에너지부 장관이 고리 2호기를 찾은 까닭은?

[취재파일] 필리핀 에너지부 장관이 고리 2호기를 찾은 까닭은?
투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2박 3일 공식 방한 일정이 끝난 다음 날인 지난 6일 공식 수행원이었던 알폰소 쿠시(Alfonso Cusi) 필리핀 에너지부 장관과 도나토 마르코스(Donato Marcos) 차관 등 에너지부 대표단은 공식 방한 일정이 끝난 뒤 필리핀으로 돌아가지 않고 고리 2호기를 찾았다.

2018년 6월 현재 국내에서 가동 중인 원전은 총 24기다. 지난해(2017) 6월 19일 고리 1호기가 영구 정지되면서 고리 2호기는 월성 1호기와 함께 국내에서 가동 중인 원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상업용 원전이다. 지난 1983년 7월 상업 운전을 시작한 고리 2호기는 올해까지 꼬박 35년 동안 가동해오고 있다. 설계수명이 40년으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오는 2023년까지 운영될 예정이다.

고리 2호기는 1978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업운전을 시작해 지난해 퇴장한 고리 1호기와 함께 국내 경제발전을 묵묵히 뒷받침했을 뿐 아니라 원자력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로 국내 원자력 발전의 시초인 고리 1호기, 2호기는 미국 웨스팅하우스사가 건설했지만 이후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 우리나라는 원전을 수출하는 원전 최강국 가운데 하나가 됐다. 원자로 기술도 발전을 거듭해 고리원전이 초창기 1세대라면 지금은 3세대 원전이 상업용 발전을 하고 있고 4세대(APR+,2020년대), 5세대(2030년대) 원자로까지 내다보고 있다.
고리원전 2호기 견학하는 필리핀 에너지부 대표단
그런데 왜 하필이면 필리핀 에너지부 장관 일행은 35년이나 지난 구형 1세대 원전인 고리 2호기를 찾았을까?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필리핀은 현재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타이완 등 주변 다른 나라와 달리 원전이 하나도 없다. 당연히 원전을 가동해 본 경험도 없다. 하지만 필리핀이 처음부터 원전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서쪽으로 145km 떨어진 곳, 루손섬 남부에 바탄(Bataan)이라는 곳이 있다. 이 바탄에 필리핀 처음이자 마지막 원자력발전소가 있다. 바탄 원전이다.

바탄 원전은 지난 1976년 건설공사가 착수됐다. 원자로형은 가압경수로형으로 핵심인 원자로와 터빈은 미국의 웨스팅하우스가 공급했다. 고리 2호기와 동일한 것이다. 당시 미국 웨스팅하우스가 우리나라와 필리핀 두 곳에 같은 원전을 동시에 건설한 것이다. 바탄 원전은 고리 2호기와 쌍둥이 원전인 셈이다.
고리원전 2호기 견학하는 필리핀 에너지부 대표단
하지만 우리나라와 달리 필리핀 바탄 원전 건설은 순조롭지 못했다. 1979년 3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스리마일 섬 원자력발전소에서 노심이 녹아내리는 사고(TMI 사고, Three Mile Island accident)가 발생하자 그해 6월 공사가 중단됐다. 이후 1981년 1월에 공사가 재개돼 1984년 고온기능시험까지 끝냈지만 1986년 2월 원전건설을 결정했던 마르코스(Marcos) 대통령이 축출되고 그해 4월에는 체르노빌 원전사고까지 발생하면서 공정률 98%, 완공을 바로 코앞에 두고 바탄 원전 사업은 그대로 멈춰 서고 말았다. 전력 생산은커녕 투자한 23억 달러(약 2조5천억 원)가 정부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돼 버렸다.

당시 혁명으로 마르코스 정권을 축출한 아키노 정부는 체르노빌 사고 후 마르코스 정부와 원전 관련 업계의 결탁, 각종 비리 의심과 안전성을 이유로 바탄 원전을 허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탄 원전은 1986년 공사가 중단된 이후 현재까지 30년 이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로 남아 있다.

하지만 2000년 이후 바탄 원전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는 것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한전과 한수원은 지난 2009년 바탄 원전 재개 관련 사업타당성 조사를 한 바 있다. 두테르테 정부는 바탄 원전 재개에 더욱 적극적인 모양새다. 필리핀 정부는 최근 전력난을 겪으면서 2016년 10월에는 원전도입 전담조직(NEPIO)를 설립했다. 필리핀 에너지부는 지난 4월 중장기 에너지정책을 수립해 대통령궁에 제출했다. 물론 중장기 에너지 정책에는 바탄 원전 공사 재개가 하나의 방안으로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리원전 2호기 견학하는 필리핀 에너지부 대표단 (사진=한국수력원자력 제공)
35년째 가동 중인 고리 2호기는 앞으로 5년 뒤면 설계수명 40년을 꽉 채우게 된다. 처음 공사를 시작한 지 이미 40년이 넘게 흐른 바탄 원전, 공사를 마무리하고 가동을 해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까? 필리핀 에너지부 대표단이 지난 6일 다른 2세대, 3세대 원전을 뒤로하고 굳이 1세대인 고리 2호기를 찾은 이유다. 바탄 원전을 가동해도 문제가 없을지 가동 중인 쌍둥이 형을 직접 보러 온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쌍둥이 원전이라고 해도 고리 2호기와 바탄 원전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고리 2호기는 전력을 생산해온 지난 35년 동안 말 그대로 닦고 조이고 기름칠을 했다. 나름대로 괜찮다고는 하지만 바탄 원전은 모든 설비가 고리 2호기만큼 관리가 잘 됐다고 보기 어렵다. 또 설비도 설비지만 40년 운전 경력의 한국과는 달리 필리핀은 아직 원전을 가동해 본 경험이 없다.

한전과 한수원은 바탄 원전 마무리 작업과 가동을 비롯해 필리핀 원전 건설 사업에 적극 참여하겠다는 입장이다. 필리핀 원전 가동과 건설에 한국 기업의 참여는 당장 필리핀의 전력난 완화뿐 아니라 한국 기업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시대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탈원전이 추진되고 있다. 탈원전이 추진될수록 탈원전에 대한 공방은 가열되고 있다. 정부는 그러나 국내 원전의 감축 계획과는 별개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원전 수출은 적극 지원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탈원전과 원전수출, 한편에서는 자가당착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리핀 에너지부 장관을 비롯한 대표단의 고리원전 2호기 방문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가 참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혼란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사진·자료협조=한국수력원자력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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