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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권위'는 강요될 수 없다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작성 2018.06.04 16:39 수정 2018.07.06 09:2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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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권위는 강요될 수 없다
"모두 일어서 주시기 바랍니다."

법정에 판사가 들어올 때, 법원 경위의 말에 따라 법정 내 모든 사람은 기립한다. 그리고 판사가 자리에 앉아야만 자리에 앉을 수 있다. 이 같은 규칙이 법에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런 관례에 대해 한 판사는 "판사에 대한 예의, 재판부에 대한 권위의 표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렇게 한다고 권위가 세워지겠냐"는 물음에는 멋쩍게 웃었다.

지난 25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특별조사단(이하 특별조사단)'의 발표 이후, 법원 내에서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다. "수사를 통해서라도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는 의견부터 "외부 기관의 수사를 받으면 사법부의 권위가 훼손된다"는 의견까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권위'라는게 무엇인가. 무조건 믿고 따르라고 하면 권위를 세울 수 있을까.

● 훼손된 외관의 공정성…합리적 의심

'일정한 분야에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위신'

'권위'에 대한 사전적 정의다. '권위'는 상대방의 자발성에 기초하고 있다는 의미다. 자발성이 기초하지 않고, '무조건 믿고 따르라', '우리의 영향력을 인정하라'는 것은 권위적인 행태일 뿐이다.

소위 '재판 거래' 의혹 대상 판결은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미 결론이 난 판결 중 박근혜 정부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취사선택한 결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추정일 뿐이다. 특별조사단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다는 정황은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지만, 이는 강제 조사권이 없는 상태에서 발표한 제한된 조사 결과일 뿐이다.

'재판 거래' 의혹과 관련해서 행정처 문건에 등장한 내용이 실제로 이후 판결 결과와 동일하게 결론이 난 것도 있다. 오비이락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행정처의 입김이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다. 외관의 공정성이 훼손된 상황에서 결과와 과정이 공정했을지를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재판 거래' 의혹 못지않게 중요한 이슈인 '판사 사찰' 이슈도 특별조사단의 결과가 명쾌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다. 특별조사단은 뒷조사를 한 것은 확인하면서도 인사상 불이익을 준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정작 조사에서 뒷조사 대상이 된 사람들에 대한 당사자 조사는 없었다.

인사상 불이익은 연수 누락 등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불이익뿐 아니라, 정성 평가인 법원장의 인사 평정 등 외관상 잘 드러나지 않는 미시적인 불이익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이런 미시적 폭력은 폭력의 당사자가 가장 잘 알 테지만, 당사자 조사는 없었다. 뒷조사 대상에 대한 인사상 불이익이 정말 없었는지도 검증할 필요가 있는 이유다.

● 철저한 수사…일선 판사들의 '권위' 회복을 위해서라도

수사를 하게 된다면, 수사를 맡을 '검찰'을 믿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법원 내 우려가 있다. 검찰의 '전과(前科)'를 생각하면 합리적인 우려다. 별건 수사 등을 통해 이번 특별조사단이 조사한 범위를 넘어선 다른 부분으로까지 수사를 확대할 수도 있다. 법원과의 오래된 앙금 때문에, 그리고 향후 법원과의 관계 설정에서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꽃놀이패'로 활용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우려를 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독립된 법관의 양심에 따라 판단될 것이라는 사법부 신뢰의 요체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서는 수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철저한 수사가 불가피해졌다. 철저한 수사 이후 특별조사단의 결과처럼 '재판거래' 정황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뒷조사 판사들에 대한 '인사상 불이익'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난다면 사법부의 권위는 다시 바로 설 수 있다. 의혹 제거를 위해선 투명성이 생명이고, 혼란스러울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건, 판도라의 상자를 연 '추가조사위'와 '특별조사단' 때문이 아니다. 판도라의 상자에 숱한 절망적 의혹들을 집어넣은 건 과거 법원행정처 소수의 판사들이다. 특별조사단 등은 의혹이 제기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상자를 열었을 뿐이다. 그래서다. 대부분의 판사들이 선택받았던 소수에 의해 피해를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철저한 조사는 불가피해 보인다.

많은 판사들은 저녁과 주말까지 반납하며 재판에 몰두하고 있다. 자신이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닌지 주변에 묻기도 하고, 법전을 뒤지고, 판례를 검색한다. 혹시나 재판에 영향을 받을까 싶어 재판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어 보이면 평소 친했던 지인과 연락을 끊기도 한다. 지금껏 만난 대부분의 판사들은 그랬다.

그랬던 판사들이 지금 가장 힘들어 한다. 자신들 역시 판결하는 데 있어 외부의 입김을 받은 것은 아닌지 의심받는 현실, '재판 거래' 의혹 속에 도매 급으로 '재판의 독립'을 비판받는 현재의 상황 때문이다. '좋은 재판'을 기치로 내건 김명수 대법원장은 '좋은 재판'에 대부분의 판사들이 매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떤 결론을 내릴까. 선택지는 몇 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