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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 "저를 세뇌했어요"…'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들 폭로 어려운 이유는?

[리포트+] "저를 세뇌했어요"…'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들 폭로 어려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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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일기 형식
이처럼 어린 대상자와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심리적으로 지배한 뒤 성폭력을 가하는 것을 '그루밍(Grooming)'이라고 합니다. 그루밍은 원래 동물의 털을 손질하거나 몸단장하는 것을 의미하는데요. 피해자에게 친절을 베풀어 길들인 뒤 돌변하는 이른바, '길들이기식 성범죄'를 뜻하는 용어로도 사용됩니다.

그루밍은 성폭력 상담사례 10건 가운데 4건을 차지할 만큼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 '리포트+'에서는 그루밍의 실태를 짚어보고 이 같은 범죄가 반복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알아봤습니다.

■ "원래 다 이렇게 하는 거야"…성폭력 정당화하는 그루밍 범죄

한 상담기관이 지난 3년 동안 미성년 성폭력 피해자의 상담사례를 분석했는데요. 그 결과 접수된 성폭력 사례 78건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34건이 그루밍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루밍 피해 당시 연령은 14~16살이 44.1%로 가장 많았고 11~13살은 14.7%, 6~10살도 14.7%로 저연령 피해자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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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성폭력 피해자 상담사례 분석
출처: 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
그루밍 유형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김 씨의 사례처럼 교사가 학교나 학원 등에서 친밀감을 유지하면서 신뢰를 쌓거나, 친족이 "원래 다들 이렇게 한다"며 어린 시절부터 성폭력을 자연스러운 행위로 정당화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피해자들이 그루밍에 저항하지 못합니다.

7년 전 중학생 시절 선생님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털어놓은 김 씨 역시 당시에는 피해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이라는 거역할 수 없는 위계뿐 아니라, 장시간에 걸쳐 서서히 심리적 지배 상태에 놓이면서 저항할 수 없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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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모 씨/성폭력 피해자]
■ 치밀하게 이뤄지는 그루밍…피해자들 폭로 못하는 이유는?

그루밍을 당한 피해자들이 목소리 내는 것을 더 힘들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전문가들은 그루밍 수법이 미성년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고 치밀하게 이뤄진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한 상담기관에 따르면 그루밍은 크게 여섯 단계에 걸쳐 이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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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피해자 고르기
2) 피해자의 신뢰 얻기
3) 욕구 충족시켜주기
4) 고립시키기
5) 관계를 성적(性的)으로 만들기
6) 통제 유지하기
출처: 탁틴내일아동청소년성폭력상담소 //
가해자는 피해자를 고르는 것부터 계획적입니다. 오랜 시간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서 신뢰를 쌓은 가해자는 보호자로부터 피해자를 고립시키고 관계를 성적으로 만들어 갑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자들은 자신이 호감을 갖고 있는 대상에게 당하는 성적 행위를 성폭력으로 봐야 하는지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지난해 여중생을 수차례 성폭행한 혐의를 받은 40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무죄 판결을 받으면서 큰 논란이 일기도 했습니다. 당시 기획사 대표 측은 피해 여중생이 보낸 편지와 문자 메시지를 증거로 제출했는데요. 증거에서 '사랑한다'는 표현과 애정을 표현하는 이모티콘 등이 발견되자 재판부는 "여러 사정에 비춰볼 때 피해자의 진술을 선뜻 믿기 어렵다"며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해당 사건이 전형적인 그루밍 범죄에 해당한다며 아동·청소년 성폭력 피해에 대한 재판부의 이해가 부족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루밍
■ 미성년자 의제 강간 연령 13살…이대로 괜찮나?

그루밍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제도적인 개선이 우선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읍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성관계에 동의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는 기준인 '미성년자 의제 강간 연령'이 만 13살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폭행, 협박 등이 없었고 사전에 합의를 했더라도 만 13살 미만과 성관계를 했다면 성폭력으로 처벌받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의 대부분 주나 영국, 호주 등에서는 의제 강간 연령을 만 16살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만 19살이 돼야 투표권이 부여되고,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울 수 있는데요. 이 때문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권리를 부여할 때는 청소년의 성숙도를 낮게 평가하고, 보호가 필요한 성문제에 대해서는 성숙도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며 "의제 강간 연령을 높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다만, 의제 강간 연령을 높이면 청소년들이 자율적으로 성적 행위를 판단할 능력을 부인하게 된다는 의견도 있는 만큼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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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탁틴내일 상임대표]
미성년 피해자가 동의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가 대등했는지, 피해자가 다른 선택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 이런 행동을 했을 때 사회의 반응은 어떨지 등을 다 이해한 상태에서 동의한 것과 모르는 상태에서 한 것은 다릅니다. 선진국에서는 이런 맥락을 보면서 판단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목숨 걸고 저항하지 않으면 성폭력을 입증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
(취재: 유덕기 / 기획·구성: 송욱, 장아람 / 디자인: 정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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