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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마부 대접도 못 받은 임진왜란 의병장들

사진-1-1-오연(吳連) 공신조서(日 교토대 소장, 제공 : 고대 민족문화연구원)
오연(吳連) 공신조서(日 교토대 소장, 제공 : 고대 민족문화연구원)
“너는 미천한 신분으로서 임금을 뒤로하지 않고 어가와 세자의 출정에 말고삐를 짊어지는 공을 이루었고, 천리 길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험난함을 두루 겪으면서도 시종일관 한마음으로….”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자신의 말 고삐를 잡은 마부에게 내린 호성공신 조서의 일부입니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해외한국학자료센터가 일본 교토대 서고에서 찾아낸 자료입니다. 조서에는 “동쪽 오랑캐가 흉포하고 사납게 우리나라를 유린하여…조정 안팎의 신하와 백성들이 대부분 짐승 달아나듯 새가 숨어버리듯 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자신을 수행한 마부에 대한 선조의 고마움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마부로서 공신이 된 사람은 오연 외에도 전용, 이춘국, 이희령 등 5명이 더 있었습니다. 이들에게는 포상으로 각각 반당 4인, 노비 7구(口), 구사(丘史)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내구마 1필씩이 하사됐습니다. 반당은 신변 보호를 위해 나라에서 내리던 일종의 경호원이고, 구사는 관노비입니다. 경호원 4명에 노비 9명, 거기에 왕실에서 기르던 말 1필씩을 내렸으니 대단한 은전입니다.

전지 60결은 어느 정도나 되는 넓이의 땅일까요? 결(結)은 소출량을 기준으로 한 넓이이기 때문에 토지 등급에 따라, 또 시대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 당시 1결은 1등급 토지를 기준으로 9천 859제곱미터, 약 1만 제곱미터 정도됩니다. 가로, 세로 100m니까 상당한 넓이죠. 이런 땅을 60결씩 내렸으니 가로 1km, 세로 600m 정도 되는 엄청난 토지를 부상으로 받은 겁니다.
동래부순절도(보물 제392호, 육군사관학교 박물관 소장)
논공행상은 전쟁이 끝나고 6년 뒤에 이뤄졌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7년(1604년) 6월 25일 기록입니다. “서울에서 의주까지 시종 거가를 따른 사람들을 호성공신으로, 왜적을 친 제장과 군사와 양곡을 주청한 사신들은 선무공신으로, 이몽학의 난을 토벌해 평정한 사람들을 청난공신으로 하고 각각 3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있게 명칭을 내렸다”고 돼 있습니다.

호성공신부터 볼까요. 그 수가 무려 86명입니다. 1등은 이항복, 정곤수 등 2명이고, 2등은 이원익, 윤두수, 류성룡 등 32명, 그리고 3등은 52명입니다. 앞서 본 마부 6명 외에도 내시 24명, 의관 2명도 모두 3등 공신으로 벼락출세합니다. 무슨 엄청난 공을 세웠기에 무더기로 호성공신이 됐을까요?

1592년 4월 13일 부산항에 상륙한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허겁지겁 수도인 한양성을 버리고 개성으로 도피했다가, 다시 평양으로 내뺍니다. 개 돼지 같은 백성들이야 도륙을 당하건 말건 왕과 대신들의 관심사는 자신의 안전뿐이었습니다. 분노한 백성들이 한양성에 불을 지르고, 평양성에서는 선왕의 위패를 들고 피신하던 신하와 궁녀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가마를 때려 부숩니다. 왕은 야반도주를 택합니다.

당시 평양성 상황을 류성룡은 <징비록>에 이렇게 적습니다.

“칼을 들고 길을 가로막으며 함부로 공격하여 종묘사직의 위폐가 땅에 떨어졌다. 백성들은 도망가는 재신들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희들은 평소 나라에서 주는 녹봉을 훔쳐 먹더니 지금은 이처럼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속이느냐”…(중략)...부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 모두 화가 나서 삿대질하며 소리쳤다.”
징비록(국보 제132호)
평양을 떠난 선조의 행렬은 울부짖는 백성을 뒤로 한 채 안주, 영변을 거쳐 의주로 달아납니다. 의주까지 두 달 남짓한 피난살이에 왕의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어려웠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겪은 고초에 비하면 차라리 호강이었습니다. 이들은 오직 명나라의 파병에만 목을 매고 있었습니다.

일본의 침략 낌새를 놓고 동인, 서인으로 갈려 오판하더니, 피난하면서도 왕의 몽진 책임을 놓고 서로 옥신각신합니다. 그나마 그때는 좀 덜 하나 싶더니 1년 6개월 만에 한양에 돌아온 뒤엔 남인이니, 북인이니 하며 서로 물어뜯기에 바쁩니다. 승전 전략은 고사하고 도대체 침략한 왜군이 몇 명이나 되고, 어디에 주둔하는지, 아군 전력은 어느 정도인지 등등 가장 초보적인 정보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호종공신이었습니다.

모든 대신들이 공이 없었다거나, 패전의 책임이 모두 이들 탓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입버릇처럼 “내부(內附)하는 것이 나의 뜻”이라면서 중국 요동으로 달아나자고 고집을 부리던 선조를 주저앉힌 게 이들의 공이라면 공이겠죠. ‘내부’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 안으로 들어가 붙는다’는 뜻입니다. 명나라에 들어가 빌붙겠다고 한 거죠. “대가(왕의 가마)가 국토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고 반대한 류성룡을 비롯해(<조선왕조실록> 1592년 5월 1일) 윤두수, 최흥원 등이 모처럼 한목소리로 왕의 요동행을 반대합니다.
 
이번엔 선무공신을 살펴보죠. 우선 그 수가 호성공신 보다 훨씬 적습니다. 18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마저도 좀 이상합니다.

1등 공신은 이순신, 권율, 원균 등 3명입니다. 민족의 영웅 이순신이야 두말 할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 원균이 1등 동신? 사사건건 이순신의 발목을 잡더니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패해 그간 이순신이 피와 눈물로 키워온 수군 수천 명과 160여 척의 전함을 한 방에 말아먹고 자신도 목숨을 잃었던 인물입니다.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뒀지만, 적의 거짓정보를 믿고 원균을 불러 곤장까지 쳐가며 칠천량 해전을 강요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전쟁을 하다 보면 공도, 과도 있을 테지만, 최소한 원균이 이순신과 나란히 1등 공신이 된 것은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습니다.
이순신 장군 난중일기(국보 제76호)
더욱 한심한 건 선무공신에 의병장들이 죄다 빠졌다는 점입니다. 무능하고 부도덕했던 왕과 대신들, 성을 버리고 줄행랑치기 바빴던 장수들… 그나마 국토를 지켜낸 것은 고경명 부자, 곽재우, 김덕령, 조헌과 7백 의병, 영규 대사와 승병들 등등 전국 각지에서 들고 일어난 의병장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선무공신 명단 어디에도 없습니다.
700의총 청주성탈환도(제공 : 문화재청)
더 가관인 것은 김덕령, 곽재우에겐 반란 누명까지 뒤집어씌웠습니다. 선조 29년(1596년) 이몽학이 지배 체제에 환멸을 느낀 수천 명을 모아 충남 부여에서 봉기했는데 “김덕령 같은 의병장들도 호응하기로 했다”고 거짓 선동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당국은 김덕령과 곽재우, 홍계남을 잡아들입니다. 곽재우, 홍계남은 간신히 풀려났지만, 김덕령은 선조의 친국으로 정강이뼈와 온몸이 부서진 끝에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후 곽재우는 고향으로 돌아가 초야에 은거해 버립니다.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조차 “그(김덕령)가 억울하게 죽게 되자 소문을 들은 자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했다. 그때부터 남쪽 사민(士民)들은 덕령의 일을 경계하여 용력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쓰고 있습니다(<조선왕조실록> 선조수정실록 29년(1596년) 8월 1일).
김덕령 정려 비각(제공 : 문화재청)
곽재우 유물(보물 제671호)
공신교서에는 선조의 열등의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백성을 버리고 내빼기 바빴던 그로서는 남해에서 백전전승을 올리던 이순신, 백성들을 모아 게릴라전을 펼치던 의병장들이 부담스런 존재였을 겁니다. 백성들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선조의 열등감은 이순신 탄압과 의병장 평가절하로 나타납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5년(1602년) 7월 23일에는 한 나라의 왕이 한 발언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의 대목이 나옵니다. 좀 길지만 소개해 보죠. “중국 조정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적을 몰아내고 강토를 회복했으니 이 또한 옛날에 없던 공적이다. 이것은 호종했던 여러 신하들의 충성스러웠던 덕분이니, 어찌 다른 사람들이 한 일이겠는가. 또 힘껏 싸운 장사들에 대해서는 그 공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겠으나 우리나라 장졸에 있어서는 실제로 적을 물리친 공로가 없다. 그 중에서 참작하여 합당하게 마련하되 외람되게 해서는 안 된다”.

선조는 명 황제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왕의 입지가 약해진다 싶으면 “그만두겠다”며 15차례나 퇴위 쇼를 벌이더니 명 황제에게 사퇴를 허락해달라는 글을 올립니다. 워낙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내용이어서인지 임진왜란 관련 책에도 잘 소개되지 않았더군요. 인용해 보죠. “황조의 거룩한 명을 받아 동쪽 변방을 지킨 지 20여년 동안에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황제께 충성하는 정성만 간절할 뿐이었습니다… (중략) 그 기세를 당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그저 중국의 곁에 나아가 죽고만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스러운 천자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여러 대인들이 노고하여 병사를 동원하여 구제하게 됨을 힘입어 오늘날이 있게 되었으니, 황은이 하늘처럼 망극하여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1597년) 9월 3일). 420여년 전, 우리는 그런 왕과 대신들을 지도자로 모시고 7년간 전쟁을 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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