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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회고록을 검증한다⑦] "폭발물 해체 협조한 학생, 강경파 총격으로 사망"

[전두환회고록을 검증한다⑦] "폭발물 해체 협조한 학생, 강경파 총격으로 사망"
"도청 지하실에 설치된 엄청난 분량의 폭약을 해체하려다 피살된 학생의 희생은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 지하실로 들어가 폭발물에 장착되어 있던 뇌관 제거 작업을 하던 중 강경파 학생들에게 폭발물 해체작업에 협조하던 온건파 학생이 발각되어 총격으로 사망했다."
- 전두환회고록 1권 p.380, 434

● 온건파 학생, 강경파 총격으로 사망?

5·18 당시 전남도청 지하에 폭발물이 보관돼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폭약관리반은 9명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일부는 폭발물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해 군의 도움을 받아 뇌관을 분리합니다. 뇌관을 분리한 사람들을 전두환회고록은 '온건파 학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강경파 학생들에게 발각돼 총격으로 사망했다는 것이 전두환 씨 주장입니다. 5·18 재단 측은 이 주장이 허위라는 입장입니다. 폭발물 뇌관 해체 작업 중에 온건파 학생이 총격으로 숨진 사실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법원은 회고록에 대한 출판·배포 금지 가처분 사건에서 이 쟁점도 다루고 있습니다. 전두환 씨 측은 애초 법원에 낸 답변서에서 이 부분에 대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법원에 이 주장의 근거를 추가로 제출했는지 문의했지만,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5·18 재단 측은 "온건파 학생인 이경식이 강경파 학생들에게 발각돼 총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재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경식은 사망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시민군 사이의 내분으로 온건파가 총격으로 숨졌다는 얘기가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38년 전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  폭약관리반, 5·18 사망자 명단에는 1명뿐

폭약관리반은 총 9명이었습니다. 문용동, 김영복, 이경식, 정남균, 양홍범, 박선재, 이혁, 강남열, 정곤석 씨입니다. 뇌관 제거 작업은 문용동, 김영복 씨가 주도적으로 했지만, 전두환 씨가 회고록에서 특정 이름을 거론한 것은 아니므로, 9명 가운데 강경파 학생의 총격으로 숨진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봤습니다. 국가기록원이 집계한 5·18 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는 162명인데, 사망자 명단과 검시조서를 보면 9명 가운데 '문용동' 씨 1명의 이름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머지 8명은 5·18 때 숨지지 않았습니다.

전남도청 지하 폭약과 관련해서는 논문도 있습니다. 『1980년 5월, 광주를 구한 10인의 의인들』(김형석 역사학 박사 지음)에 따르더라도, 폭약관리반 9명 가운데 당시 숨진 사람은 문용동 씨 1명뿐입니다. 다른 7명은 체포돼 조사를 받았고, 1명은 도피했다가 자수해 훈방되었다고 논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강경파 학생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고 전두환 씨가 주장하는 사람은 문용동 씨 말고 없어 보입니다.
“폭약관리반원 9명 중 문용동 씨만 사망” (『1980년 5월, 광주를 구한 10인의 의인들』(김형석 역사학 박사 지음))

●  故 문용동 씨는 계엄군 총격에 숨졌다

故 문용동 씨는 당시 26살, 호남신학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구내에서 숨졌다고 광주지검 검시조서에 기록돼 있습니다. 사인은 '엠16 총상'입니다. M16은 주로 계엄군이 쓴 총입니다. 전두환 씨 측은 시민군이 M16을 빼앗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M16 총상이라고 해서 꼭 계엄군이 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다고 회고록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실제로 폭약관리반도 M16을 썼습니다.
“故 문용동 씨의 사인은 엠16 총상 (광주지방검찰청 검시조서)”
검찰과 법원의 판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검찰은 1995년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에서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입 상황을 설명하면서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 작전 수행 과정에서 문용동(남, 26세, 호신대 4년) 등이 총상으로 사망"했다고 밝혔습니다.

법원 판단도 다르지 않습니다. 1996년 8월 26일 전두환 씨에 대한 당시 서울지방법원 1심 판결문에는 '내란목적살인 피해자 및 피해상황 일람표'가 붙어 있는데, 문용동 씨는 "1980.5.27 새벽 전남도청 부근, 광주 재진입 작전 수행과정"에서 숨진 것으로 나옵니다. 1996년 12월 16일 서울고등법원 항소심도 마찬가지입니다. 판결문 별지에 '피해자 및 피해상황 일람표'라는 제목으로 같은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폭발물 뇌관 제거 작업 과정에서 총격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작전 수행과정에서 피해” (1996년 8월 26일 서울지방법원 판결문 별지)

● 강경파 학생 총격설…어떻게 시작됐나?

5·18 이후 전남합동수사단은 전남도청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시민군을 검거해 조사한 뒤 재판에 넘깁니다. 폭약을 관리하던 사람들도 검거돼 조사를 받았고, 그 진술조서가 남아 있습니다. 합동수사단은 당시 폭약관리반 중 정곤석 씨가 검거되기 전에 총을 쐈는지 여부를 여러 차례, 집중적으로 캐물었습니다. 정곤석 씨의 38년 전 자필진술서가 남아 있습니다.

정곤석 씨 자필진술서 (1980.6.13)
"저는 총을 10발을 쐈다고 하나 지금까지 그런 말을 조사관님 앞에 말을 한 사실이 없습니다."
 
정곤석 씨 자필진술서 (1980.6.22)
"저는 총을 10발을 쐈다고 하나 지금까지 쏴본 일도 없고, 총을 쏠 줄도 모르고 그런 말을 조사관님에게 하지 않았고 거기 있던 사람들이 제가 총을 안 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곤석 씨 “절대로 총을 쏜 사실이 없습니다.” (전남합동수사단 피의자신문조서 제1회, 1980년 6월 24일)
정곤석 씨는 총을 쏜 사실 자체를 부인했습니다. 전남도청에 정 씨와 함께 있었던 폭약관리반 가운데 정남균, 김영복 씨에 대한 전남합동수사단의 피의자 신문조서도 남아 있습니다. 누군가 총을 쐈다면 그것을 목격했을 사람들입니다.

전남합동수사단 피의자신문조서 (제1회, 1980.6.24)
Q. (정남균 씨에게) 정곤석이가 보초를 설 때 총을 쏜 사실이 있습니까.
A. (정남균) 보초를 서고 있는데 그 당시는 총을 쏜 사실이 없습니다.
Q. 피의자와 같이 검거될 때 정곤석이가 총을 들고 군인과 대항하였던가요.
A. (정남균) 지하실에서 빠져나갈 때부터 총을 들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검거될 때에도 총을 든 사실이 없습니다.

Q. (김영복 씨에게) 정곤석이가 보초를 서고 있을 때 총을 쏜 사실이 있는가요.
A. (김영복)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Q. 정곤석이가 5.27 새벽에 도망갈 때 총을 가지고 나간 것을 보았는가요.
A. (김영복) 본인과 같이 나갔는데 총을 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Q. (정곤석 씨에게) 5.27 상무대에서 진술시 총을 10발 발사하였다고 진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사실인가요.
A. (정곤석) 본인은 그 당시 눈에 파편을 맞고 얼굴이 부어있고 어깨 파편을 맞고 정신이 없었는데 수사관이 무어라고 문의하였는데 또는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기억이 없으며 그 당시 본인이 총을 쏘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Q. 도청에서 보초를 서고 있으면서 발사하고도 이제 와서 부인한 것이 아닌가요.
A. (정곤석) 절대로 총을 쏜 사실이 없습니다.

팩트키오 7
전남도청에서 함께 폭약을 관리했던 양홍범, 박선재 씨도 전남합동수사단에서 정곤석 씨가 총을 쏜 사실이 없다고 진술했습니다. 합동수사단이 그래도 총을 쏜 것 아니냐고 캐물은 이유는, 정 씨가 1980년 5월 27일 눈에 파편을 맞아 시력을 잃었던 날, 수사관에게 그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합동수사단은 사건을 전교사 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넘겼습니다. 1980년 8월 3일 전교사 보통군법회의 검찰부의 정곤석 씨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를 보면, 총을 쏘지 않았느냐는 질문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강경파 폭도가 사살 주장은 왜곡"…2007년 국방부가 이미 밝힌 진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의 5·18 조사 결과도 같은 맥락입니다. 문용동 씨는 계엄군에 의해 숨졌는데, 강경파 학생이 사살한 것처럼 계엄사가 왜곡?조작했다는 것입니다.

"광주사태진상조사단의 '광주사태 진상조사보고'는 (중략) 온건파 학생 4명이 전남북계엄분소에 TNT 뇌관 2,300개를 반납하고 전남도청으로 잠입, 수류탄 분리 작업 중 5. 24. 23:00경 강경파 폭도들이 이를 목격하고 이경식을 사살했다고 기술했다. 이 보고에 등장하는 이경식은 '5·18' 기간 동안의 사망자 명단에 없으며 정황상 문용동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는 5. 24.이 아닌 5. 27. '상무충정작전' 도중 3공수여단 특공조에 의해 여러 발의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중략) 문용동이 공수부대에 의해 사살됐음을 확인하는 등 전남합수단과 전교사에서 사실 확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강경파 폭도들에 의해 사살됐다고 주장하며 사실 자체를 왜곡했다."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 5·18 조사결과보고서 p.119

폭발물 해체에 협조하던 학생이 강경파의 총격으로 숨졌다면, 5·18 사망자 명단에 있어야 합니다. 폭약관리반 9명 가운데 사망자 명단에 있는 사람은 故 문용동 씨뿐입니다. 그는 강경파 총격이 아니라, 계엄군의 광주 재진입 작전 과정에서 총격으로 숨졌습니다. 폭약관리반이었던 다른 8명 모두 전남합동수사단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총을 쐈다'는 것도, '총 쏘는 걸 봤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시민군 사이의 내분으로 총격이 일어나 누군가 숨졌다면 1980년 5월 전남합동수사단과 군 검찰이 조사했어야 합니다. 취재진이 확인한 진술조서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습니다. 사실이라면, 근거는 전두환 씨 측이 제시해야 합니다.

(자료조사: 서도영)

※ 본 기획물은 한국언론학회-SNU 팩트체크 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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