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전두환회고록을 검증한다③] "경찰이 계엄군 출동을 정식 요청"…진압은 정당했다?

[전두환회고록을 검증한다③] "경찰이 계엄군 출동을 정식 요청"…진압은 정당했다?
"(5월 18일) 시위대가 파출소를 습격하고 순찰차를 전복 방화하는 사태로까지 악화되자 전남도경은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도경 요청을 받은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오후 2시경 정웅 31사단장에게 계엄군 출동을 지시했고, 정웅 사단장은 곧바로 전남대와 조선대에 진주해 있던 7여단 33대대와 35대대에 시위진압을 위한 병력 출동을 명령했다. 광주지역의 시위 진압작전에 계엄군이 투입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 전두환회고록 1권 p.391

● 전두환 측, 계엄군 '투입'과 '진주'를 나누는 프레임

5·18 당시 계엄군의 투입은 경찰 요청에 따른 것이다. 전두환회고록의 주장입니다. 법원은 회고록 출판·금지에 대한 가처분 사건에서, 이 부분도 하나의 쟁점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전두환 씨가 회고록에서 주장한 바는 묘합니다.

당시 7공수여단이 전남대와 조선대로 이동한 것은 시위 진압을 위한 '출동'이 아니라 일단은 '진주'였다. 광주에 모인 계엄군이 '출동'해서 시위 진압을 벌인 것은 경찰 요청에 따른 것뿐이다, 라는 취지입니다. 광주에 온 것은 군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지만, 실제 투입은 경찰 요청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계엄군이 광주에 모인 것은 '투입'이 아니고, 실제 진압작전을 개시한 것이 '투입'이라는 프레임입니다.

전두환 씨 측은 1995년 검찰의 5·18 관련 사건 수사 결과를 근거로 들고 있습니다. 당시 검찰은 "5·18 14:40경 금남로 일대에는 1천5백여 명으로, 충장로 일대에는 1천6백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보도블록과 음료수병을 던지고, 15:50경 시위대 3백여 명이 동산파출소에 투석을 하였고, 경찰은 최루탄과 페퍼포그를 사용해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전교사에 군 병력의 투입을 요청"했다고 밝혔습니다.

● 전두환 측은 "18일 요청" vs 5·18 재단 측은 "19일 요청"

전두환 씨 측은 검찰 수사를 근거로 경찰이 '18일 14:40'에 군 병력 투입을 요청했다고 주장하는데, 5·18 재단은 당시 경찰의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사항' 문건을 근거로 군 병력 투입을 요청한 시점은 '19일 15:18'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의 만 하루 차이가 납니다. 전두환 씨는 경찰이 군 병력을 투입해 달라고 해서 군이 진압했을 뿐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고, 5·18 재단 측은 경찰이 요청한 것은 19일인데 그것과 무관하게 계엄군이 일찌감치 진압에 나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전두환 측이 제시한 근거는 검찰 수사 결과인데, 사실 이 수사 결과를 도출하게 된 근거가 문건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진술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경찰이 군 병력 투입 요청을 19일에 했다는 것은 문건이 남아 있습니다.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이라는 문건입니다. 관련 증언도 있습니다. 전남지방경찰청의 지난해 5·18 조사 보고서에는 당시 전남경찰청 경비계에서 근무한 경찰의 진술이 나옵니다.

"5월 19일로 기억하는데, 노동청과 전대병원 사이에 우리 경력이 고립돼 공수부대에 지원을 요청해 포위망을 빠져나왔다. 20일 저녁 무렵 이미 시위대가 시내 전역을 장악하고 도청으로 밀려왔기 때문에 군 지원을 요청했는데, 경찰이 군에 지원을 요청한 것은 단 두 차례이며, 지시를 받아 내가 직접 요청했다."

경찰의 계엄군 투입 요청 시점과 관련해서, 현재 남아있는 자료로는 경찰 주장이 맞고, 검찰 수사 결과가 틀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5.19 15:18 7공수여단 정보참모에게 병력 지원 요청”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 전남지방경찰청)

“5.18 14:40경 경찰은 군병력 투입 요청” (1995년 검찰 수사 결과)
● 경찰 요청 이전, 계엄군은 대기만 했나?

당시 경찰이 계엄군 투입을 요청했다는 사실에는 양측 모두 동의합니다. 요청한 시간만 다르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전두환 씨가 경찰에 일부 책임을 떠넘길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경찰이 군 병력 투입을 요청한 시간이 언제인가와 무관하게, 당시 계엄군은 경찰의 병력 투입 요청 전에 정말 대기만, 진주만 하고 있었는지,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계엄군이 경찰 요청과 무관하게 시민을 진압하거나, 폭력을 행사한 기록이 남아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전두환 씨가 주장하는 18일 14:40이 맞다고 보수적으로 가정해서 기록을 살펴봤습니다.

●경찰 요청 전에도…진압봉 휘두르고 폭행

① 1995년 검찰의 5·18 관련 사건 수사 결과

전두환 씨 측이 근거로 든 검찰 기록을 검토했습니다. 검찰은 당시 계엄 확대와 계엄군 투입, 계엄군의 시민에 대한 진압 상황을 시간대별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5·18 01:10경 전남대에 진주한 XX대대는 1개 지역대가 학내를 수색하여 잔류 학생 69명을 체포하고, 조선대에 배치된 XX대대는 XX지역대 1개 중대가 건물을 수색하여 잔류 학생 43명을 체포해 06:00 XX사단 헌병대에 인계하였음." 이렇게 돼 있습니다. 경찰이 계엄군 투입을 요청했다고 전두환 씨가 주장하는 그날 오후 2시20분 전에도, 계엄군은 학생들을 체포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가격” (5.18 관련 사건 수사결과, 1995월 7월 18일)
검찰 수사 결과에 따르면 5·18 오전 전남대 정문에서는 이런 일도 벌어졌습니다. "오전 10:00경 학생들이 2백여 명으로 증가해 시위를 하자… 일부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이 던진 돌에 다친 데 분개해 도주하는 학생들을 쫓아가 진압봉으로 어깨, 머리 등을 가격하고 학생들을 난폭하게 연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공수부대원 7명과 일부 학생들이 부상하였음." 또 전남대 후문에서는 "야유를 보낸다는 이유로 시내버스에서 내리거나 타는 학생을 공수부대원이 진압봉으로 가격하고 더러는 연행해 꿇어앉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② '1980년대 민주화운동'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

5·18 오전 전남대 앞에서 일어난 폭력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 문건에서도 복수로 확인됩니다. 책에는 '일지'라는 제목으로 그날의 시간대별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오전 10시, 갑자기 '돌격, 앞으로'의 명령과 함께 공수부대원이 학생들 사이를 파고들며 곤봉으로 무차별 난타(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의 특수곤봉이었음). 상당수 학생 부상. 약 20분간 투석전. 공수대원은 한 학생만 쫓아가 머리를 강타하고 실신하면 끌고 감."

모두 전두환 씨 측이 주장하는 오후 2시 20분 전인데,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오후 1시경, 수창국교에 20대의 군용트럭에 분승한 공수대원 집결. 작전명령 시달 받고 조 편성. 그들은 모두 투석방어용 철망이 부착된 철모를 쓰고 총을 등에 메고 한 손에는 대검, 또 한 손에는 살상용 곤봉을 들고 있었음. 오후 2시경부터 시내 곳곳으로 돌아다니며 진압 시작."

● 계엄군은 폭력 진압의 스탠바이 상태였다

계엄군은 광주에 투입됐고, 진압작전에 투입됐습니다. 광주에 투입된 것은 경찰 요청과 무관합니다. 이미 5월 17일 밤 전남대, 조선대에 계엄군이 깔렸습니다. 경찰 요청 전 학생들을 연행하고 폭행했습니다. 검찰 수사 결과에 남아 있는 내용은 경찰이 요청하기 전에도, 계엄군은 진압작전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전두환 씨 측이 근거로 든 바로 그 검찰 수사 결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전 씨는 경찰 요청을 받아 계엄군을 투입했다고 주장하면,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인 신군부의 만행이 조금이라도 정당성을 얻게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자료조사: 서도영)

※ 본 기획물은 한국언론학회-SNU 팩트체크 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팩트키오 5지표 최종 그래픽

▶ [전두환회고록을 검증한다②] "1980년 5월 21일 오전에 무기고 습격"…시간을 왜곡하다
▶ [전두환회고록을 검증한다④] "계엄군 사망·방송국 방화에…20사단 출동"…사실인가?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