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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사법부는 왜 삼성 앞에만 서면 작아지나

삼성이 아니었다면, 이재용이 아니었다면…

[취재파일] 사법부는 왜 삼성 앞에만 서면 작아지나
지난 1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재판장 김세윤 부장판사)는 뇌물 수수 혐의 등으로 기소된 최순실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초유의 대통령 탄핵을 촉발시킨 국정농단의 주범으로서의 책임을 엄하게 물은 것이다.

재판부는 뇌물 공여 혐의로 기소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게도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다. 그리고 도주의 우려가 있다며 ‘법정구속’했다. 유죄 선고는 법조계의 일반적 관측이었지만, ‘법정구속’은 의외였다는 평가가 많았다. 집행유예가 선고됐던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 판결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이다.

하지만, 재판부는 “거액의 뇌물을 공여한 피고인을 선처한다면, 어떠한 기업이라고 하더라도....(중략) 다소 위험이 따르지만 손쉽고 보다 직접적인 효과가 있는 뇌물공여라는 선택을 하고 싶은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며 엄벌의 필요성을 분명히 했다. 대통령의 선제적인 요구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돈을 준 사람의 책임 역시 가볍지 않다는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재판부는 논란이 됐던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도 인정했다. 안종범 수첩에 기재된 내용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전해들은 내용을 적은 소위 전문증거이기는 하지만, 수첩에 기재된 내용과 관련자들의 증언 및 증거들을 결합하면 대통령과 재벌총수들과의 대화 내용을 추정할 수 있다는 취지였다.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을 부정하며 선수 명단에도 포함시키지 않았던 이재용 항소심 재판부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판단이었다.

● 롯데 vs 삼성…'청탁'에 대한 다른 판단 구조

최순실씨에 대한 엄벌과 재벌에 대한 엄단, 그리고 안종범 수첩에 대한 증거능력 인정까지. 최씨 1심 재판부는 사법부가 전통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던 경제권력을 엄하게 처벌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에 서슬 퍼런 모습을 보였던 최순실씨 1심 재판부는 삼성에게는 예외였다.

최순실씨 1심 재판부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면세점 사업권’과 관련한 뇌물 공여 혐의를 살피면서 청탁이 있었던 것으로 의심되는 시점 전의 롯데그룹을 둘러싼 상황을 먼저 살폈다. 소위 ‘왕자의 난’ 이후 롯데의 지분 구조가 세간에 알려지면서 ‘일본 기업 아니냐’는 비판을 받게 된 롯데그룹이 이를 타개하기 위해 호텔롯데를 국내 증시에 상장하려 했는데, 핵심 사업부인 면세점 3곳 중 1곳의 사업권이 박탈되면서 다급해졌다는 것이다. 청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조성되어 있다는 판단이다.

재판부는 이런 롯데그룹을 둘러싼 사정과 안종범 전 수석 및 관련자들의 진술, 정황 증거 등을 종합해 볼 때 다급해진 신동빈 회장이 면세점 사업권을 되찾기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청탁을 했을 것으로 인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청탁을 위한 동기가 있다는 큰 틀 안에서 증언과 증거를 토대로 추리해 볼 때 신 회장이 ‘면세점 허가’ 청탁을 했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된다는 것이다. 일종의 연역적 추론이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
그런데 재판부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청탁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다른 판단 구조를 선택했다. 재판부는 소위 개별 현안이라고 불리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중간금융지주 회사 도입’, ‘삼성SDS와 제일모직의 유가증권 시장 상장’ 등에 대한 청탁 여부를 판단한 뒤, 포괄적 현안으로서 ‘승계작업’을 위한 청탁은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개별 현안에 대한 청탁이 인정되지 않으니, ‘승계를 위해서’라는 포괄적 현안에 대한 청탁도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귀납적 추론을 한 것이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최순실 1심 재판부가 삼성에 대해 신동빈 회장에게 적용한 연역적 판단을 했다면 부정한 청탁에 대한 판단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재용 부회장의 승계라는 현안은 20년 넘게 삼성의 핵심 현안이었고, ‘e-삼성’ 실패와 선대 회장만큼의 조직 장악력과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던 이재용 부회장에게 리더십의 확보는 필요불가결한 사안이었다. 즉,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승계와 리더십 확보를 위해 삼성이 최고권력자에게 청탁을 해야하는 상황은 오랫동안 존재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이런 세간의 인식을 재판부가 전제했다면, 개별 현안 일부에 대한 청탁이 인정되더라도 포괄적 현안으로서의 '승계작업'을 위한 부정한 청탁은 인정됐을 수도 있다는 취지다.

바꿔 말하면 이런 뜻이다. 신동빈 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독대와 이재용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의 독대 모두 정확히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상황은 동일하다. 독대 당사자들이 구체적인 대화 내용을 진술하지 않거나 특검과 검찰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관련자들의 진술과 증거들을 토대로 대화 내용을 추정할 수밖에 없고, 이를 통해 청탁이 있었는지를 추론해야 한다. 추론에 있어 '청탁을 위한 동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전제하는 것이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데, 이재용 부회장에게도 신동빈 회장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승계 작업 완성이 다급해졌던 삼성의 상황을 전제했더라면 청탁 여부에 대한 다른 판단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 판단에서 제외된 1차 독대와 0차 독대…'청탁은 총수만 가능한가'

재판부가 개별 현안에 대한 청탁이 없었다고 판단했으니, 삼성에 대한 판단 구조가 바뀌었더라도 포괄적 현안으로서의 부정한 청탁은 없었다는 결론은 동일했을까? 그런데 재판부는 특검과 검찰이 제시한 10개의 개별 현안을 모두 살핀 것도 아니다. 재판부는 2015년 7월 25일(2차 독대)과 2016년 2월 15일(3차 독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 독대 전에 마무리된 사안은 판단조차 하지 않았다. 사안이 마무됐으니 청탁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이상한 점이 있다. 특검과 검찰이 초기 기소 내용에도 포함된 2014년 9월 15일 1차 독대, 그리고 2014년 9월 12일의 소위 0차 독대는 재판부가 개별 현안의 청탁 존재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이다. 1차 독대는 대구 창조경제혁신센터 개소식 때로 시간이 채 5분도 되지 않아 청탁을 할 시간도 없었고, 0차 독대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삼성 측 주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차 독대 시점을 대입하면, 2,3차 독대의 전에 마무리가 됐다면 청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개별 현안들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재판부가 2,3차 독대 전이라며 청탁 존재 여부 판단에서 제외한 삼성SDS와 제일모직 상장은 각각 2014년 11월 11일과 12월 18일에 이뤄졌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2015년 5월 26일 발표돼, 같은 해 7월 17일 합병이 가결됐다. 삼성 SDS와 제일모직 상장,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 일가의 현금 확보와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 강화를 위한 핵심 사안들로 모두 1차 독대 이후에 이뤄졌다. 특히,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건은 이재용 부회장이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을 찾아가 면담하고 삼성 직원들이 삼성물산 주주들을 1대 1로 맡아 관리할 정도로 핵심 중의 핵심 사안이었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뒤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안정적 승계를 위해 더욱 다급해진 사안이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고, 개별 현안들이 완성된 시점 앞에 1차 독대 시점을 위치시키면 개별 현안들에 대한 청탁 여부의 판단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재판부는 1차 독대를 판단의 타임라인에서 지웠고, 0차 독대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20년 동안 언론과 학계에서 논의된 이재용 부회장으로의 ‘승계작업’은 개념이 불분명하다는 취지로 반박하며, 개념이 불분명한 만큼 청탁의 대상이 되기 힘들다는 식의 판단도 내렸다. 모두가 아는  ‘승계’의 개념을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에 이어 최순실씨 1심 재판부만 또 모른 셈이다.

재판부는 청탁은 대통령과 총수의 독대에서만 가능하다는 식의 판단도 내리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과 박근혜 전 대통령 독대 전에 마무리됐다고 청탁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도, 청탁은 '독대'에서만 가능하다는 사고에 기반한다. 그런데 실무자급에서 청탁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독대에선 추인만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독대에선 구체적인 논의 없이 은유적인 대화가 오가고 이후 실무자급에서 구체적인 논의가 오갔을 가능성도 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과 관련해 실형을 선고 받은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의 사례가 이에 해당될 수 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런 가능성을 모두 배척했다. 

● 이재용 항소심과 최순실 1심…삼성의 '부정한 청탁' 없었다는 결론은 같다

‘삼성 봐주기 판결 아니냐’는 비판은 이번 최순실씨 1심 판결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 판결에서 가장 크게 제기됐고, 삼성그룹 총수에게 처음으로 집행유예 없는 징역형을 선고했던 이재용 부회장 1심 판결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라며 이재용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1심 재판부는 재산국외도피죄와 관련해선 말 구입비는 인정하지 않고, 코어스포츠 용역 대금 37억여 원 만 인정했다. 말 구입비를 포함해 인정액이 50억 원을 넘었다면 이 부회장에겐 징역 10년 이상이 선고될 수 있었고, 그랬다면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도 집행유예를 선고하기 힘들었다.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은 소위 ‘요구형 뇌물’이라는 생소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이 부회장에게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이 부회장을 ‘정치권력에 의한 피해자’로 규정한 항소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겁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했다. 이 판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 인지와 별개로, 재판부는 소위 돈을 뜯겼다고 판단하면서도 최순실씨 측에게 승마 지원을 위해 넘어간 돈을 ‘강탈’이 아닌 ‘뇌물’로 규정했다. 재산국외도피죄는 ‘뇌물을 준 것이지 삼성 측이 사용할 의사가 없었다’며 아예 무죄로 판단했고, 안종범 수첩은 증거능력을 부정하며 판단에 고려하지도 않았다.

한 변호사는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과 관련해 “무죄를 주기 위한 전제 하에 쓰인 판결문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부정한 청탁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안종범 수첩의 증거 능력을 부정하며 판단에 고려하지도 않았고, 형량이 높은 재산국외도피죄는 법을 어겨 돈이 해외로 나가면 유죄로 인정해야 하지만 ‘사용 의사’라는 개념을 만들어 무죄를 선고 한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재판부의 논리대로라면 최순실씨에게 승마관련 지원을 한 것도 삼성이 돈을 강탈 당한 만큼 무죄로 선고했어야 한다”고 일갈했다.

말 구입비를 뇌물로 인정한 최순실씨 1심 재판부의 판결은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의 판결보다는 진일보한 것이지만, 부정한 청탁은 없었다는 결론은 이재용 부회장 항소심 재판부와 동일하다. 포괄적 현안으로서 '승계작업'에 대한 청탁을 인정한 이재용 부회장 1심 재판부의 판결보다 후퇴한 결과다. 이로서 삼성은 두 번의 재판부에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강요에 의해 수십 억 원에서 수백 억 원의 돈을 빼앗긴 피해자가 됐다.

● '삼성이 아니었다면'…사법부는 왜 삼성 앞에서만 서면 작아지나
판사, 사법부 블랙리스트 조사결과
일각에서는 말 구입비를 뇌물로 인정한 최순실씨 1심 재판부가 이재용 부회장을 대상으로 한 재판에서도 동일한 판단을 했을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횡령액이 50억 원이 넘으면 집행유예가 불가능한 5년 이상의 형이 선고되는데, 재판 당사자가 최순실씨가 아닌 이재용 부회장이었다고 해도 과연 말 구입비까지 뇌물로 인정해 중형을 선고했겠느냐는 의심이다. 최씨 1심 재판부가 이재용 부회장의 청탁 여부에 대한 판단을 하기는 했지만, 이에 근거해 형을 선고한 것은 이재용 부회장이 아닌 최순실씨였다.

언젠가부터 ‘정치권력은 유한하지만, 경제권력은 무한하다’는 말이 ‘정치권력은 유한하지만, 삼성의 권력은 무한하다’는 말로 변주돼 회자되고 있다. 사법부에 있어선, 다른 재벌에겐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 사법부가 삼성 앞에선 여전히 작아진다는 의미다.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1,2심 판결과 최순실씨에 대한 1심 판결에서 강약의 차이만 있을 뿐 이 말은 증명됐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재판부는 ‘법대로 했을 뿐'이라고 억울해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법대로 하자’는 말은 강자(强者)의 언어다. 법의 허점을 파고 들 수 있고, 부정한 일을 저질러도 막강한 법률적 지원을 바탕으로 법적 제재를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이다. 일반 국민에게 ‘법대로 하자’는 말은 공포의 언어로, 일반 국민 눈높이에 있는 언어가 아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사법부 신뢰 회복의 전제 조건으로 ‘국민의 눈높이’를 강조했다. 사법부 신뢰는 결국 판결에 대한 신뢰를 의미하고, 판결에 대한 신뢰는 국민들에게 판결 내용을 설득 시킬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둘러싼 세 번의 판결에 대해 격한 비판이 쏟아져 나오는 건, ‘국민의 눈높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반증이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참여하는 전원합의체에서 진행될 것으로 보이는 이재용 부회장 상고심에서는 어떤 판결이 나올까? ‘국민의 눈높이’를 강조한 김명수 법정은 삼성에 대해서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는 판결을 내놓을 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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